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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황금 유물을 둘러싼 운명들 본문
"난 황금 구덩이를 두 번 발견했지요.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물에 숨겨진 진실을 위해서요."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황금을 발굴한 고고학자 사리아니디 Victor Sarianidi-
사실 고고학자들이 발굴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당황하는 경우는 다반사다.
가장 큰 이유는 보이지 않는 땅속을 발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않은 대형 유물이 발견된다면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침착함이다.
하지만 아무리 침착하더라도 실수는 한다.
때문에 중요한 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의 사소한 실수들은 고고학자들의 숙명이다.
○트로이 황금의 진실
일반인들이 고고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Heinrich Schliemann(1822~1890)과 그의 트로이 Troy 발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슐리만은 어린 시절 호메로스 Homeros(영어 Homer)의 ≪일리아스 Iliad≫(또는 ≪일리아드≫)를 읽고서 그것을 증명하겠다고 평생을 소원해왔고, 은퇴한 뒤 실제로 트로이의 흔적을 발견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발견은 고고학계에서는 가장 놀라운 업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잘못된 발굴의 하나로 기억한다.
트로이 유적 Troy Runis은 몇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이룬 거대한 진흙 언덕인 테페 Tepe에 자리하고 있었다.
건조한 중앙아시아와 근동 지역에서는 1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뜨거운 열기를 막을 수 있는 진흙 벽돌로 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집을 다시 지을 때가 되면 그냥 집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었다.
이런 건축과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몇십 미터의 진흙 언덕을 이루는 테페가 만들어진다.
트로이 유적이 발견된 히사를리크 언덕 Hisarlik Tepe도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현재 트로이 유적이 있는 테페의 표면에는 로마 Roma 시대의 극장과 다양한 건물 터가 있다.
그러니 발굴을 할 때도 몇천 년의 흔적을 마치 양파껍질 벗기등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슐리만은 황금을 찾아서 명성을 얻겠다는 생각이 너무 앞섰다.
무작정 황금을 찾아서 땅을 파다가 정작 트로이가 있었던 지층을 파고 더 깊숙이 내려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황금 유물이 나오자 그는 인부들을 현장에서 내보내고 30살이나 어린 부인과 둘이서 황금을 파내어 아내에게 걸어주고 사진을 찍었다.
트로이의 유적을 소개하는 책들에서 꼭 등장하는 바로 그 사진이다.
소피아 Sophia가 걸친 황금 유물은 바로 이때에 둘이 발견한 것들이었다.
사실 슐리만이 꿈에 그리던 황금을 찾아서 자신과 고락을 함께 한 부인의 목과 머리에 걸어주며 그간의 수고를 위로하는 장면은 일반인들에게는 꽤나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고고학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유물이 발견되면 보존처리를 위하여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고 유물이 훼손될 수 있는 사적인 행위는 일절 금지되어야 한다.
신기하다고 만지고 몸에 걸치는 것처럼 무리하게 다루면 유물에 훼손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원칙은 그렇지만, 최근까지도 황금 유물과 관련된 비슷한 해프닝 happening(우발적인 사건)은 있어 왔다.
1971년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발견되었다.
해방 이후 최초의 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전국이 들썩였다.
이에 청와대에서 발굴단에 연락을 해 대통령이 직접 유물을 보고 싶어 하니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당시 발굴단장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김원룡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면 유적의 발굴과 보존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한달음에 보물들을 가지고 가서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무령왕비가 찼던 팔찌를 잡고 "이게 진짜 순금인가?"라면서 손으로 이러저리 당겼고, 실제가 팔찌가 휘어져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현지에서 같이 발굴한 황금 유물을 사유화했다는 점에서 슐리만은 고고학자로서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분위기에서 그런 잘못은 쉽게 용인되었고, 슐리만은 트로이의 비밀을 규명한 사람으로 알려지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위대한 발견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트로이 유적은 수많은 시대의 문화가 복잡하게 얽여 있는 곳이다.
과연 슐리만이 발굴한 황금이 트로이 왕국의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슐리만이 발굴한 유물은 실제 트로이 왕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적을 무시하고 이 황금을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전쟁을 벌인 프리아모스 Priamos의 이름을 따서 '프리아모스의 황금 Priam's Gold'이라고 명명해버렸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황금은 3200년 전에 살았던 프리아모스 왕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약 4400년 전의 황금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슐리만은 이 '모리아모스의 황금'을 파기 위하여 그 위에 쌓여 있었던 트로이의 문화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슐리만은 세계 최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트로이 유적을 없애버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에게 실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땅속을 제대로 알기도 어렵고, 피치 못할 시행착오는 일상다반사가 된다.
