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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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뼈, 과거의 일상을 밝히는 타임캡슐

새샘 2026. 3. 27. 16:07

여러 고고학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동물 뼈들[중국 지린(길림吉林)대학교박물관](출처-출처자료1)

 

흔히 동물 뼈를 발굴한다고 하면 자연사박물관에서 포효하는 듯한 포즈의 공룡이나 매머드 mammoth 뼈를 떠올린다.

하지만 동물 뼈는 단순한 전시물을 넘어서 고대 사람의 삶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고학자가 캐내는 것은 유물만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흔적인 뼈도 발견된다.

사람 뼈(인골人骨)는 과거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는 기억상자(타임캡슐 time capsule)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성별, 키, 질병, 영양 상태, 사인, 시신의 처리 따위와 같은 수많은 인간의 삶이 그 안에 녹아들어 가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의 주요한 발굴 대상인 무덤은 바로 이 사람 뼈를 중심으로 한다.

더욱이 최근에는 DNA 기법의 개발로 손가락뼈 하나도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으니 더욱더 세심하게 발굴한다.

 

한편, 얼핏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동물 뼈도 소중한 자료가 된다.

이렇게 유물이 아닌 뼈를 부르는 개념이 있으니, 바로 유물을 영어로 아티팩트 artefact라 부르는 것과 대비하여 동물 뼈를 에코팩트 ecofact(자연물)라 부른다.

예컨대 몇천 년 전 집자리의 부엌 근처에서 돼지 뼈나 소 뼈가 수북이 쌓인 채 발견되었다고 하자.

동물 뼈는 인간이 만든 도구가 아니라 먹고 남은 흔적이기 때문에 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동물이 애완용이었는지 가축이었는지를 파악하고 동물의 종류, 부위 따위를 연구하면 당시 사람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다.

 

자주 듣는 질문으로, 뼈를 발굴하면 동물인지 인간인지 어떻게 아는지, 동물이라면 그 종류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많이 묻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문적인 동물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일반 고고학자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사람 뼈의 경우 무덤 안에서 몸 전체나 많은 부분이 발견되면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나 사고로 여러 사람의 뼈가 섞여 있는 경우는 쉽지 않다.

이런 때는 일단 뼈를 수습한 뒤에 전문가가 각 개체별로 하나씩 분류해낸다.

 

동물 뼈의 경우도 많이 발굴해본 동물이라면 경험을 바탕으로 1차적으로 파악한다.

이후 동물 뼈 도감과 같은 문헌에서 소개된 뼈의 형태와 일일이 대조해서 하나씩 밝혀내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같은 과의 동물(예컨대 개, 너구리, 오소리)이나 닭과 꿩 같은 비슷한 동물은 완벽히 분리하기 어렵다.

 

이 글은 이렇게 힘들게 분리된 뼈에 숨겨진 이야기이다.

 

유적을 발굴하면 수많은 동물 뼈와 마주친다.

인간에게 동물은 단백질과 지방의 공급원 이상의 효용이 있다.

지금도 목축 동물에 대한 의존이 절대적인 초원에서 말, 소, 낙타는 교통수단으로 쓰인다.

또한 그들의 젖으로 치즈를 만들어 장기간 보관할 수 있으며 털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심지어 고기를 먹고 남은 뼈로 다양한 무기나 땅을 파는 삽 같은 것을 만든다.

다 먹고 나면 어깨뼈는 뽑아서 모아 두었다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불에 그슬려서 점을 치기도 한다.

목축 동물이야말로 움직이는 음식 창고인 셈이다.

더운 여름에 몽골 Mongolia 초원에서 먼 길을 갈 때에는 고기를 싸 가는 대신에 살아 있는 양이나 염소를 끌고 길을 떠났다.

고기를 잡으면 그 순간 상하지만, 살려두면 며칠이고 신선한 고기와 우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양을 잡으면 가장 상하기 쉬운 내장과 머리 부분부터 먹는다.

다음에는 갈비 같은 부분을 먹고 넓적다리 같은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부분은 훈제한다.

예전에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을 횡단하던 대상隊商(카라반 caravane)은 반드시 낙타 위에 살아 있는 닭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 방법을 죽음의 땅인 타클라마칸 사막 Taklamakan Desert을 횡단하여 비단길을 탐험한 스웨덴 Sweden의 탐험가 스벤 헤딘 Sven Anders Hedin(1865~1952)도 따라 했다.

살아 있는 닭이야말로 매일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량원인 셈이다.

 

이렇게 인간의 역사에서 동물은 생존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냥꾼으로 살아왔다.

