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발굴의 역설 본문
고고학자가 흔히 듣는 말은 왜 보물이 있는 고분을 캐러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발굴은 엄격한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당장 파괴될 위험이 없는 경우는 거의 발굴을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유적은 따로 발굴하지 않을 때에 가장 보존이 잘되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발굴은 땅을 파지 않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병원을 생각해보자.
사람이 살면서 병원 신세를 안 질 수 없고, 필요하면 수술도 불사한다.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병원을 가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의 배에 이유 없이 수술용 칼(메스 mes)을 들이대는 꼴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 가는 것과 고고학 발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땅을 한 삽 뜨는 순간 유적은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파괴된다는 뜻이다.
박물관에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는 것은 원래 그 유물이 있었던 유적이 이미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발굴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신라 대릉원大陵園의 경우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을 조사했고, 그곳에서 나온 유물은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가 되었다.
그 옆에는 더 많은 고분이 있고, 그 고분들을 발굴한다면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보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는 그곳을 발굴할 계획이 전혀 없다.
발굴은 곧 파괴를 뜻하기 때문이다.
당장 파괴될 위험이 없다면 굳이 발굴을 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고고학자의 첫 번째 미덕이다.
세계 여러 나라는 왕의 고분을 함부로 발굴하지 못하게 한다.
일본도 일왕의 무덤을 신성시해서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실습장'이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한국의 이곳저곳을 발굴했다.
금관총, 금령총을 비롯한 수많은 신라의 고분이 일본 사람에 의해 이곳저곳이 마구 조사되고 도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국시대에서도 특히 신라의 찬란한 황금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신라가 황금을 좋아한 것도 있지만, 사실 일제강점기 때에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도굴한 탓이다.
그 발굴은 부실하기 그지없어서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발굴되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금관총의 유물 일부를 빼돌려서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보는 할리우드 영화 Hollywood movies에서 나타나는 발굴이란 신나는 보물찾기이다.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이니 상상력도 많이 가미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보물이 있는 고분을 경쟁적으로 파헤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20세기 전반까지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한번 그렇게 발굴하고 나면 다시 회복할 길이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고고학자는 발굴을 하지 않는 것이다"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더욱 힘을 받아서 지금은 최소한의 발굴로 유적을 보존하는 기술이 계속 발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유적을 발굴하지 않으면 땅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지는 않는지, 그리고 발굴하지 않으면 고고학자는 어떻게 유물을 연구하는지 따위이다.
답을 적자면 많은 유적은 이미 몇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이다.
지난 몇천 년 동안 사라질 것은 이미 다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큰 변동 없이 보존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몇천 년이 더 지난다면 유적에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파헤치는 것보다는 훨씬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존이 제일 좋지만 고고학자에게 발굴은 필요한 작업이다.
고고학자는 발굴 없이는 경험을 쌓을 수 없고, 모든 과학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발달하기 때문에 다양한 곳에서 발굴을 지속해야만 과거 유물을 효과적으로 발굴 보존하는 방법을 발달시킬 수 있다.
그래서 고고학자는 당장 파괴될 위험에 처한 유적(예컨대 강물에 쓸려 나가는 언덕이나 비탈에 있는 유적)이나 건설 따위로 파괴될 유적을 우선 발굴한다.
최근에는 발굴을 아예 하지 않고 유적을 조사하는 기법도 다수 개발되고 있다.
이집트 Egypt의 피라미드 pyramid처럼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 경우는 작은 소형 로봇 robot을 무덤 안으로 넣어서 어떤 유물이 있는지 판단하기도 한다.
이는 유적을 파괴하지 않고 내부의 공기와 습도, 세균 따위를 종합적으로 미리 판단할 수 있어서 실제 발굴할 때에도 여러 상황을 예측하여 대비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또한 거대한 마을이나 고분이 몇 킬로미터 범위 안에 있는 경우는 드론 drone이나 구글맵 Google map으로 살펴서 전체 모양을 확인하기도 한다(유감스럽게도 이는 유라시아 Eurasia 초원 같이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어렵다).
그리고 지구물리탐사 방식으로 탐침을 이용해 땅속에 전류를 흘려서 발굴 없이 고대 마을이나 고분의 구조를 파악하기도 한다.
수술하지 않고 병을 고치거나 수술 자국을 최소화하는 것을 좋은 의료 기술로 간주하듯 고고학자도 최소한의 파괴와 경비로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구제발굴이라는 긴급 구조

고고학을 꿈꾸는 많은 사람이 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 같이 중절모中折帽(페도라 fedora)를 쓰고 세계 곳곳의 보물을 탐험하는 것을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과에서 발굴장을 가면 주변이 황량한 건설 현장이 대부분이다.