또 실수가 아니라고 해도 새로 나온 유물로 자신의 연구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슐리만도 뒤늦게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면 어땠을까.
사실 그 황금이 아니어도 슐리만이 발굴한 히사를리크 언덕이 트로이라는 것은 공인이 되었기 때문에 슐리만의 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라진 황금 유물
하인리히 슐리만은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저에 세상을 떴고, 그가 발굴한 대부분의 황금 유물을 독일 베를린 신新박물관 Neues Museum in Berlin에 소장되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 Hitler's Nazi Regime이 붕괴되면서 미국 United States과 소련 Soviet Union은 베를린을 동서로 분할했다.
당시 베를린박물관에서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실크로드의 유물을 포함해서 3분의 1 가량의 유물이 유실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트로이의 황금 유물도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 Russia가 들어선 뒤, 엉뚱하게도 트로이의 황금 유물은 러시아 푸시킨박물관 Pushkin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히틀러의 패망이 가시화될 무렵 소련은 전쟁 중에 독일이 소련 영토 안에서 자행한 파괴를 보상받겠다는 명분으로 전리품 연대(일명 문화재 부대) Russian Alsos를 창설했다.
이 전리품 연대는 독일군의 핵무기, 첨단무기뿐만 아니라 문화재 등 소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물론 문화재 약탈과 파괴를 시작한 건 독일이 먼저였다.
독일군은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위대한 아리안족 Aryan의 유물이 아닌 것은 파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의 문화재와 건축물을 파괴했던 것이다.
전쟁 중에 일어난 피장파장의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때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손상되거나 옮겨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어처구니없는 이 황금 유물의 쟁탈전 내막이 알려진 뒤 유물 반환을 요구하는 소동이 일어날 법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 반환을 요구할 수도 없어 보인다.
애초에 트로이의 황금 유물이 독일에 있는 것부터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슐리만도 트로이의 황금 유물을 오스만투르크 Ottoman Turks의 땅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독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독일이 러시아가 소장한 트로이 황금 유물의 반환을 요구하려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이집트의 미라를 비롯해 수많은 세계의 보물을 반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 역시 전쟁을 치르며 소련 영토에서 파괴한 문화재를 보상해야 한다.
이렇게 피차 떳떳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1996년에 트로이의 황금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었다.
○카자흐스탄 황금인간의 숨은 영웅
2016년 7월 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실 조사팀과 함께 황량한 카자흐스탄 Kazakhstan의 수도인 누르술탄 Nur-Sultan(2022년 누르술탄 이전의 이름이었던 아스타나 Astana로 다시 환원)에 있는 국립카자흐스탄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을 방문했다.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2500년 전 고분에서 발견된 황금인간의 유물들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박물관의 부관장이 러시아 유학 생활을 함께 했던 내 오랜 친구여서 카자흐스탄 쪽에서는 무척 호의적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다.
카자흐스탄 초원의 황금문화는 흔히 '사카 Saka'라고 불리는 유목민들이 남긴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을 한 사람들을 흔히 '스키타이문화 Scythian culture' 또는 '사카문화 Saka culture'라고 한다.
사카는 크게 보면 스키타이 Scythian 계통의 사람들로, 이란 페르시아 문화 Persian Culture(또는 Culture of Iran)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황금문화를 중앙아시아에서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사실 필자는 알타이 Altai를 중심으로 하는 시베리아 Siberia의 유물들은 제법 많이 보았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사카문화의 황금 유물을 직접 조사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카자흐스탄의 국보로 대접받은 이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유물함의 빗장이 열릴 때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
막상 유물을 대하고 보니 몇천 년이 지나도 전혀 빛을 잃지 않은 이 황금의 빛에 기가 눌리는 느낌이었다.
손톱만한 장식에도 철사로 꼬고 누금鏤金(구슬처럼 동그랗게 만들어 붙이는 기법)을 하고 역동적인 동물 장식을 빽빽하게 새겨 넣은 그 재주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사카문화의 황금은 특히나 찬란하기 때문에 초원의 황금 유물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초원에 수만 기에 달하는 사카문화의 고분이 있지만 정작 발굴을 하면 황금 유물이 제대로 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대부분 이미 도굴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도굴로는 300년 전에 시베리아로 진출했던 러시아 코사크인 Cossacks들의 것이었다.
고분에서 황금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은 코사크인들은 무작위로 고분을 파헤쳤고, 여기에서 나온 황금들을 녹여서 금화로 만들었다.