인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200만 년 전이라고 잡아도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간은 1만 년도 안 되니, 인간의 역사에서 99.5퍼센트는 사냥으로 생존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냥의 핵심은 바로 주변의 동물을 잠재적인 식량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이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 고기와 뼈를 얻어내는 것에서 죄책감을 가진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인간 또한 다른 육식동물의 잠재적인 사냥감이기 때문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

 

중국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의 산리허(삼리하三里河) 유적에서 출토된 6,000년 전 개 모양을 한 토기(출처-출처자료1)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뼈라고 하면 사냥감이나 가축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단순한 단백질 공급원을 벗어나 인간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동물이 있으니, 바로 인간사에서 친숙한 동물인 개이다.

언제 늑대에서 개로 분화했는지는 지금도 활발한 토론 주제이기도 하다.

적어도 1만 5,000년 전부터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로 가축화가 되어왔음이 다양한 고고학 자료로 확인된다.

개는 반려동물인 동시에 식용으로도 최근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는 동물이다.

개가 언제부터 인간의 동반자가 되었는지는 정확한 통설이 없다.

다만 인간이 후기 구석기시대에 본격적으로 세계로 확산되고 튀르키예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in Türkiye 같은 신전을 만드는 시점인 1만 5,000년 전부터는 분명히 개가 인간의 반려동물이 된 증거가 나온다.

서양인이 아메리카 America 대륙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 원주민(이른바 인디언 Indians)은 이미 반려견을 데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 개들 중 상당수는 구대륙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종류였다.

 

개만이 유독 인간 사회에서 이렇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최근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고고학 자료가 소개되었다.

바로 벨기에 고예 동굴 Goyet Caves in Belgium에서 3만 6,000년 전에 이미 늑대의 탈을 벗고 개로 진화한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고예 동굴에서 발견된 개 뼈는 분명 늑대와 다르지만, 현재의 개와 DNA 구조와 달랐다.

이미 당시 사람은 늑대를 개로 순화시켰지만, 무슨 이유인지 고예 동굴에서 자라던 개들은 후에 멸종되었다는 뜻이다.

 

수많은 동물 가운데 개가 인간의 반려동물로 왜 선택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개는 인간의 사냥감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개는 늑대에서 분화했다.

늑대는 육식동물로 인간에게 큰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

반면 말이나 소같이 고기를 많이 제공하거나 양이나 염소처럼 그 털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개의 지능이 다른 동물보다 월등히 앞선다는 증거도 없다.

개는 소, 말, 낙타, 염소, 양과는 달리 대량으로 키우는 목축 동물이 아니다.

개가 인간의 반려동물로 선택된 배경에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개의 장점은 후각과 민첩성이 뛰어나 사냥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초의 개는 인간의 사냥을 도와주는 동물이었다.

인간과 사냥감을 공유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설 수 있었다.

물론, 인간과 음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빙하기 때에는 사냥한 고기를 제대로 보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앉아서 먹어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폭식과 단식을 반복하는 '원시인 다이어트'는 이러한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사냥한 고기를 개와 공유하는 행위는 사냥 자체의 효율성을 감안하면 그렇게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면 사냥의 효율이 각 지역마다 다소 다르지만 50퍼센트 정도 증가한다고 한다.

개가 '동업자'가 된 순간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사냥꾼의 생계에서 가장 큰 위험성은 앞날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냥감이 사냥꾼이 원할 때 스스로 걸어 들어올 리 없다.

언제 사냥에 성공할지 매일매일 불확실하다.

개를 사냥의 동반자(파트너 partner)로 택하고 사냥감을 공유하면서 동업자가 된 순간 인류는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으로서도 개로서도 서로를 신뢰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냥에 투자하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고, 나머지 시간에 개와 사람은 더욱 친밀도를 높여서 사냥의 효율을 높이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렇게 늑대가 사냥개로 전환되었고 개의 습성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감수성에도 맞았다.

게다가 개는 추운 지역에서 운송수단으로서도 유용했다.

지금도 북극권의 원주민은 개썰매를 유용하게 이용한다.

심지어 개는 너구리와 마찬가지로 식용으로도 잘 맞았다.

동아시아 East Asia 일대에서 이전부터 개를 식용으로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교수 팻 시프먼 Pat Shipman(1949~ )은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Homo neanderthalensis)과의 경쟁에서 이긴 이유가 효과적인 개와의 동거에 있었다고 한다.

물론 하나의 이유가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없겠지만 개가 인간의 진화에 상상 이상의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개의 무덤

 

이러한 인간과 개의 감정적 공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는 바로 개의 무덤이다.

최초의 개 무덤은 독일 베를린의 오베르카셀 Oberekassel in Berlin, Germany에서 발견되었다.
약 1만 4,000년 전의 무덤으로 남녀가 묻힌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추후 분석 결과 이 개는 사망 당시 19주 정도의 강아지였으며, 뼈에 남은 흔적으로 볼 때 죽기 몇 주 전까지 보살핌과 치료를 받았다.

