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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은 이정 '설죽'

새샘 2026. 3. 26. 11:46

"엄마를 보내고 이정의 설죽에 안기다"

 

이정, 설죽, 견본에 수묵, 57.3x119.1cm, 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12월에는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묵은 잎을 정리하고 새순을 예비한다.

뒤숭숭한 가운데, 아침부터 고요히 눈이 내린다.

눈 구경하러 산에 가기 좋은 날씨다.

눈 덮인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발자국 소리만 적막강산을 흔든다.

눈 덮인 소나무 숲을 지나면 울창한 대나무 군락지다.

귀를 세우니, 소곤거리듯 댓잎에 눈 쌓이는 소리가 합창을 한다.

선시대 묵죽화墨竹畵(먹으로 참대나무를 그린 그림)의 대가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의 <설죽雪竹>을 보는듯하다.

마치 피라미 떼가 눈을 이고 헤엄치는 것 같은 댓잎들이 소담스러운 작품이다.

감상자를 순박한 무채색의 세계로 인도한다.

 

중국에서 '죽竹'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한자의 발음이 '대'로 불려 대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는 하늘로 곧게 뻗은 줄기가 위풍당당해서 군자君子를 상징한다.

여름에는 '죽부인'으로 변신하여 더위를 식혀주고, 서늘한 바람까지 안겨준다.

식욕을 돋워주는 죽순이 있는가 하면, 청아한 녹색은 실내장식(인테리어 interior) 식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문인들이 가까이하며 문예의 소재로 애용하였다.

 

이정은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셋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1420~1469)의 손자다.

석양정石陽正을 수여받고, 후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한다.

풍족한 경제적인 여건으로 문예에 심취할 수 있었던 그는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갖춘 문인화가였다.

왕실 특유의 탐미적 취향을 바탕으로 한 묵죽화로 조선 중기를 선도한다.

압축적이고 간명한 화면 구성으로 대나무의 굳은 절개를 시정詩情 넘치게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정은 당대 일류 학자들과 교유하며 시문을 주고받았다.

문장가 최립崔岦(1539~1612)과 허균許筠(1569~1618)은 이정이 그린 묵죽화를 보고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다"고 칭찬하였다.

문신文臣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소동파의 신기神氣와 문동文同의 사실적인 면을 모두 갖추었다"라고 했듯이, 정은 소동파와 문동의 묵죽 양식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묵죽화를 확립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 846)는 일찍이 대나무의 뿌리에서 견고함을, 성질에서 강직함을, 비어 있는 줄기에서 겸허함을, 그리고 마디에서 정절을 찾아 군자에 비유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1589)은 ≪사암집思菴集≫에 이정의 <설죽>에 대하여 "흰 비단에 쓸쓸한 비바람 소리가 울려나고, 한번 날아올라 가을 토끼를 잡듯 하니 만인이 놀라네. 생각건대 응당 설죽이 간肝과 폐肺가 되어, 그 생기와 소리까지 능히 그려낸 것일세"라는 제시를 남긴 바 있다.

 

왕실의 현손으로 예술에 전념했던 이정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닥친다.

임진왜란 때 팔을 다친 것이다.

그 바람에 공주로 내려가 자연을 벗 삼고 은거한다.

상처는 오직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고 가꾸며, 관찰하고 사생하여 대나무를 온몸으로 체득했다.

왕실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혁신적이고 독창적으로 넓혀가며, 조선 고유의 문인화를 회화 장르(갈래) genre로 정착시켰다.

 

인생도 그와 같다.

힘든 시기를 겪은 뒤에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듯이 예술도 인생의 고비를 거치면 한층 무르익는다.

이정 또한 전쟁 중에 겪은 시련이 자신의 예술관을 벼리는 계기가 되었다.

 

<설죽>은 무채색의 세계를 연출하며 시상에 들게 한다.

나지막한 언덕에 허공을 가르며 높게 뻗은 대나무는 하늘을 치고 오른다.

옆으로 뻗은 작은 대나무는 풍성한 잎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희끗희끗 눈발이 내려 앉아 얼어붙었거나 쌓인 눈의 무게에 늘어진 이파리도 있다.

흑백의 조화가 아름다운 대나무는 강경하고 옹골차 보인다.

변화무쌍한 이파리가 춤을 추듯 경쾌하다.

 

이정은 먹의 농담濃淡(짙음과 옅음)으로 대나무의 원근을 표현하였다.

<설죽>은 흐린 날의 표정을 배경으로 농묵濃墨의 댓잎 위에 쌓인 흰눈을 묘사했다.

흑백의 강한 대비는 묵죽화의 특징이다.

마음에서 우러난 대나무를 변용하여 기운생동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정은 조선 고유의 서체로, 묵죽화의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여전히 귓속말처럼 눈이 내린다.

눈은 추억 속에도 쌓인다.

'엄마'를 보낸 그해 겨울에도 눈이 내렸다.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집으로 온 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튿날 깨어서 보니 온통 눈 천지였다.

경이로웠다.

백지 같은 세상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마치 엄마의 품속 같았다.

필자는 그 품속에, 이정의 대나무처럼 안겼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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