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7장 계몽주의 3: 계몽주의적 주제의 국제화 본문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저작들 | |
볼테르 ≪철학 서간≫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디드로 ≪백과전서≫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에밀≫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애덤 스미스 ≪국부론≫ 레이날 ≪두 인도에서의 유럽인의 식민지 및 통상의 철학적·정치적 역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 |
1734년 1748년 1751~1772년 1762년 1762년 1764년 1776년 1770년 1792년 |
계몽 사상가들을 일컫는 '인류人類의 당黨 the Party of Humanity'은 국제적이었다.
프랑스어 French는 많은 계몽주의 논쟁에서 공통어가 되었고, '프랑스어로 집필된' 서적들이 종종 스위스, 독일, 러시아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앞서 본 것처럼 계몽 사상가들은 영국의 제도와 학문을 칭송했고 그것들을 평가 기준으로 이용했다.
영국은 또한 중요한 계몽 사상가로 꼽히는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1737~1794)과 스코틀랜드의 철학자들인 데이비드 흄 David Hume(1711~1776)과 애덤 스미스 Adam Smith(1723~1790)를 배출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1743~1826)과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790)을 자신의 일원으로 생각했다.
종교적 권력의 완강한 저항, 엄격한 국가의 검열, 진보적 사상을 논하고 지원하는 교육받은 엘리트층의 소규모 네트워크 network(체계)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는 중부 및 남부 유럽 전역에서 번성했다.
프로이센 Prussia의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재위 1740~1786)는 볼테르 Voltaire(1694~1778)가 프랑스에서 추방당했을 때 비록 이 계몽주의 철학자가 금방 자신의 환대에 싫증을 내긴 했지만 한 차례 자신의 궁전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또한 소규모이지만 매우 생산적인 계몽 사상가 집단을 후원하기도 했다.
북부 이탈리아는 계몽사상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계몽 사상가들은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주제, 예컨대 인도주의, 모든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 종교적 관용, 자유 등의 주제를 제기했다.
○계몽주의의 주제들: 인도주의와 관용
계몽주의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 가운데 이탈리아 밀라노 Milano(영어 Milan) 출신의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 Cesare Beccaria(1738~1794)가 있었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Dei delitti e delle pene(영어 On Crimes and Punishments)≫(1764)은 프랑스 계몽 철학자들과 동일한 주제들, 예컨대 전제 권력, 이성, 인간의 존엄성 따위에 관계된 것이었다.
이 책은 볼테르에게 장 칼라스 Jean Calas 사건에서 그가 주장한 논거의 대부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베카리아는 구체적인 법률 개혁을 제안했다.
그는 형벌이 범죄자에 대한 사회의 복수를 표현해야 한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를 공격했다.
베카리아는 형벌이 필요한 유일한 적법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다른 범죄를 막기 위해서이며 범죄를 억제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관대함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개인의 존엄성과 인간성에 대한 존중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다른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카리아의 책은 무엇보다도 고문과 사형 제도를 탁월한 논변으로 반대했다.
국가 권력과 지옥에 대한 공포를 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공개 처형의 광경은 오히려 희생자, 재판관, 구경꾼들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1776년 칼라스 사건이 있은 지 몇 년 뒤 또 다른 프랑스에서의 재판은 베카리아와 계몽 철학자들을 전율에 떨게 만들었다.
이 재판에서 신성모독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당시 열아홉 살의 프랑스 귀족은 화형에 처해지기 전에 혀가 잘리고 손목이 절단되었다.
법정은 이 신성 모독자가 볼테르를 읽었다는 이유로 그의 육신과 더불어 볼테르가 지은 ≪철학 서간 또는 영국에 관한 편지 Lettres philosophiques ou Lettres sur les anglais(영어 Philosophical Letters or Letters on the English ≫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이 재판과 같은 떠들썩한 사건은 베카리아의 저술을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범죄와 형벌≫은 곧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저서의 영향력에 힘입어 1800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고문, 낙인찍기, 태형 따위와 같은 여러 형태의 신체 절단형이 폐지되었고 중대 범죄에 대해서만 사형이 적용되었다.
인도주의와 이성은 종교적 관용을 권장했다.
계몽 사상가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종교전쟁과 이교도 및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박해를 끝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많은 계몽 사상가들이 거역했던 제도 및 교리로서의 교회와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이 받아들였던 종교적 믿음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계몽 사상가 가운데서도 특히 폴 앙리 돌바크 Paul Henri Dietrich d'Holbach(1723~1789)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무신론자였으며,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을 따르는 사람)임을 공언했던 사람들조차 매우 적었다.
많은 사람들(예를 들면 볼테르 같은 인물)은 신을 태초에 완벽한 시계를 만들어놓고 예측 가능한 규칙으로 작동하게 내버려 둔 '신선한 시계공 divine clock-maker'으로 보았던 종교적 관점을 보유한 이신론자理神論者(신의 존재와 진리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에서 구함으로써, 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지만 세상일에 관여하거나 계시나 기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신을 부정하는 이신론을 따르는 사람)였다.
계몽주의적 탐구는 종교에 대한 매우 상이한 입장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종교적 관용은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는 유대인을 이교도나 그리스도 살해자로 보았다.
그리고 계몽 사상가들은 종교적 박해를 개탄했을지라도 공통적으로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미신과 반계몽주의적인 의식에 미혹된 후진적인 종교로 보았다.