그 밖에도 후기 구석기시대 이래 신석기시대에도 개 무덤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개 무덤들은 개와 인간의 교감이 이미 확고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국의 경우 신석기시대 조개무지(패총貝塚)에서 개 뼈가 다수 출토된다.

다른 동물 뼈와 같이 섞여 나오기 때문에 식용의 가능성이 더 크다.

한국에서 개가 본격적으로 무덤이나 제사에 도입된 증거가 보이는 시기는 삼국이 형성되기 시작한 약 2,000년 전부터이다.

경남 사천 늑도에서는 인간과 개가 묻힌 공동묘지가 발굴되었다.

이 공동묘지에서 인간만 묻은 무덤은 물론, 인간과 개가 함께 묻힌 무덤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공동묘지 한쪽에는 개만 따로 묻은 무덤이 8기나 있었다.

사람과 함께 묻힌 개의 경우 대부분 다 자란 수컷 개였다.

그런데 개 무덤에 따로 묻힌 것은 특별한 암수나 나이 구별이 없다.

구덩이를 파고 개를 웅크리듯 묻은 흔적이 보인다.

같이 발견된 유물은 없지만 사람이 묻히는 공동묘지에 개도 같이 묻혔다는 것 자체가 큰 뜻을 지닌다.

 

한편, 강릉 강문동의 저습지 유적에도 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강문동은 2,000년 전 이 지역 사람들이 살면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기에서 수많은 뼈가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가마니에 쌓인 개가 통째로 발견되었다.

아마 제사에서 쓰이고 늪으로 던져진 것 같다.

 

개 무덤과 제사에서 사용된 흔적은 실제 인간 사회에서 개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개 무덤과 개가 제물로 사용된 경우는 특수한 상황, 즉 신성한 의미가 더해졌음을 뜻한다.

가장 큰 가능성은 개가 희생동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다.

제사에서 인간의 행위를 대신해서 죽이고 그것을 묻는 것이다.

강문동에서 개를 던지는 풍습은 서양에 남아 있는 희생돼지의 풍습과 비교해볼 만하다.

희생돼지 풍습은 중세에 사람이 지은 죄를 돼지에게 덮어씌우고 그 돼지를 물에 빠뜨려 죽임으로써 죄를 씻는 방법이다.

 

개와 인간의 교감에도 불구하고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식용자원으로서의 개이다.

개는 반려동물일 뿐 아니라 꾸준히 식용으로 활용되어 왔다.

뼈에 살을 떼어내기 위한 해체흔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 민족지를 보면 개가 식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실제 개의 고기는 인체에 잘 흡수되기 때문에 동아시아는 물론 추운 극지방에서도 보양식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1916년에 남극점을 탐사한 노르웨이 Norway의 아문센 Ronald Amundsen과 영국 UK의 스콧 Robert Scott 탐험대의 경쟁 과정에서도 그 점은 명백히 드러났다.

아문센은 북극에서 데려온 개 50마리를 몰고 남극점을 향했고, 스콧은 만주의 말을 데려왔다.

아문센은 운반용으로 개를 쓰다가 짐이 줄어들어 쓸모없는 개를 지속적으로 도살하는 방식으로 탐험을 진행했다.

하지만 개를 식용으로 쓴 경우보다는 무덤이나 제사에 희생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식용으로서의 개가 지닌 효능은 개와 함께한 인간 역사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개똥이'라 불린 어떤 귀족

 

한국어에서 개는 가장 반어법적인 심상心象/心像(이미지 image)이다.

가장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지만, 정작 '개'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그 뜻이 부정적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에 젊은 사람은 '개'를 긍정적인 표현에 쓰기도 한다.

'개이득'이라는 광고를 보고 한참을 생각하다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아주 큰 이득이라는 뜻이었다.

 

 

(위)장자구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와 (아래)청동기에 새겨진 장자구 명문(출처-출처자료1)

 

가끔 개는 사람의 이름으로도 쓰인다.

한국에서는 귀한 자식일수록 개똥이 같은 천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

극동의 여러 소수민족도 자식을 일부러 천한 이름으로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야 나쁜 귀신이 샘을 내지 않아서 아이를 먼저 데려가지 않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람을 개의 이름으로 빗대어 부르는 풍습의 역사가 3,000년 이상되었음을 고고학이 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7년에 중국 후베이성(호북성湖北省) 우한(무한시武汉市/武漢市) 루타이산(노대산魯臺山)에서 귀족들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그중에 서주西周시대(서기전 1046~서기전 771), 즉 3,000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 제30호에서 청동으로 만든 세발 달린 솥이 발견되었다.

