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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4천 년 후퇴시킨 문화대혁명

새샘 2026. 5. 25. 17:35

명십삼릉 가운데 만력제의 매장지인 정릉의 전경(출처-출처자료1)

 

허준: 지난 2024년 3월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첫 공개 연작물)  Neflix  Original Series <삼체三體 The Three-Body Problem >가 공개되어 꽤 큰 반향을 일으켰죠. 이후 빠르게 시즌 2와 시즌 3까지 제작이 확정되었는데요.

 

작품을 보면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Cultural Revolution이 굉장히 중요하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문화대혁명이 중국 역사를 4천 년 후퇴시켰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얼마나 후퇴한 걸까요? <삼체>에서 언급한 것처럼 4천 년을 후퇴시킨 걸까요?

 

 

강인욱: 저는 고고학자이다 보니 문화대혁명 당시 고고학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당시 고고학자들의 경우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의 경력(커리어 carrier)이 완전히 실종되어 있어요. 엄청나게 죽기도 했을 테고 농촌으로 보내져 농촌생활 및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이들도 있었을 거고요. 그러니 고고학 발굴 자체가 정지되다시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위병紅衛兵(문화대혁명의 한 추진력이 된 학생 조직)들이 이미 발굴된 유물과 유적들을 때려 부쉈죠.

 

일례로 명나라 황제 열여섯 명 중 열세 명이 묻힌 '명십삼릉明十三陵' 가운데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매장지인 '정릉定陵'의 경우 1958년에 이미 발굴 작업이 완료되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들이닥치면서 홍위병들에 의해 만력제의 유골이 완전히 부숴지고 불태워졌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처벌을 받은 홍위병은 없었죠.

 

관련하여 중국에선 '78학번'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그전까지 10년 동안 대학교가 폐쇄되었다가 1970년대 초반부터 일부 입학이 되긴 했지요. 하지만 대학 입학시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홍위병들이 노동자, 농민, 군인들을 임의로 선발해 각 대학교에 넣어버린 겁니다. 그러다가 1978년, 10여년 만에 대학교가 정상화된 거죠. 이른바 20세기 중국을 일으킨 재건의 당사자들이 78학번입니다. 고고학계로만 봐도 여전히 78학번들의 위세가 엄청나죠.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역사가 족히 4천 년은 후퇴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고 또, 역설적인게, 1978년부터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중국이 세계적인 강국으로 복귀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차라리 문화대혁명이라는 게 중국을 무조건 후퇴시킨 게 아니라 대부분의 인민을 각성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면서 급속적인 발전으로 이어지는 역설적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한편으로 제 지인 가운데도 당시 홍위병이었던 분이 있겠지만 아마도 금기시되었을 테니 때로 두렵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고, 실제로 중국에선 금기시되어 있죠. 당시 뭘 했는지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정요근: 문화대혁명 때 중국인들이 당한 일을 보면 국가폭력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와중에 국가폭력의 피해자도 있었고 물론 가해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큰 틀에서 보면 모두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실패로 권력 기반이 흔들린 마오쩌둥(모택동毛澤東)이 권력을 유지하고자 일으켰다는 점에서 사욕이 들어간 면이 강하죠.

 

결국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극단적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문화대혁명의 어두었던 역사가 있었기에 이후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이 권력을 잡은 뒤 나라를 개혁개방으로 이끌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중국은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세계적인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 않습니까.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이 그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강인욱: 네, 말씀대로 문화대혁명이 가진 역설적인 측면이 있지요.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홍위병들이 그런 식으로 나라를 송두리째 뒤엎을 정도의 힘(에너지 energy)이 있었기에 바로 그 힘을 자양분 삼아 개혁개방 쪽으로 바꾸는데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거죠.

 

그런 긍정적인 면과 함께 '역사적 합리화'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고 세상을 부순 홍위병에 대한 잘못만 쏙 뺀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중국은 한쪽 면만 보는 경향이 짙은 것 같습니다. 문화대혁명 당시를 명명백백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후과後果(뒤에 나타나는 좋지 못한 결과)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문화대혁명의 10년은 중국에서 이른바 '집단 소거'된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그때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할 수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되죠. 또 지금에 와선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일종의 자기합리화로 당시의 기억을 미화하는 경우도 있구요.

 

어쨌든 15억 중국인의 기억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집단적으로 지워진 셈이니, 심리학적 측면에서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서기 70년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다.(출처-출처자료1)

 

박현도: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로마 제국 Roman Empire의 압제에서 독립하려는 유대인(유태인猶太人) Jewish people(Jews)들이 대대적으로 일으킨 반란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First Jewish-Roman War'라고 하는데요.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 Jerusalem을 정복하고 파괴하면서 전쟁이 끝났는데, 73년에 유대인들이 마사다 요새 Masada Fortress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로마군 손에 죽지 않기 위해 서로 찔러 죽이고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이스라엘 Israel에선 지금도 마사다 요새의 항전을 기리면서 국가정신을 함양하고 있는데, "그때 만약 이스라엘인 Israelis들이 로마에 항거해 모조리 죽었다면 지금의 유대가 있었겠는가? 누군가는 후대를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때 로마 제국에 항거하지 않고 살아남은 걸 부끄럽게 생각해선 안 된다."라고도 말하는 겁니다.

