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신윤복이 남장여자의 화원이라는 가정 본문

글과 그림

신윤복이 남장여자의 화원이라는 가정

새샘 2008. 1. 25. 16:41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18?)의 화사대결과 더불어 독자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는 혜원이 남장여자라는 설정이다.

 

혜원이 도화서 화원이라는 설은 있으나 기록에는 없어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갔다가 춘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쫓겨난 것으로 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혜원의 그림은 여성 그것도 기생을 소재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소설에서는 혜원이 남자치고는 준수하지만 무척이나 여성적인 용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야금 명기(名妓)인 정향의 사랑을 듬뿍 받는 화원으로 말이다.

단원은 후배인 혜원을 지도하는 도화서 교수로서 사제지간이면서, 도화서에서 가르치는 동안 혜원의 천재성에 반해 혜원을 무척 사랑하게 되며, 남장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난 다음부터는 이성으로 사랑하는 감정을 갖기에 이른다.

 

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은 퇴임한 도화서화원으로서, 동시대에 실력은 뛰어났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갑자기 살해당한 한 화가의 어린 딸을 양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딸아이가 친아버지의 천재적인 그림 감각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이 애를 자신의 대를 잇는 도화서 화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장남자로 변신시키고 그림공부를 시킴으로써 결국 자신의 소망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출생비밀을 가진 남장여자인 혜원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그림의 소재로서 여성 그것도 비밀이 많고 천대받는 기생과 그들의 사랑을 즐겨 그렸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혜원이 남장여자라고 추정하는 근거를 혜원의 그림에서 찾는다.

혜원의 그림 '월야밀회(月夜密會)'는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 담장 뒤에서의 여인과 별감의 밀회를 별감의 또 다른 정인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몰래 지켜보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그림을 남자가 그렸다면 밀애를 지켜보는 사람을 여인이 아닌 남정네로 그려야 정상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별감의 품에 안긴 여인의 남편이나 정인이라야 더욱 긴장감이 넘치고 인물들의 격정이 보는 사람에게 더 잘 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남장여인이기에 윤복은 남정네가 아닌 여인을 그리고 말았다. 이것은 깊이 숨겨졌던 여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발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그림을 본 후 혜원의 옷태와 생김을 눈여겨본 결과 남장여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얘기가 이어진다.

 

혜원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미인도(美人圖)'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새샘도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여인은 정면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선 앳된 얼굴이다. 둥글고 반듯한 이마, 단정한 실눈썹과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는 맑고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과 작지만 그래서 더 매혹적인 입술을 지닌 단아한 미인이다.

살짝 돌린 얼굴은 수심에 잠긴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복잡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윤기나는 머리카락 위의 탐스런 가채는 여인의 당당함을 말해준다. 보송거리는 왼쪽 귀밑머리는 앳된 순수함을, 귓전의 자줏빛 댕기는 발랄한 젊음을 보여준다.

옷자락이 짧고 소매가 좁은 삼회장저고리는 단아한 어깨를 감쌌고,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 치맛자락은 풍성함을 더해주며, 주름진 치맛자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외씨버선은 금방 돌아설 듯 아슬아슬하다.

 

왼쪽 위에는 “여인의 가슴속에 감추어진 마음을 성심의 붓끝으로 그리다.”라는 화제가 씌어 있다.

 

이 미인도는 바로 남장여인 윤복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이 그림은 본 단원은 이렇게 읊조린다.

“웃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아름다운지 고혹적인지.... 알 수가 없구나.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아름답다! 아름다울 뿐이다.......”

이 읊조림을 혜원이 이어 받는다.

“알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알아버린다면 아름다움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 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곳에 손이 닿고, 그 강을 건너고, 그것을 가진다면 가슴속에 들끓던 불덩이는 곧 재가 되고 말겠지요.”

 

그러자 단원은,

“모든 화인들이 심혈을 다해 그리고 성심을 다해 칠하지만..... 정작 아름다운 그림은 드물다. 그러니 그림의 뛰어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근원이 궁금하기만 하다.”

혜원의 대답이 이어진다.

“그림이 뛰어난 것은 그리는 자의 사랑이 깃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보일 것입니다.”

 

단원이 덧붙인다.

“그렇겠지. 자기 그림을 사랑하지 않는 화인이 없겠지만, 그리는 대상을 진실로 사랑하는 화인은 몇이나 되겠느냐. 더러는 권세를 탐하고 더러는 재물과 명예를 위해 그릴 뿐. 그들은 권세와 재물과 명예를 사랑할 뿐 그리는 대상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

혜원의 마지막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 그림은... 평생을 감추며 살아왔지만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저는 평생을 이 여인과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여인된 저를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단원이 다음과 같은 말로서 미인도와 혜원을 평가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래. 누군가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지.  설레게 하면서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 궁금하게 만드는 여인이다. 농염하나 청아하고, 고혹적이지만 해맑은 것은 여인을 향한 화인의 마음이 붓 끝에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아름다운 그림, 그저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화인은 별처럼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조선을 아껴 후대의 후대에 어떤 천재를 내어도 이같은 걸작을 다시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2008. 1. 2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