이 청동기 안쪽에는 "큰아들 개가 문부을에게 만들어 준 청동그릇(장자구작문부을존이 長子狗作文父乙尊彛)"이라는 명문銘文(쇠나 돌, 그릇 따위에 새겨 놓은 글)이 발견되었다.


당시 주나라는 봉건제를 만들면서 후베이성 우한 지역에 봉국封國(제후국諸侯國: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을 성립했다.

이 명문은 '장자구'라는 사람이 청동기를 만들어 '문부을'에게 바쳤다는 뜻으로, 사람 이름에 개(구狗)가 들어가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장자구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구狗'는 개를 뜻하는 별명 또는 아명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리고 그 앞의 '장자'를 성으로 볼 수도 있고, 큰아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 고대 중국에서 '장자長子' 또는 '장長'이라는 글자가 성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성씨가 나타나는 지역은 후베이성에서 아주 먼 현재의 산시성(산서성山西省) 남쪽인 지난(진난晉南) 지역 일부뿐이다.

장자를 큰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 뜻은 한자 뜻으로도 통할 뿐 아니라 명문의 흐름을 보아도 자연스럽다.

이 명문은 "문부을의 큰아들 구"가 되니 요즘 말로 풀면 '큰아들 개똥이'쯤이 된다.

이렇듯 위엄으로만 가득 찼을 법한 고대 중국의 귀족들 사이에도 우리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음이 고고학 유물로 확인되었다.

 

 

○동물 뼈에 남아 있는 흔적

 

동물 뼈는 단순히 음식을 먹은 증명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생활에서 여러 도구로 활용되었다.

흔히 뼈로 만든 도구를 '골각기骨角器'라 부른다.

그런데 칼이나 찌르개 같은 도구로 가공한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밖에 구멍이나 긁힌 자국이 있는 경우 동물 뼈에 남은 흔적을 과연 인간이 만든 것인지 많은 논쟁이 되기도 한다.

대개 뼈에 남은 흔적은 현미경 같은 도구로 확대해 볼 때 인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육식동물(하이에나나 표범 따위)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남긴 흔적과 인간이 만든 석기石器(돌로 만든 생활도구)가 만든 흠집은 구분되기 마련이다.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은 주로 동굴 속에서 살았고, 그 동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짐승을 잡아먹은 흔적이 발굴을 통해 드러난다.

수많은 동물 뼈 가운데는 인간의 기록이 새겨진 뼈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구석기시대 예술품이라고 소개되는 많은 유물이다.

이 가운데는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많아서 거칠게 표현된 것은 여전히 인공이 아니라 하이에나나 표범의 송곳니 자국이 아닌가 하는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다.

 

 

점을 칠 때 사용한 동물 뼈 지골(카자흐스탄 아스타나박물관 Astana museums)(출처-출처자료1)

 

한편 동물 뼈에 인간의 운명을 투영하기도 했는데, 갑골문처럼 뼈를 가지고 점을 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무속인 또는 샤먼 shaman을 뜻하는 한자 '무巫'를 풀어보자.

'사람(인人)'과 '사람(인人)' 사이에 '하늘과 땅(이二)' 사이를 '잇는다(ㅣ)'는 뜻이다.

인간은 중간자적 존재로 인격은 있되 하늘에 닿을 수 없는 처지이니, 하늘의 뜻을 읽어내는 중계인이 필요하고, 그런 중계인이 무인巫人이었다.

옛날 중국과 한국의 왕은 곧 점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였다.

요즘 같은 일기예보나 정보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샤먼의 예지는 곧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수단이었고, 또 인류가 각종 자연재해와 전쟁에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오게 한 원동력이었다.

 

갑골문자甲骨文字(고대 중국에서, 거북의 등딱지나 짐승의 뼈에 새긴 상형 문자)로 유명한 3,500년 전 중국의 국가 상나라(서기전 1600년 무렵~서기전 1046년 무렵)를 보자.

갑골문은 점을 치고 점괘를 기록한 것이다.

거북이의 등딱지(배갑背甲)나 사슴의 어깨뼈에 구멍을 적당히 뚫고 불에 그슬리면서 그 갈라지는 틈으로 길흉을 점쳤다.

상나라의 왕은 자기 밑에 정인貞人이라는 사람을 몇십 명 두고 같이 점을 쳤다.

그들은 조상의 신령한 힘을 얻기 위해 날마다 저녁에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는 연회를 벌이고 갑골로 점을 쳤다.

이렇게 왕과 정인들은 한 나라의 대소사에 대해 점을 치고, 그 복골卜骨(점을 치는 데 쓰던 뼈나 뼈로 만든 도구) 위에 점괘를 기록해서 문서보관소에 넣었다가 필요한 때가 되면 꺼내서 그 점을 보고 일을 결정했다.