다행히 러시아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재위 1682~1725)가 그런 행위를 중단하고 유물을 손상시키지 말고 가져오게 했으니, 그게 유명한 에르미타주 박물관 Hermitage Museum에서 보관중인, 대표적인 초원의 황금 유물 모임인 '시베리아 컬렉션 The Siberian Collection'이다.
이 컬렉션은 다채로운 동물장식을 한 화려한 황금 250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트르 대제가 모은 것이 이 정도이니 실제로 더 많은 황금이 소리 소문도 없이 수많은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이다.
1970년에 카자흐스탄 알마티 Almaty 근처의 작은 마을 이식 Issyk에서 도굴이 되지 않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집트 Egypt 투탕카멘왕 Pharaoh Tutankhamun(재위 서기전 1332~1323?)의 피라미드 pymamid, 한국의 천마총天馬塚이나 무령왕릉처럼 도굴되지 않은 무덤은 고고학자에게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자흐스탄의 이식 고분 Issyk tomb은 신라의 천마총에 충분히 비견할 만했다.
이 고분을 황남대총皇南大塚이 아니라 천마총으로 비유한 이유는 황남대총을 조사하기 위해서 먼저 발굴을 한 작은 천마총에서 엄청난 발견이 이루어진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식 고분의 황금인간은 당사자의 무덤 옆에 같이 묻은 딸린덧널(부곽副槨: 으뜸덧널에 딸려 있어 대개 껴묻을 거리를 넣어 두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의 한가운데에 만든 주인공의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었다.
하지만 도굴꾼들도 그 옆에 딸려 있는 무덤의 존재는 몰랐다.
그 덕에 최초로 도굴이 되지 않은 사카무덤이 정식 발굴된 것이다.
원래 천마총도 더 거대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미리 발굴했지만 황남대총 못지않게 널리 알려졌다.
이식의 황금인간 고분도 비록 딸린덧널이지만 다른 어떤 거대한 고분보다도 사카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대접받는다.
이식 고분은 알마티에서 동북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분포했고, 전체 고분군의 면적은 약 3평방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지금은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서 일부 고분은 마을 속에 있기도 하고, 일부 파괴된 것도 많으니 원래는 좀 더 컸을 것이다.
다행히 황금인간의 무덤이 발굴된 직후 이식 고분박물관 Esik Kurgan Museum이 건립되었고, 현재 약 80여 기의 고분군이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황금인간은 1992년 카자흐스탄이 독립을 하면서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국장(국가의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원의 고분이 모두 도굴된 이유는 유목문화와 관련이 깊다.
유목민들은 집이 없는 대신에 거대한 고분을 지었다.
사실 이것은 유목민들의 생활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을 하면 적의 심장부, 즉 그 나라의 수도 한가운데 왕궁이나 대통령궁을 차지해야만 끝이 난다.
아무리 공군이 포탄을 투하하고 포병이 대포를 쏘아대도 결국 보병이 적의 중심부에 깃발을 꽂아야 끝이 나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서울 수복을 하면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던 일이나 일본의 이오지마いおうじま(유황도硫黃島) Iwo Jima에서 미군기를 올렸던 해병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상징한다.
그런데 유목민들의 전쟁은 상황이 다르다.
유목민들은 평생 집을 옮기면 살기 때문에 수도나 왕궁이 없다.
그러니 초원의 부족들에게 최종 목표는 바로 상대방 부족들이 모이는 무덤들이었다.
각 부족이 모시는 신격화가 된 부족장의 무덤을 파괴하면 그 부족은 사실상 패하게 되는 것이다.
도굴은 유목민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무덤들은 심하게 도굴되어 있다.
카자흐스탄 초원 일대에 있는 사카인들의 고분은 거의 예외 없이 도굴 당한 것이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초원의 곳곳에 있는 거대한 고분들을 발굴하면 당장 황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도굴이 되지 않은 무덤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보통 사카인들의 고분은 중심부 밑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 위에 통나무로 관을 만들어 무덤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고대의 도굴꾼들은 무덤 한가운데에 도굴갱을 파서 도굴을 했다.
보통 도굴갱은 지름이 50센티미터 정도도 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나 몸집이 작은 성인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였다.
가끔은 도굴갱에서 사람뼈와 도끼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도굴하는 도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도굴꾼들은 무덤방이 도달하면 관의 뚜껑을 깨고 안에 들어가 시신이 입고 있던 황금옷들과 여러 황금 유물을 꺼내 갔다.
카자흐스탄 초원에 있는 대부분의 사카시대 고분의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이유는 바로 이런 도굴 때문이다.
모든 대형 발견이 그러하듯, 이식 고분의 발굴도 우연히 시작되었다.
