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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3: 국민국가의 건설 3-이탈리아의 통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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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3: 국민국가의 건설 3-이탈리아의 통일

새샘 2026. 4. 13. 00:02

1815년부터 1870년까지 3단계에 걸친 이탈리아의 영토 변화(출처-출처자료1)

 

이탈리아의 통일(1848~1870년)
1848년의 혁명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
2개의 시칠리아 왕국 정복
오스트리아가 베네치아를 양도함
로마 점령
교황 보증법 제정/통과
1848년
1859
1860
1866년
1870
1870

 

 

1848년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 통일의 노력이 실패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이탈리아 지위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상상도가 남게 되었다.

첫 번째는 앞서 본 것처럼 인민이 세운 공화국 이탈리아를 믿는 주세페 마치니 Giuseppe Mazzini(1805~1872)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마치니의 대의는 다채로운 인물인 주세페 가리발디 Giuseppe Garibaldi(1807~1882)의 후원을 받았다.

가리발디는 정치 이론가는 아니었고 두 번이나 망명을 했던 유격대(게릴라 guerrilla) 전사였다.

첫 번째 망명지는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아메리카에서 과거에 라틴 민족 Latins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 북아메리카 남부에서 남아메리카에 걸치는 멕시코·아르헨티나·브라질을 말함)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싸웠고, 두 번째는 미국 USA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가리발디는 마치니처럼 민중운동을 통해 국가적 통일을 달성하는데 전념했다.

 

좀 더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이와는 분명히 다른 통일을 향한 길, 즉 입헌군주정을 지지했다.

그들은 경제적·정치적 개혁을 추구했지만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분출시킬지도 모를 힘을 꾀하고자 했다.

온건파들은 민중운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자신들의 희망을 카를로 알베르토 Carlo Alberto(재위 1831~1849)이 1848년에 반오스트리아 동맹을 시작했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 Kingdom of Piemonte-Sardegna에 걸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패배해 망명 중에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Vittorio Emanuele II(재위 1849~1861)는 보수주의적 국가 건설의 전망을 구현해줄 인물, 즉 약삭빠른 사르데냐 귀족인 카밀로 카보우르(1810~1861)를 자신의 정부로 데려왔다.

카보우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탈리아에서 민주적 운동은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대신에 그는 국가가 인도하는 야심찬 실용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처음에는 통상 및 농업 장관으로서 그 다음에는 수상으로서 그는 경제 팽창을 추진하고 근대적 운송 기간시설의 건설을 장려하며 통화를 개혁하고 국제관계에서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따라서 가리발디와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통일을 향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을 대표했다.

가리발디는 아래로부터의 통일을 지지했고 카보우르는 위에서 인도하는 통일을 지지했다.

 

카보우르의 계획은 외교에 의존했다.

피에몬테-샤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오스트리아인 Austrians에 맞설 군사적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카보우르는 노련하게 오스트리아 Austria의 전통적 경쟁국 중 하나인 나폴레옹 3세 Napoléon III(재위 1852~1870)하의 프랑스 France와 동맹을 추구했다.

1858년 카보우르는 만약 피에몬테-샤르데냐 왕국이 사보이아 Savoia와 니스 Nice를 프랑스에 양도한다면 오스트리아인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데 협조하기로 동의한 나폴레옹 3세와 비밀 회동을 했다.

185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지체 없이 벌어졌고 잠시 동안 프랑스-이탈리아 동맹에게 모든 것이 잘 돌아갔다.

하지만 롬바르디아 Lombardia(영어 Lombardy) 정복 이후 나폴레옹 3세는 갑자기 철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전투에서 패하거나 교황에 대한 카보우르의 적개심 때문에 소외되었던 프랑스 가톨릭교도의 반감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인에게서 버림받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인을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탈리아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피아몬테-사르데냐 왕국이 롬바르디아를 병합했던 것이다.

토스카나 Toscana, 파르마 Parma, 모데나 Modena 공국公國 Grand Duchy들은 국민투표로 이 새로운 국가에 가입하는데 동의했다.

1860년 이러한 과정이 끝날 무렵에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은 본래 크기의 두 배 이상으로 커졌으며, 이탈리아에서 단연 최강국이 되었다.

 

카보우르가 북부 및 중부 국가들은 통합하자 남부 국가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곳도 마찬가지로 손쉽게 손에 넣게 만들 것처럼 보였다.