즉, 갑골문은 점괘가 기록된 공문서公文書(공문公文: 공식으로 작성한 서류)인 셈이다.

하지만 상나라의 경우 점괘에서 나온 신탁神託 oracle(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일)이 틀리면 왕이 대신 벌을 받고 심한 경우 목숨을 잃어버리니, 술 마시며 잔치를 해도 그렇게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점을 치는 원리는 동물의 뼈를 구우면 쩍쩍 갈라지는 얇은 부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주로 선호되는 부분은 어깨뼈이다.

실제로 야외에서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통째로 굽거나 찔 때면 가끔 쩍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복골은 동물을 요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방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진 남해안의 조개무지에서 복골이 제법 발견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로 거의 사라졌는데, 불교 같은 종교가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샤먼의 풍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복골 풍습은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Eurasia 초원 지역의 유목민 사이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최근까지 카자흐인 Kazakhs은 집안에 대소사가 있으면 복골을 그슬려서 그 갈라지는 흔적으로 점을 쳤다.

각 부위별로 신의 메시지 message(전언傳言)를 읽는 법이 있어서 가정에서도 손쉽게 점을 칠 정도였다.

 

그런데 복골은 짐승 한 마리에서 네 개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손쉽게 점을 치는 방법으로는 발가락뼈인 지골趾骨 knucklebone 주사위가 있다.

흉노 고분을 발굴하면 꼭 귀족이나 왕의 곁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바로 이 점치는 주사위였다.

심지어는 유럽 Europe으로 이동한 훈족族 Huns을 따라서 유라시아 건너편 동유럽 East Europe에서도 점치는 주사위가 나온다.

 

또 다른 점 치는 방법으로 짐승 내장과 발굽을 갈라서 보는 방법이 있다.

지금도 몽골 사람들은 양을 잡고 배를 가를 때에 내장의 형태를 보고 점을 친다.

유목문화가 많이 도입된 부여에서도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 여겼다(≪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

카자흐인도 말이나 소의 발굽에는 가장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장은 아무리 발굴을 잘해도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신에 발굽은 가끔 흔적이 나온다.

북방 초원 지역 유목민의 무덤을 발굴하다 보면 사람의 옆에 말이나 소의 머리와 함께 발끝 부분의 뼈를 모아둔 경우가 있다.

학회에서 발표할 때 런 무덤을 설명하면서 "슈바인스학세 Schweinshaxe(독일의 족발 요리)와 한국의 족발은 흉노에서 기원했으니, 유라시아는 족발로 하나가 됩니다"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아마 발굽으로 점을 치고 제사를 지낸 흔적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시베리아 Siberia 일대의 샤먼 의식에서 동물의 뼈와 살은 제사를 지내는데 필수 요소이다.

비단 중국뿐 아니라 시베리아, 한국 일대는 옛부터 하늘의 뜻을 전하는 샤먼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최근 소련 시절의 탄압을 이겨낸 부랴트 Buryat(동시베리아 남부 바이칼 호수 Lake Baikal 동남쪽에 있는, 러시아 연방에 속하는 자치 공화국)는 해마다 샤먼 축제를 하면서 예전 샤먼의식을 부활시키고 있다.

샤먼은 의식에 앞서서 희생에 쓸 양을 잡는다.

그리고 그 양의 배를 갈라서 점을 치고 해체해서 제사 음식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샤먼은 수호령守護靈(사람 등에 붙어 그 대상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영혼)에 빙의되고 다양한 의식을 한다.

빙의된 샤먼이 북을 치면서 수호령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각자의 걱정과 고민을 가진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샤먼은 그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하늘에 의식을 거행한다.

모든 의식이 끝나면 사람들은 희생 제물을 같이 음복飮福(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음)하면서 서로의 복을 기원하는데, 샤먼의식의 처음과 끝을 희생양으로 한 것이다.

 

야생의 늑대에서 개로 바뀌는 시간은 대체로 현생인류(슬기사람, 호모사피엔스 Homo sapiens)의 등장과 때를 같이한다.

이후 인간은 동물을 먹고, 의지하며, 또 동물이 되고자 했다.

발굴 중에 흔히 보이는 뼈 하나하나에 결국은 수많은 고대 사람의 사연과 의식이 담겨 있을 것이다.

동물은 단순한 식량을 넘어서 주요한 종교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나아가 사방으로 확산된 그 종교의 증거로도 활용되었다.

흔한 듯한 동물 뼈 하나하나가 고고학자에게 중요한 이유이다.

 

 

○목축 동물이 바꾼 세계

 

지역마다 시기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서기전 3500~3000년 무렵이 되면 온대 지역 일대에서는 여러 문명이 발달한다.