유대인을 동정적으로 대우하고자 한 소수의 계몽주의자 중 한 사람은 독일의 계몽 철학자 고트홀트 레싱 Gotthold Ephraim Lessing(1729~1781)이었다.
레싱의 비범한 희곡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영어 Nathan the Wise)≫(1779)은 제4차 십자군 기간 중의 예루살렘 Jerusalem을 배경으로 유대인 상인 나탄의 부인과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조직적인 학살 또는 폭력적이고 조직화된 공격으로 시작한다.
나탄은 그리스도교도로 태어난 딸을 입양해 세 가지 종교, 즉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로 키운다.
몇몇 장면에서 당국자들은 그에게 참된 종교 하나만 고르라고 묻는다.
나탄은 참된 종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유일신을 섬기는 세 가지 위대한 종교는 진리의 세 가지 다른 모습 즉 이형異形일 뿐이었다.
종교는 신자들을 덕스럽게 만드는 한에서만 믿을 만하거나 참된 것이었다.
레싱은 독학으로 랍비 Rabbi(유대교의 율법학자를 이르는 말)와 회계원이 된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의 할아버지인) 친구 모제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1729~1786)을 자신의 희곡 속 영웅의 본보기(모델 model)로 삼았다.
모제스 멘델스존은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계몽주의 동아리와 베를린 Berlin의 유대인 공동체 사이를 오갔다.
모제스 멘델스존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종교를 주제로 선택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반복되는 공격과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는 요구에 못 이겨 그는 마침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모리스 멘델스존의 일련의 저작들, 특히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루살렘: 종교 권력과 유대교에 관하여 Jerusalem oder über religiöse Macht und Judentum(영어 Jerusalem, or on Religious Power and Judaism)≫(1783)에서 그는 반유대주의적 정책에 대항해 유대인 공동체를 옹호하고 계몽주의의 비판에 대항해서는 유대인의 종교를 지지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의 개혁을 촉진시켰다.
그는 유대인 공동체가 광범위한 계몽주의 프로젝트, 예컨대 종교적 신앙은 자발적이어야 하고 국가는 관용을 증진시켜야 하며 인도주의는 모든 이에게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것 따위를 포용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학, 정부 그리고 행정
계몽사상은 국가적 문제들에 관해 매우 현실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계몽 철학자들은 인도주의적인 이유에서 이성과 지식을 옹호했지만 동시에 국가를 더욱 강하고 한층 효율적이며 더 번성하게 만들 것을 약속했다.
베카리아가 제안한 법률 개혁은 이 점에서 훌륭한 사례였다.
예컨대 그는 법을 더욱 공정한 것으로서뿐만 아니라 한층 더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바꾸어 말하면 계몽주의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전언傳言(메시지 message)을 전달했다.
계몽 철학자들은 자유와 권리의 문제에 역점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 세금 징수, 경제 정책 따위의 문제도 다루었다.
18세기 여러 국가 및 제국이 직면한 재정 수요의 증대는 이러한 문제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국가에게 가장 귀중한 경제적 자원은 무엇인가?
정부는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개발할 수 있는가?
중농주의자와 같은 계몽주의적 경제사상가들은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중상주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18세기까지 중상주의는 공산품과 귀금속에 대한 정부의 통상 규제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던 매우 광범위한 정책을 얼컫는 용어가 되었다.
대다수가 프랑스인이었던 중농주의자들은 진정한 부는 토지와 농산물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들이 과세 체계를 단순화하고 자유방임 정책을 따르는 것을 옹호했다는 것이었다.
자유방임自由放任이란 부와 상품이 정부의 간섭 없이 유통되도록 놔두는 프랑스어 표현 "자연의 순리대로 내버려두어라 Laissez faire la nature(영어 Let nature take its course)"에서 온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고전적인 자유방임 경제학은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1790), 특히 그의 획기적인 논저 ≪국부론國富論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에서 시작되었다.
스미스는 농업의 가치에 대해 중농주의자와 견해를 달리했지만, 중상주의에 대한 반대에는 그들과 뜻을 같이했다.
스미스에게 핵심적 문제는 노동 생산성과 경제의 상이한 부문에서 노동이 어떻게 이용되는가였다.
아메리카 제국 전체에 걸쳐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샀던 일 가운데 하나인 수입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 같은 중상주의적 구속은 노동의 생산적인 전개를 저해했고 따라서 실질적인 경제적 건전성을 창출하지 못했다.
스미스가 보기에 전반적인 번영은 경제 활동을 이끌기 위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허용함으로써 가장 잘 획득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은 독점업체들과의 경쟁이나 법적 제약 없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했다.
스미스가 초기 저작인 ≪도덕적 정서에 관한 이론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에서 언급했듯이, 이기적 개인은 "부지불식간에 의도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의 이익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국부론≫은 경제 발전의 상이한 단계, 보이지 않는 손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법, 경재의 유익한 측면 따위에 대해 기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이 책의 관점은 자연과 인간 본성 모두에 대한 뉴턴 Newton과 계몽주의의 이상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스미스는 자신이 고전적인 계몽주의적 용어로 "천부적 자유의 명쾌하고도 단순한 체계"라고 부른 것을 따르기를 원했다.
스미스는 스스로를 국가가 후원하는 경제적 특권과 독점에 대항한 정의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장의 힘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꿰뚫고 있는 이론가였다.
스미스는 18세기의 새로운 경제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아이러니하게도 ironically) 다음 세기에 그의 저서와 추종자들은 개혁가와 새로운 경제 체계에 대한 비판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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