21세기 들어서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발굴은 건설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발굴은 그 재원과 목적에 따라서 '학술발굴'과 '구제발굴救濟發掘 rescue archaeology'로 나뉜다.
학술발굴은 그야말로 학문적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적을 조사하는 것이다.
한편, 구제발굴은 경제개발 따위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유적에 고고학자가 투입되어서 그 유적을 발굴하고 유물은 박물관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발굴의 대부분은 바로 구제발굴이다.
즉,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문화재 발굴은 모두 신도시 개발이나 아파트 건축과 같은 공사를 하기 전에 사전 작업으로 하는 발굴이다.
이런 작업은 일정한 대가를 받고 하는 용역 사업이다.
각 유적은 하나하나 중요하고 값진 것이지만, 정작 그 발굴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건설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발주하는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발굴을 끝내고 싶고, 반대로 발굴을 수행하는 고고학자는 이제 세상에서 곧 사라질 유적과 유물이 있으므로 최대한 자세하게 발굴하고 싶을 것이다.
건설업체와 고고학자 사이의 갈등은 사실 이러한 체계(시스템 system)에서 발생하는 숙명 같은 것이다.
개발과 발굴의 갈등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소련蘇聯 Union of Soviet Socialsit Republics(USSR)이 붕괴하여 마피아 mafia가 횡행하던 시절에는 재밌는 얘기도 들었다.
어떤 마피아가 바닷가 절벽에 별장을 짓다가 조개무지를 건드려서 유적이 마구 출토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주 무식한 사람은 아니어서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도록 허락하고 지원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발굴이 예정된 공기가 지나도 계속되어서 참다못한 마피아가 현장을 가 보니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금 같은 것은커녕 조개껍데기에 토기 쪼가리만 널브러져 있고, 구덩이 안에서 고고학자들이 호미나 솔로 바닥을 털고 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 구덩이에서 흙투성이 유물을 보여주며 애걸하는 고고학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피아는 자동소총을 든 경호원(보디가드 bodyguard)을 발굴 현장에 파견해서 서 있게 했단다.
"아, 총 따위는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 세상이 험하니깐 고고학자를 보호하라는 두목(보스 boss)의 명령입니다."
결국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도망치듯이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90년대 대혼란기였던 러시아 Russia에서 일어난 웃지 못할 상황으로 지금은 경제가 안정되면서 문화재 관리도 다시 체계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자동소총을 든 마피아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개발을 앞둔 주민과 건설업자의 민원과 의견 충돌이 있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자기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하지만 건설과 관련된 구제발굴 이야기만 나오면 고고학자가 개발을 방해한다는 식으로 험악해지기 일쑤이다.
관광이 주요 수입원인 유럽 Europe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 Germany 드레스덴 엘베 계곡 Dresden Elbe Valley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재산권 행사가 어려운 현지 주민이 세계유산의 지정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기후환경 변화는 시간과의 전쟁이라면 도시 건설에 따른 발굴은 경제와의 전쟁이다.
고고학이 파괴를 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제발굴 때문이다.
보통 현대 구조물을 만드는 경우 땅을 깊게 파거나 메우는 정지整地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땅속에 있는 유적의 파괴는 필연적이다.
정말 중요한 유적이라면 아예 공사가 중단되거나 유적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발굴이 끝나면 건물이 들어서고 영영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인적이 드물고 유적이 별로 없다면 구제발굴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러시아 같은 경우는 송유관이나 가스관(가스 파이프 gas pipe) 사업을 할 때 미리 부지에 유적이 있는지 조사한다.
그리고 유적이 많은 경우 아예 가스관을 우회시킨다.
어차피 인적이 드문 삼림이니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
남한의 경우 세계적인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데다가 전 국토의 3분의 2가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산악 지역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예전부터 반복적으로 살아온 지역이다.
'대한민국은 전체가 박물관'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특히 서울 시내는 조선시대부터 수도였으니 어디를 파도 빽빽하게 유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활동의 중심이라서 유적이 있다고 개발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발굴해야 한다.
그렇게 발굴한 것을 현대사회와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최근에 지어진 빌딩 building을 보면 1층이나 지하에 조선시대 유적 위를 통유리로 덮고 사람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유적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김포 운양 신도시같이 최근에 지어진 뉴타운 Newtown의 한쪽에도 유적 공원을 설치해서 주민이 휴식하고 역사도 즐기게 한다.
어쨌거나 구제발굴이 언제나 이상적인 해법은 아니다.