흔히 '4대 문명'이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정착 문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착 문명의 발생 지역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에도 신석기혁명에 비견할 만한, 가히 '초원의 혁명'이라고 할 사회변화가 이루어진다.

바로 목축牧畜 pastoralism의 등장이다.

현재까지의 증거로 볼 때 서기전 4000~3500년 무렵 유라사이 초원草原 grassland의 서쪽에는 이전의 채집 경제와 다르게 동물을 방목하고 키워서 식량자원으로 삼는 최초의 생산경제, 즉 목축 경제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유라시아의 초원 지역에서 목축을 영위하는 집단과 온대의 농경을 영위하던 집단은 서로 다른 생산경제를 영유하면서 상호 교류했다.

목축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주변 지역으로의 빠른 확산이다.

농경은 물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기후 조건이 적합한 지역을 집약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특징인 데 반해, 목축은 목초지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기때문에 사용되는 토지의 범위는 농경의 약 100배에 이른다.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의 유목민이 처음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목축은 초기에는 순수한 유목만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경제 생활을 병행하는 이목移牧 transhumance(가축을 여름에는 산에 놓아기르고, 겨울에는 평지에서 건초로 기르는 방식) 단계에서 출발했으며, 본격적인 유목遊牧 nomad은 스키타이시대 Scythian era(서기전 8세기~서기전 3세기)에 들어서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축 동물에 많은 경제를 의지하지만, 곡물, 의목, 청동기와 같이 목축 생활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은 주변 지역과의 다양한 교류로 획득한다.

그래서 목축에 기반을 둔 초원문화의 성립에는 주변 지역과의 물적·인적 교류가 필수적이다.

초원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목축의 특성으로 유라시아 초원 지역은 새로운 청동 제련 기술이나 기마술 같은 당시의 첨단 기술이 사방으로 전파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축과 인간이 함께한 생활상이 잘 표현된 2,000년 전 중국의 토기(출처-출처자료1)

 

온대 지역의 정착민은 강가의 평야 지대에서 밀, 기장, 수수 따위로 농사를 짓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형성해 문명을 이루며 국가를 세웠다.

이에 반해서 초원은 겨울이 길고 농사도 쉽지 않은 척박한 지역이었다.

초원 지역에는 짧은 여름 동안 잡초가 자라지만, 인간이 먹을 수는 없었다.

대신에 초원 지역에서 풀을 먹고 자라는 양, 염소, 말, 소와 같은 가축을 키우는 목축 경제를 발달시키면서 정착 문명과는 또 다른 세계를 열었다.

 

초원 지역은 고위도에 위치한 탓에 겨울이 길고 일교차가 극심한 척박한 기후여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대신 여름은 겨울보다 짧아도 낮 시간이 길고 태양이 작열하는 덕분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이 풀은 사람이 먹을 수 없고, 곡물을 키우기에는 기후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에 사냥이나 채집을 하는 소수의 사람만이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동물의 도입은 초원의 역사를 바꾸었다.

태양이 공급하는 자연의 에너지 energy를 삶의 원동력으로 바꾸는 패러다임 paradigm(인식 체계)의 전환이 바로 서기전 4000~3500년 무렵에 이루어지며 목축경제가 시작된 것이다.

사람이 직접 풀을 먹는 대신에 그 풀을 먹는 동물을 가축으로 키우고, 그 가죽과 고기로 생계를 꾸리는 목축이 등장하자 비로소 초원은 인간에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초원에 자라는 풀은 태양과 자연이 만드는 것이니 굳이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꿀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기후 속에서 가축을 먹일 풀을 안정적으로 얻으려면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다.

목축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한 계속 옮겨 다니기 때문에 한곳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농경민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세계관과 생존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갔다.

평생 초원을 이동하는 유목민에게 교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초원에서 주로 얻는 것은 인간이 목축하는 동물의 고기, 젖, 가죽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단백질인 고기만으로는 살 수 없고 탄수화물을 공급하는 곡물이 필요했다.

이렇듯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농경민과 유목민으 반드시 교류해야 했다.

또한 유목민은 혹독한 환경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과 물자를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동과 교류가 삶의 근간이었던 유목민은 유라시아 각지의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는 교량 역할을 자연스레 수행했다.

 

목축 동물을 이용한 초원의 삶은 각 지역에 따라 서로 다양하다.

곳에 따라 목축과 수렵을 병행하기도 하고 목축 동물도 다양화되었다.

분명한 점은 매우 유동적인 자연환경에 삶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발 맞춰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유목민은 정주 생활을 거의 하지 않으며, 빠르게 정보를 주고받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농경과 마을로 대표되는 온대의 정착 생활과 반대가 되는 생계인 유목이 탄생했다.