 

문화대혁명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고 자기합리화해 미화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기억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를 떠올립니다.

 

 

강인욱: 문화대혁명이 낳은 후과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모습 중 하나가 중국을 떠올릴 때 부정적인 모습들, 이를테면 주변 신경 안 쓰고 자기들끼리 막 떠들거나 광장에 한데 모여 광장무를 추는 게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모습에서 왔다고도 보는데요.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대부분 배우지 못했고 또 자기들끼리 모여 뭔가를 하면 안 되는 게 없던 시절이니, 그런 식으로밖에 존재감을 내세울 수 없게 된 측면도 있는 거죠. 즉 현재 중국의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 중 몇몇이 사실 문화대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박현도: 강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과 비슷한 현상이 중동에도 있습니다. 1979년 이란 Iran에서 입헌군주제 팔라비 왕조 Pahlavi dynasty가 무너지고 이슬람 Islam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갖는 이슬람 공화국 Islamic Republic이 수립되는 '이란 혁명 Iraniam Revolution'이 일어납니다.

 

그때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으로 바뀌었는데, 혁명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요. 정권이 바뀌면서 잘 배우지도 못하고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어느 날 완장을 차고 나타나선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심문하고 잡아들이니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혁명이 지난 다음 미국에 가 있는 왕당파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란을 무너뜨리려고 갖은 노력을 하고 있고 이란은 그 노력을 막고 있죠. 즉 세속과 이슬람이 부딪히다 보니 이란 정부는 고대 왕정을 비롯해 관련된 역사에 대한 관심을 최대한 지양하는 겁니다. 이란에서도 이른바 '역사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거죠.

 

 

고대 이집트 파라오 아케나톤 석상(출처-출처자료1)

 

곽민수: 혁명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는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길고 긴 고대 이집트 Ancient Egypt, 굉장히 평온했지만 딱 한 차례 20년 정도 격렬한 혁명기가 있었어요.

 

신왕국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Pharaoh 아케나톤 Akhenaton 시절로, 대략 서기전 1350년부터 20년 동안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종교를 아예 바꿔버리려고 했어요.

 

고대 이집트 문명은 다신교 사회였죠. 다신교 체계 속에선 자신이 집중적으로 숭배하는 신을 최고신으로 만들고자 숭배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숭배 집단을 탄압하는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아케나톤은 몇천 년 동안 내려오던 다신교적 전통을 부정하고, 그때까진 아주 중요하지 않은(마이너한 minor) 역할만 하던 신 아텐 Aten을 끌고 와 최고신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신으로까지 만들려고 했죠. 그 과정에서 다른 신들은 부정되었고, 그 다른 신들의 숭배자들도 배척했습니다.

 

후대 이집트인 Later Egyptians들은 그 시기를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일례로 그 시기를 '질병만 가득했던 시기'라고 기록한다든가 아케나톤의 이름을 모든 기록에서 지워버리는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후대 학자들이 그 시기를 복원하는데 굉장히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 시대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파괴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보존이 잘된 사례들도 있고요.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실재했던 역사가 완전히 잊히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허준: 저는 사실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후퇴를 가져왔는지 또는 발전을 가져왔는지보다, 이를테면 문화대혁명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나서도 역사학도나 고고학도가 될 마음이 있었을까 궁금해요.

 

박현도: 튀르키예 공화국 Republic of Türkiye이 성립될 때 이야기를 잠깐 드리면요.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ürk가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할 때 방향성은 명백했습니다. 튀르크인 Turks들은 원래 유럽인이었고 또 백인이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바꿔버려요. 그러니 튀르크인이 몽골 Mongolia 쪽에서 왔다는 명백한 사실을 뒤로하고 유럽인, 나아가 백인 쪽을 맞춰야 하는 거죠. 그러니 그런 체제 아래서 정상적인 학문, 특히 역사학을 공부하는 건 너무나도 힘들었을 겁니다. 이를테면 '1+1=2'라는 진리를 당연하게 여길 수 없으니 말입니다.

 

 

곽민수: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연구의 경우 언제나 정치적 동원의 대상이 됩니다. 양면성이 존재하는데요. 정치가 인문학 연구에 개입하면 추진력(벡터 vector)이 강하게 걸리기 때문에 특정 역사관이 주류가 되는 문제점이 도출되지만, 정치의 개입으로 확실한 지원이 뒤따르기에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는 거죠.

 

대표적 사례라 하면, 영국에서 인류학이나 역사학 또 고고학 따위의 심층 인문학이 발전했던 배경에는 영국이 제국을 운영했던 당시 각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그 지역들을 연구하는 데 매달린 것도 있습니다.

 

런던대학교 University of London의 경우 동양·아프리카 대학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SOAS)이나 런던정치경제대학교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LSE) 같은 유수의 대학교들이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영국의 연구 중심 대학교들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원래 이 대학교들은 영국 제국주의가 식민지 개척과 연구의 첨병 역할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선 전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과학의 중심지로 우뚝 서 있어요.

 

※출처
1. 박현도, 곽민수, 강인욱, 정요근, 허준 지음, 역사를 보다 2(믹스커피, 2025)
2. 구글 관련 자료
 
2026. 5. 2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