발굴 기술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발굴했다고 해도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난 뒤에 우리의 후손이 본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솔로몬 Solomon의 선택, 보존이냐 파괴냐

경제와의 전쟁은 또한 시간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천문학적 자본이 투자되는 신도시 건설과 같은 경우 공사 일정에 밀려서 발굴이 재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유적이 나와서 조금 더 자세하게 파 보려고 하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
당장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아파트를 건설하는데 옛 토기 쪼가리 몇 점 때문에 몇 년씩 손해를 볼 수 없다며 민원을 제기할 수도 있다.
우리의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다.
반면에 개발과 건설업이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고고학 발굴은 미움을 받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경제가 우선이라고 하면 더 이상 유적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고고학과 경제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 성장한다는 것이다.
고고학 유적의 보존을 우선으로 하고 그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경제활동이 위축된다면 궁극적으로 문화재를 보호하고 관리할 경제력이 없어지고, 이는 결국 고고학 유적이 방치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를 우선하는 사람은 엔간한 도시에 유적 없는 곳이 어디 있냐면서, 유적 조사를 의무화한 한국의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제대로 된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다른 선진국의 예를 보자.
예컨대 프랑스 파리 Paris in France나 영국 런던 London in UK에서 누군가가 집을 짓는다고 쉽게 땅을 파헤치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접점을 찾는 것이 솔로몬의 선택 Solomon's Choice이다.
○우리 안의 반달리즘

건설 과정에서 유물·유적이 파괴되는 경우 이외에도 심각한 위험은 의외로 주변에 있다.
바로 '반달리즘 Vandalism'이라고 불리는 문화재 파괴 또는 훼손 행위이다.
서기 4~5세기 무렵 훈족 Huns이 유럽을 침략하며 촉발된 '민족의 대이동 the Great Migration(또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the Great Migration of Germanic tribes)'에 유럽을 침략한 반달족 Vandal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최근에는 야만과 파괴라는 심상(이미지 image)을 씌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반달리즘은 폭력적인 문화재 파괴 행위를 뜻한다.
이러한 반달리즘은 다양한 맥락에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었다.
가장 흔한 반달리즘의 예는 전쟁에서 일어난다.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나폴레옹 1세 Napoléon I)(재위 1804~1815)이 이집트 원정에서 유물을 약탈해 가고 수많은 서양의 탐험가가 다른 나라의 유적을 부쉈던 것도 반달리즘의 일종이다.
1991년 이라크전 때는 미군은 메소포타미아문명 Mesopotamian civilization의 대표적인 유적인 지구라트 Ziggurat를 군홧발과 지프차 jeep로 거침없이 밟으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히틀러 Hitler의 나치 Nazi 부대는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미개한 슬라브인 Slavs의 역사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몇백만 점의 문화재를 의도적으로 파괴하기도 했다.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Afganistan에서 정권을 잡은 탈레반 Taliban은 이슬람원리주의 Islamic fundamentalism에 입각하여 우상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초기 불교의 대표적인 유적으로서 6세기에 만들어진 바미얀 석불 Buddha of Bamyan을 폭파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타 문화, 타 종교에 대한 증오심과 문화재의 파괴는 사실 한국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찾아볼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 전시실에는 목만 남아 있는 부처 또는 목이 없는 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과 근대 이후 서방 종교의 유입과 함께 불교는 탄압받았고 불상의 목이 잘린 것이다.
중국의 키질 석굴 Kizil Caves이나 베제클리크 사원 Bezeklik Monastery 같은 대표적인 비단길(실크로드 silkroad)의 유적에도 벽화의 곳곳에 얼굴이 파여 있다.
이교도라는 이유로 후대의 사람들이 훼손을 가한 흔적이다.
이렇듯 문화재 파괴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그런데 최근에는 극단적인 종교와 전쟁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부 사람의 어처구니없고 몰지각한 행동으로 치명적인 폐해를 입기도 한다.
2008년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송사에 불만을 가진 한 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질렀고, 갑작스러운 화재에 초기 대응이 미비하여 결국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3년에는 SNS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 경복궁 담벼락에 페인트 paint로 낙서를 한 사건도 있었다.
세계적인 유물이 많은 유럽의 박물관도 만만치 않은 사건을 겪었다.
뭉크 Edvard Munch의 그림 <절규 The Scream>는 두 번이나 도난을 당했다가 돌아왔고, 다빈치 Leonardo da Vinci의 <모니리자 Mona Lisa>는 2024년 1월에 환경단체의 시위로 수프 soup를 뒤집어쓸 뻔했다.