이는 동물이 인류의 역사에 들어오면서 발생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길들인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목축 동물 가운데서 가장 극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바꾼 것은 말이다.

처음에 말은 여러 목축 동물 중 하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 Central Asia 초원 지역의 사람은 다양한 동물을 목축하는 중에 말의 특성에 주목했을 것이다.

비록 지구력은 약하고 거칠어서 다루기는 쉽지 않지만 어떤 동물보다 빠르게 달리는 말은 재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생명인 당시 유목민에게 유용했을 것이다.

특히 말때를 목축하기 위해서 목동은 말떼 중 한 마리를 탈 것으로 이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해서 자칫하면 승마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야생마를 길들인다는 것은 때로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만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더 좋은 목초지로 이동하고자 하는 유목민에게 말은 치명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

말을 길들이는 자는 곧 초원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말이 인간의 동반자가 되는 순간은 바로 인간이 초원을 지배하는 첫 번째 과정이기도 했다.

말이 인간의 역사에서 운송수단으로 역할을 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의 마구가 발명된 것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첫 번째는 서기전 3000년 무렵에 처음 등장한 재갈이다.

사람의 손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재갈을 말에 채움으로써 약간의 손짓에 말은 치통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인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탈 것으로 바뀌었다.

재갈은 이후 몇천 년 동안 개량과 발전을 거듭해서 나중에는 한 사람의 마부가 여러 말을 동시에 부릴 수 있는 고삐와 전차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안장이다.

모든 포유동물이 그렇듯이 말의 등뼈가 사람이 타기 좋게 평평할 리가 없다.

울퉁불퉁한 척추뼈가 고스란이 드러나 있는 말의 등에 탄다는 것은 사실 목숨을 내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위험한 말타기 놀이인 로데오 rodeo에서도 거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경기가 안장 없이 타는 '베어백 라이딩(맨등 타기) bareback riding'일 정도이다.

말을 탈 때 안전장치가 없을 경우(지금도 유목사회에는 안장 없이 말 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자칫하면 남녀 할 것 없이 생식능력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는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말을 타고 달려가는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말 위에서 탈 수 있는 도구, 즉 안장이 필요했다.

서기전 7세기 이후 스키타이 Scythai의 군사들은 부드러운 융단(카펫 carpet)을 두껍게 얹은 안장을 탔다.

그리고 흉노시대에 들어서면서 딱딱한 나무로 만든 안장(경안硬鞍)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은 좀 더 안정적으로 말을 타고 하루 종일 달릴 수 있게 되었고, 말 위에서 먹고 마시며 하루 종일 달려서 먼 거리를 공격한다는 유목기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사람이 발을 걸 수 있는 금속제 등자鐙子이다.

이것은 서기 3~4세기 무렵 고구려와 선비족에서 발명되었으며, 이로써 본격적인 무장을 한 기사가 등장하게 된다.

 

 

○말 뼈가 알려주는 이주와 전파

 

러시아 알타이 무덤에서 출토된 사람과 함께 매장된 말 뼈(알타이공화국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ltai Republic)(출처-출처자료1)


인류 역사의 주요한 전환점은 말의 순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이를 둘러싸고 최근 다양한 국제적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증거로 보면 대체로 서기전 3500년 무렵 카자흐스탄 Kazakhstan 북부 지역에서 최초의 타는 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Russia의 국경 지역에 분포한 서기전 3500년 무렵의 동석기시대銅石器時代 보타이 문화 Botai Culture의 유적에서는 말을 대량으로 목축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같이 발견된 토기土器에서는 말 젖의 찌꺼기도 나왔다.

또한 말 뼈 구덩이에서 발견된 말의 배설물을 조사한 결과 장기간 가두어 길렀다는 증거까지 나와서 말을 사육한 최초 증거로 공인받았다.

 

목축민은 지속적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이다 보니 주변의 정착민과 교류하며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새로운 기술이 순식간에 몇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역으로 전파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키우던 가축은 양, 염소, 말 따위였으며, 조금 더 북쪽에 살던 사람은 기후에 걸맞게 순록을 키웠다.

목축이 도입되면서 말은 인간에게 친숙한 동물이 되었고, 그때부터 말은 역사를 움직이는 인류의 동반자가 되었다.

단순한 말고기에서 운송수단으로서 말이 등장한 것이다.

목축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문화는 유라시아의 서쪽으로 확산되었고 지금의 인도-유럽인 Indo-Europeans의 기원이 되었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흔드는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다.

 

 

○유목, 그리고 전염병

 

동물과 친한 것은 유목민뿐만 아니라 농경민도 마찬가지였다.

농사가 성행하면서 인간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다.