1969년 4월에 이식 마을에 자동차공장을 만들려고 하니 그 공사구역 안에 고분을 구제발굴해달라는 요청이 접수되었다.
고분은 이미 상당히 파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고학연구소 소장 키말 아키셰프 Kimal Akishev는 간단하게 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젊은 고고학자 누루무한베토프 Nurumuhanbetov를 보내 공사하기 전에 현황을 파악해보라고 지시했다.
예상대로 이 고분의 가운데 관이 있는 곳에는 도굴의 흔적이 뚜렷했다.
이미 도굴도 되었고 파괴마저 심하게 된 고분을 굳이 보존할 필요가 없었고, 때문에 그냥 공사를 허가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분에 남아 있는 다른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공사를 중지시켰다.
희박한 가능성이라고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으로 이식 고분의 위대한 발견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970년 4월 2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발굴단은 고작 고고학자 2명에 보조원 2명, 운전사 1명으로, 아주 단출했다.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이미 파괴된 고분에 많은 인원을 배정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고분 가운데 무덤의 서쪽에서 또 다른 관이 하나 발견되었다.
도굴꾼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위치였다.
다시 말해, 이 관은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은 최초의 황금고분이었다.
이 놀라운 발견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해졌고, 이후 한 달 동안의 조사가 이어졌다.
카자흐스탄 남부의 오트라르 Otrar 지역에서 발굴 중이던 아키셰프 소장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이식 고분으로 달려왔다.
이후 아키셰프가 발굴을 주도했고, 이후 황금인간의 발견이라는 영광을 가져갔다.
대부분의 서적에는 황금인간의 발굴자가 당시 고고학연구소의 소장이었던 키말 아키세프로 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발굴을 지휘했고, 카자흐스탄 고고학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하지만 누루무한베토프는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꼼꼼함과 치밀함으로 유적을 살폈고, 마지막까지 발굴의 뒤를 담당했다.
이때 발굴한 '황금인간 Golden Man'은 4000점에 이르는 자잘한 황금이 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황금인간의 복원도 및 모형들을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현장에서 수천 점의 황금을 자세하게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영웅의 뒷모습
2015년, 필자는 누루무한베토프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따사로운 여름 초원의 햇빛 속에서 그의 은빛 수염이 빛나고 있었다.
이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필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누루무한베토프 선생이 한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사망한 뒤에 제자와 동료들이 논문집을 출판하고 관련된 자료들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선생은 키말 아키셰프의 영광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식 고분의 보존과 관리에 평생을 바쳤다.
이식 고분의 발굴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결코 그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식 고분 박물관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서 이식 보분의 보존에 힘썼다.
누군가가 선생을 칭찬이라도 하면 단지 자기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필자에게 이식 고분을 더 보자고 권유했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필자는 떠나야 했다.
대신 내년에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며 우리는 헤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년 뒤에 필자가 다시 그곳을 방문하니 이미 선생은 안 계셨다.
필자가 도착하기 한 달 전에 세상을 뜨신 것이다.
사람에게 운명이 있듯이 유물에게도 운명이 있다.
발견에 울고 웃는 것이 고고학자이지만, 사실 고고학자들에게 황금이나 작은 돌조각이나, 유물은 모두 똑같은 유물 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발견한 유물들을 최대한 꼼꼼하게 복원하는 것이다.
고고학도 인생과 같아서 우연한 행운이 가끔씩 찾아온다.
하지만 그 행운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고고학자들의 능력 그리고 유물에 대한 겸손한 마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한다면, 숨어 있는 진정한 고고학의 영웅을 찾아서 발굴하는 것, 그것은 후대 고고학자의 임무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유물을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할지도 모른다.
○서봉총과 이국의 황태자
19세기 이래로 서구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보물찾기에 나섰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이 처음부터 한반도에서 황금을 찾을 것으로 기대한 건 아니었다.
원래 일본은 평양의 낙랑과 경남 일대의 가야 고분을 조사해서 한국의 북부는 중국 식민지,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식민지 경영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1921년, 경주의 파괴된 고분 근처에서 아이들이 구슬을 가지고 놀던 것이 알려지면서 한 고분이 조사되었다.
일본인들은 여기에서 화려한 신라의 금관을 최초로 발견한 것을 기념하여 이 고분을 '금관총金冠塚'이라고 명명했다.
금관총의 발견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고고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자신들이 발굴한 신라의 금관이 세계 고고학계의 뉴스가 되고 고고학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일본은 신라의 찬란한 황금 유물로 서양 중심의 고고학 판도에서 자신들도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후부터 일본의 고고학은 식민지의 증명이 아니라 황금의 발견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경주 신라 고분에 대한 일제의 관리는 형편없었다.