이는 문화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또 사회적으로 쟁점爭點(이슈 issue)이 되기 때문에 반대로 관심을 끌기 좋은 소재가 된 것이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思惟의 방房'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어떠한 철책 없이 전시되어 있고, 그 밖에도 보물이 손만 뻗으면 닿을 듯 전시되고 있다.
현대박물관은 가급적이면 장벽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배리어프리 barrier-free' 정책이 대세이다.
배리어프리는 고압적인 배치로 관람자를 소외시켰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보는 사람이 박물관의 전시를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강조하는 전시 기법이다.
반달리즘과 배리어프리는 서로 모순적이다.
장벽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반달리즘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숭례문의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제대로 된 보호 철책이 없었다면서 많은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유물과 유적을 제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고고학의 목적은 토기 한 점이라도 제대로 발굴, 보존해서 후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무조건 금줄을 두르고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모든 관람객을 '잠재적 문화재 파괴자'로 간주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유물의 훼손을 막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유물을 전시하지 않고 철통같은 경호를 받는 수장고 속에 두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은 유물을 전시하고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한다.
과거 유물은 현대 우리와 함께하여 그 가치가 끊임없이 재해석될 때에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를 가도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지는 결코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인권의 신장이 관련되어 있다.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을 말하는 딜레탕티슴 dilettantisme(영어 dilettantism) 즉 향략적享樂的 문예도락文藝道樂은 원래 귀족의 취미였다.
고대 이래로 과거의 보물을 소유하고 감상하는 것은 왕이나 귀족의 특권이었고, 전시회는 한정된 사람에게만 허용되었다.
일반 민중은 박물관의 유물을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미개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과거 유물을 쉽게 볼 수 없었다.
이러한 귀족의 박물관이 모두를 위한 박물관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18세기 이후 근대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가 퍼지고 일반 시민계급 의식이 자각되면서이다.
그 첫 번째 시작은 프랑스였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 French Revolution이 일어나며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했고, 일종의 대학인 리세 Lycee(영어 High school)를 만드는데, 여기에서 교육의 일환으로 박물관을 만들 것을 규정했다.
아울러 1793년에는 파리 국민회의의 결의에 따라 왕이 살며 온갖 보물을 쌓아두었던 루브르궁 Louvre Palace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는 법을 통과시켰다.
뒤이어 1845년에는 영국 의회에서도 박물관령 Museum of Acts of 1845이 통과되어 시민교육 기관으로 거듭났다.
한국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 조선 왕실이 모아둔 보물을 관리하던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며,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고궁이 박물관으로 활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물관의 유물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향유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우리가 쉽게 박물관에 가서 국보급의 보물을 보고 즐기는 것은 이러한 몇백 년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교육을 위한 노력 덕분이었다.
자칫 반달리즘을 경계하여 박물관의 유물을 경비하는 데에만 급급하다면 원래 박물관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실 고고학자로서 현대사회에서 유물과 유적을 어떻게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을지 답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대안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물리적인 정책이나 금줄보다는 CCTV나 경보장치(센서 sensor) 따위를 달아서 사람의 과도한 접근을 막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문화재 훼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면 문화재를 파괴해서 사람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욕구를 막을 수 있다.
아울러 문화재 파괴에 대한 철저한 실태조사(모니터링 monitoring) 및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도 필요할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의 주범은 그 전에도 창경궁과 같은 문화재에 방화를 시도한 범죄 전력이 있었다.
숭례문의 진화에도 제대로 된 지침서(매뉴얼 manual)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반달리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처럼 도시 전체가 문화재인 곳에서 더욱더 극성이다.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재는 우리가 금줄을 치고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즐기고 사랑할 때에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놀이동산이 되는 유적들의 수난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세계적인 문화재 사랑을 자랑하는 한국임에도 여전히 문화재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질 않고 있다.
사적으로도 지정되어 있는 김포의 장릉章陵은 경기도 김포에서 조선 16대 국왕인 인조仁祖의 양친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를 모신 곳이다.
특히 김포 장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에 포함되어 있는데, 세계유산의 필수 조건 중 하나는 원형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아파트가 건설될 때에 문화재청이 별도로 관리하지 않았고, 현재 관할 지자체도 책임을 회피한다.
2021년 9월에 국가유산청에서 아파트가 제대로 된 인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공사 중지를 요구했지만, 재판 결과 아파트를 건설하라는 판결이 났다.