바로 기생충과 전염병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필연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기껏해야 농한기 정도에는 가능했다.

사냥만으로는 단백질을 채우기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신에 사람은 가축을 선택했다.

가축은 단순히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농민의 동반자였다.

가축화된 동물은 농사의 부산물을 먹었고 인간에게 훌륭한 단백질원이 되었다.

고기뿐이 아니었다.

가축의 젖은 도축을 하지 않고도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단백질을 공급해주었다.

게다가 가축의 가죽과 모피는 훌륭한 월동 장비가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지속적인 동거는 필연적으로 불결한 환경을 유발했고 또 동물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인간에게 옮겨가는 인수전염병人獸傳染病(동물사람공통감염증) zoonosis이 발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예가 페스트 pest이다.

페스트의 기원은 대체로 유라시아 초원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몽골 초원에서는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페스트가 보고된다.

하지만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라서 감염자가 소속된 소규모 집단이 희생당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사에서 시작되어 과밀화된 도시로 이어진 유럽에서는 인수전염병이 발병한다는 것은 때로 몰살을 뜻한다.

중세에 페스트는 마치 장작 위에 던져진 불쏘시개처럼 전 유럽을 불태웠다.

 

최근까지도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한번에 몰살당하고 마을이 사라진 예가 많으니, 고대 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실제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전염병은 무덤에 남은 간접적인 증거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랴오닝성(요령성遙寧/辽宁省) 퉁화시(통화시通化市) 만발발자萬發撥子에 있는 유적은 고조선 시절부터 고구려 때까지 이 지역에 살던 사람의 공동묘지이다.

필자는 2021년에 이 유적을 분석해서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남은 무덤의 흔적이 있다는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필자가 주목한 유적은 제21호로서, 가로 16.7미터, 세로 2.5미터의 넓이로 길쭉하게 판 구덩이에 일렬로 35구의 사람뼈가 묻혀 있었다.

단체로 묻혔으니 무슨 전쟁의 흔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무덤은 전쟁과 같은 이유로 살해된 흔적이 없이 정성스럽게 일렬로 묻혔다.

죽는 때를 미리 아는 경우는 없으니 사람이 죽는 차례대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한곳에 가지런히 묻었으니 이들이 짧은 시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21호 무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따로 묻었다.

사람이 갑자기 많이 죽었고 그들이 전쟁과 같은 원인으로 살해된 것이 아니라면 전염병 같은 요인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덤의 흔적만으로는 전염병으로 인한 결과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만발발자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동물 뼈를 검토해보았다.

만발발자에서는 모두 4만 1,179점의 동물 뼈가 출토되었고 그중 6,088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돼지를 중심으로 한 가축이나 멧돼지, 사슴 같은 사냥감이 많았다.

그 밖에도 호랑이, 너구리속, 붉은 여우, 승냥이속, 곰속, 담비, 족제비, 오소리, 수달, 시라소니 따위의 매우 다양한 모피 동물의 뼈가 발견되었다.

특히 오소리 뼈가 많이 나왔는데, 오소리나 족제비는 개과라서 가죽 이외에 고기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육에 유리했다.

오소리와 족제비 뼈의 출토 양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아 당시 모피를 채취하기 위해 해당 동물을 길렀을 가능성도 크다.

 

모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도구도 필수이다.

실제로 만발발자에서는 모피를 가공하는 다양한 돌칼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들 돌칼은 알래스카 Alaska 이누이트인 Inuit의 반달 모양의 칼인 울루 ulu와 비슷하다.

이렇듯 만발발자의 사람들은 농사가 잘 안 되는 지역이라 모피 동물을 잡고, 그들 중 일부는 함께 키웠다.

이런 경우 페스트와 같이 인수전염병이 유행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전염병을 직접 밝힐 수 없지만 유적에서 발견된 사람뼈의 특징, 동물 뼈, 도구, 그리고 지리환경 따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밝혀나간다.

심지어 인간을 감염시키지 않아도 가축의 전염병은 충분히 인간에게 위협적이다.

구제역과 같은 가축의 전염병과 몰살은 밭을 갈 수 있는 노동력의 감소로 이어져서 흉작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으로 소의 도살을 금했고, 우역牛疫(소, 양, 산양에 생기는, 급성 접촉 감염성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질환)이라도 발생할라치면 나라 전체의 명운이 달린 것처럼 제사를 지내고 신경을 썼다.

이렇듯 화려한 유물이 아니라 동물 뼈가 발견되어도 고고학자들은 그 하나하나를 최선을 다해서 발굴한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여러 동물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동물 뼈에 숨어 있는 우리 인간의 알려지지 않은 쪽(페이지 page)을 읽어내는 것은 고고학자의 또 다른 의무이자 즐거움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3. 2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