시칠리아 연합왕국 Kingdom of the Two Sicilies의 인기 없는 부르봉 가문 House of Bourbon의 왕 프란체스코 2세 Francesco II(재위 1859~1861)는 일찍이 1820년대와 1840년대의 반란이 품었던 희망을 다시 밝혀주었던 빠르게 확산되는 농민 반란에 직면했다.

그 반란은 1860년 5월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에 상륙한 가리발디에게 무척 필요로 했던 후원을 받았다.

스스로 '천인 원정대 Expedition of the Thousand'라고 불렀던 가리발디의 자원병들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남부뿐만 아니라 북부에서도 왔고, 노동자와 수공업자뿐만 아니라 중간계급 출신들도 있었다.

가리발디의 군대는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왕의 이름으로 시칠리아를 장악했고(가리발디는 시칠리아가 자치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본토로 진격했다.

1860년 11월에 이르러 가리발디의 군대는 지방의 반군들과 함께 나폴리 Napoli(영어 Naples)를 장악하고 프란체스코 2세의 왕국을 무너뜨렸다.

성공으로 고무된 가리발디는 프랑스 군대가 교황을 지키고 있는 로마 Roma(영어 Rome)로 눈을 돌렸다.

 

가리발디의 인기가 치솟아 오르면서 그는 카보우르와 충돌하게 되었다.
카보우르 수상은 남부에서 일어난 과정들을 심사숙고하면서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예측하기 힘들구려."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군대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불러와 알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까봐 염려했다.

그는 가리발디의 '더 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명성을 두려워했다.

카보우르는 무엇보다도 국내의 혼란이나 성가신 일, 다시 말하면 여러 이탈리아 국가들과의 예측할 수 없는 협상 없이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길을 택했다.

카보우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가리발디가 자신의 깃발에 충실한 한에서는 그와 함께 행군해야만 한다. 이것은 혁명이·········그 없이도 달성되는 것이 분명히 바람직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않는다."

카보우르는 주도권을 되찾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군대와 함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군대를 로마로 급파했다.

성공으로 의기양양해진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 왕은 가리발디에게 군권軍權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명했고 가리발디는 이에 복종했다.

이로써 1860년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단일한 국왕 휘하에 통일되었고,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국왕의 칭호(재위 1861~1878)를 갖게되었다.

통일 국가 이탈리아를 바라본 카보우르의 선견지명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영토적 국가 건설의 최종 단계는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베네치아는 1866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있었다.

하지만 1866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Preußen(영어 Prussia)에게 패해 이탈리아에 있는 마지막 보루인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게 양도해야 했다.

로마는 크게는 나폴레옹 3세가 교황에게 제공해준 군사적 보호를 기화로 정복에 대항했다.

그러나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발발로 나폴레옹 3세는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1870년 9월 이탈리아 병사들이 로마로 점령했고, 1871년 7월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교황의 권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탈리아 의회는 1871년 교황의 지위를 규정하고 제한하기 위해 보증법 Legge delle guarentigie(영어 Law of Guarantees)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무례한 세속 정부와는 어떤 관계도 맺기를 거부했던 당시 교황 비오 9세 Papa Pio IX(재위 1846~1878)에게 즉각적인 도전을 받았다.

그의 후임 교황들은 이탈리아 정부와 비오 11세 Papa Pio XI(재위 1922~1939) 사이의 일련의 협정으로 이 논쟁이 일단락된 때인 1929년까지 계속 스스로를 바티칸 Vatican에 은둔시켰다.

 

1871년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였지만 국가 건설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인구 중 소수만이 이탈리아어 Italian를 구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지방 및 지역의 방언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너무도 다양해서 로마에서 시칠리아로 파견된 교사는 외국인으로 오인될 정도였다.

어느 정치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지만,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점 산업화되어가는 북부와 가난하고 농촌적인 남부 사이의 간격을 벌어진 채 있었다.

카보우르와 뒤를 이어 수상이 된 사람들은 이런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농촌 지역에서 지주와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 증대되는 긴장, 북부 지향의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한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르는 분노 따위와 싸워야만 했다.

예전의 시칠리아 연합왕국 영토에서 일어난 산적 행위로 일어난 심각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중앙 행정부가 군대를 급파해야만 했다.

이 진압으로 인해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런 다음에도 지역적 차이와 사회적 긴장이 여전히 계속됨으로서 이탈리아의 국가 건설은 진행형으로 유지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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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4. 1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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