이 사건이 표면화되자 아파트 입주인의 재산권이 걸리면서 문화재와 고고학이 경제개발의 장애가 되는 식으로 여론은 확대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된 이 지역에서 건설허가가 나고 1년 가까이 공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문화재의 관리 주체가 전혀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처음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와 그 주변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었다면 처음부터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마치 '개발-고고학'의 대립 구도로 보이지만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더 큰 원인은 그 내부의 미흡한 관리였다.
비슷한 상황으로 세계문화유산급의 문화유산이지만 빠른 시간에 발굴되어서 이미 놀이동산이 들어선 춘천 레고랜드가 있다.
정상적인 고고학 조사를 수행했다면 몇십 년 동안 유적으로 조사하면서 세계적인 유적 공원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유적은 사라졌다.
약 3,000년 전의 집자리 1,000여 개와 고인돌 200기가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적이 5년 만에 발굴되어 버린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과정이 법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졌다.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고고학 유적을 발굴할 수 있는 구제발굴에 대한 법령 말이다.
심지어 유적을 정비 복원하는 과정에서 파괴되기도 했다.
2022년에 김해 구산동의 고인돌 유적 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이 구산동 유적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알려진 가장 거대한 고인돌로 약 500평의 묘역에 350톤이 넘는 고인돌 뚜껑을 얹은 것이다.
그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고고학자가 쉽게 조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지난 2022년에 이 고인돌을 정비한다는 이유로 삽차(포클레인 poclain)로 고인돌 주변에 깔아놓은 돌을 다 빼면서 원형이 완전히 훼손되었다.
그 과정은 고고학자가 참여하지 않은 채 지자체의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수많은 잡음이 생기고 사실관계가 명백히 드러나도 책임자를 일벌백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고고학 유적을 둘러싼 잡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이 세계적인 선진국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갈등은 법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지며, 아무리 제도를 만들어놓아도 땅속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고고학 유적의 특성상 갈등은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인사동 금속활자, 등잔 밑의 보물

흔히 발굴을 하면 깨진 기왓장과 주춧돌만 수두룩하게 나온다.
이를 두고 어차피 한국에 수많은 비슷한 유적들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하나하나 소중하게 발굴할 필요가 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그때마다 고고학자는 어디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고고학이고 유물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실제 좋은 예가 얼마 전에 일어났다.
2021년 6월 29일에 정식으로 서울 공평구역(인사동)에서 건물을 헐고 다시 빌딩을 짓기 위해서 발굴을 진행했다.
여기에서 조선시대 기와집 건물의 한쪽에 놓인 항아리 안에서 한글 금속활자, 물시계 부속, 천문시계, 소형 화기火器인 총통銃筒/銃筩 여덟 점이 나왔다.
무엇보다 한글 금속활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였다.
일괄로 출토된 금속활자는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 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
한글 금속활자, 해시계 처럼 조선을 대표하는 국보가 항아리 하나 안에서 출토되었다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극적인 발굴이었다.
사실 600년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 사대문 안에서 어디든 땅을 판다면 유적이 안 나오는 것이 비정상일 것이다.
무엇이든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21세기 최고의 국보급 유물이 출토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금속활자 중에는 그동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1455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다 20년 이른 세종의 '갑인자甲寅字'(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도 발견되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당시의 금속활자가 나왔으니, 앞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보물로 우리 역사와 함께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견된 곳은 서울 사대문의 수많은 건물 중 하나로 이러한 보물이 묻혀 있다는 어떠한 역사 기록이나 증거가 전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귀한 유물이 항아리에 함께 담겨서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가설이 있지만 아마도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1차 분석에 따르면 항아리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가장 시기가 늦은 것은 1588년 전후에 만들어진 총통이라고 한다.
항아리에 들어 있는 유물은 하나같이 귀한 청동기 제품으로 약 150년이라는 다양한 시간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 한곳에 모여 있다.
이것을 일반인이 고물처럼 모을 리는 없고, 아마 관공서에서 보관했던 것을 전란 중에 집 근처에 넣어두었다가 결국 다시 되찾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경우는 고고학에서 꽤 흔하다.
전문용어로 '퇴장退藏 horad' 유적이라고 하는데, 어떤 흔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땅속에서 돈이나 보물을 담은 항아리가 발견되곤 한다.
인사동 금속활자 유적은 얼핏 보기에는 한양 도성 안에 수많은 기와집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위치는 종로2가의 북쪽 인사동 근처로 수많은 사람이 지나던 거리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보물이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번잡한 서울 거리의 발밑에 묻혀 있었다.
땅 위에 그 표시를 보여주는 고고학 유적은 거의 없다.
작은 구역이라도 땅속에 있는 고고학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는 법이 없었다면 아마 인사동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4. 1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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