1920년대, 일제는 경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부속 건물들을 사용하면서 필요한 토사를 황남동 고분군 일대에서 채취했다.
2미터에 이르는 곡괭이로 고분군에서 흙을 퍼내갔으니, 당시 소형 고분에서 흘러내린 유물들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공사를 막지 못했다.
그 와중에 많은 고분들이 파괴되었다.
박물관에서 일본인 연구원들이 파견되었지만, 고작해야 파괴된 틈에서 유물을 수집했을 뿐이다.
문제는 돌과 흙이 더 필요하다는 데 있었다.
그때 일본의 눈에는 파괴되어서 그 속살을 보기 흉하게 드러낸 한 신라 고분이 들어왔다.
지름 60미터에, 남아 있는 높이만 7미터나 되었던 거대한 고분이었다.
당시 경주시 관계자와 경주박물관의 고고학자는 이 고분의 봉분을 발굴해서 거기에서 나온 돌을 건축자재로 쓰고 나중에 봉분 아래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어떻게 한 국가의 왕족 무덤을 건축자재로 쓰기 위해서 없앤다는 발상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몇천 기의 무덤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철도에 깐 돌을 구하기 위해서 고분을 부수면 발굴을 하는 기상천외한 상황은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스웨덴 Sweden의 구스타프 왕자 Prince Gustaf는 당시 일본을 방문해 여러 유물들을 시찰하고 있었다.
일본은 금관총의 금관에 대해 알고 있던 구스타프 왕자에게 비슷한 발굴을 하고 있으니 직접 발굴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서봉총瑞鳳塚 발굴을 미리 해서 황금이 나오는 걸 확인한 뒤, 다시 살짝 덮고서 구스타프 왕자를 초대했다.
왕자가 발굴할 때 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목판을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구스타프 왕자는 준비된 목판 위에 누워서 허리띠 장식 몇 개를 흙속에서 찾아냈다.
이후 왕자가 서봉총의 금관을 직접 꺼내 유물 상자에 넣는 장면에서 발굴 공연(퍼포먼스 perfomance)은 절정에 달했다.
이 고분은 스웨덴의 한자어인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출토된 봉황鳳凰 장식의 금관을 뜻하는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지었다.
이렇게 1500년이 시간을 두고 신라의 왕족과 스웨덴의 왕족 간의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물론 한국의 황금 유물을 통해서 스웨덴관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도 완벽히 성공했다.
구스타프 왕자가 멀리 일본까지 와서 발굴에 참여했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특이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서구의 왕족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것이 바로 세계일주와 고고학이었다.
서구의 왕족들은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며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경쟁하듯 이국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몇 년의 시간을 들여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왕족의 필수 코스였다.
≪80일 간의 세계일주≫라는 소설이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고고학은 식민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수많은 보물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데에 필요했다.
사방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면, 그 안에서 나오는 중요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가치를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세계 각국의 보물이 얼마나 있는지를 파악하는 건 개인의 취미를 떠나 각 나라의 국력을 파악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슼타프 왕자가 돌아간 이후 서봉총 발굴은 내팽개치듯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이 발굴에 대한 보고서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전체 유물의 목록도 알 수 없다.
발굴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말이 다르다.
심지어 구스타프가 발굴한 유물도 그 흔적이 없다.
한자를 읽을 줄 알았던 구스타프는 한자로 '부富'와 '귀貴'라는 비단 조각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그것을 수거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유물에서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서봉총 발굴 이후에 발생했다.
이 발굴을 실제로 담당했던 사람은 일본 나라(나량奈良) 출신의 고이즈미 아키오(소천현부小泉縣夫)라는 박물관 직원이었다.
그는 서봉총 발굴 이후 평양박물관의 관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여기에서 고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1935년, 고이즈미는 평양에서 파티를 벌이면서 서봉총의 금관과 황금 장식을 당대 평양 최고의 기생이라는 차릉파車綾波에게 씌었다.
유물로 '코스프레コスプレ(costume play 분장놀이)'를 한 것이다.
아마 고이즈미의 문화재 농락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관을 씌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허리띠, 목걸이 등 세부 장식들을 모두 기생에게 입혔기 때문이다.
이 희대의 사건을 벌였음에도 고이즈미는 가벼운 견책만을 받았다.
그는 1986년에 ≪조선 고대유적의 편력≫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한국에서 했던 문화재 조사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가득했다.
이 책에는 서봉총에서 구스타프 왕자를 만나서 같이 발굴했던 얘기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정작 서봉총에서 어떤 유물이 나왔는지, 왜 보고서는 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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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5. 1. 1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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