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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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정란

새샘 2008. 1. 17. 11:35

한국인으로서 먼 나라를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겼던 인물로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승려 '혜초'가 있다.

하지만 전 생애를 여행에 맡긴 무모하지만 용기있는 여행가를 우리나라 특히 기록이 많은 조선시대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조선 후기에는 금강산을 등반하는 열풍이 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토산하를 탐방하는 멋을 누렸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이후 문인들 사이에는 특별한 여행체험을 시와 산문으로 쓰는 바람이 불기도 했다.

때때로 운이 좋은 사람은 중국이나 일본을 여행하기도 했고, 여행 뒤에는 많은 여행기가 출현하였다.

여행이 이렇게 보편화되었다고 하지만 여행이 삶의 전부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연 그 시대에 여행 자체에 존재의 의미를 맡긴 전문적인 여행가가 존재하였을까?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삶을 살았던 괴짜가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즉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명산대천을 누볐던 전문여행가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얘기다.

오늘날의 여행가라는 개념에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여행을 향한 열정이라든가, 발로 걷고 당나귀를 타는 등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다다르는 여행가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조선시대에서 찾아낸 것이다.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 또는 '창해'라는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1791)이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남북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동서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산천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로 그리고 그림으로 남겼다.

2004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그가 당시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게 부탁하여 마련한 <와유첩(臥遊帖)>이 공개되었다.

 

정란은 경상도 출신의 사대부다.

이런 자가 전 국토를 샅샅이 누비는 전문여행가가 된 동기는 무얼까?

그도 처음에는 다른 선비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나이 서른에 접어들자 정란은 갑자기 공부를 접고 여행길을 떠났다.

경전을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는 선비의 길  대신 여행이란 험난한 길을 택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잠시 현실을 벗어나 산수와 자연을 탐방하는 여행은 누구나 권장할 일이지만, 여행 자체를 즐겨 전문적으로 여행하는건 일종의 현실도피로 여겨졌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그같은 현실도피는 당시 금기의 하나였다.

그러나 정란의 경우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일시적으로 여행을 즐긴 그런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현실도피가 아닌 여행자체가 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추구하여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의 욕망으로 끓어넘쳤던 것이다.

정란의 성격 자체도 평범한 인생에 안주하기를 싫어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았다.

 

남경희(1748~1812)가 지은 <정창해전>에 실려 있는 다음 글에서 정란이 여행의 길을 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해)선생은 일찍부터 문예에 숙달하였으나 머리를 굽혀 과거공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청천 신유한의 문하에서 문장의 큰 취지를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하며, '대장부가 해동에 태어나 비록 사마천처럼 천하를 유람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동의 명산대천을 두루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하고 노새 한 마리를 장만하여 홀연히 혼자 길을 떠났다."

 

정란을 가장 잘 이해하는 문인인 이용휴(1708~1782)는 백두산으로 떠나는 정란을 배웅하면서 써준 연작시에는 다음과 같은 싯귀가 들어있다.

 

"제 둥지만 돌아보는 새와 같이    

떠나려다가 망설이며 빙빙 도는 사람들 

그대는 절세의 용맹함 지녀서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 끊어버렸네 

수만의 베개 위에서 코를 골며    

한창 부귀를 꿈꾸는 사람들

그대 등반한단 말을 듣고선 되레 흉보네,

무리와 다른 짓 하는 놈!"

 

정란 자신 스스로도 여행하는 의미에 대한 글을 썼다.

"정신과 세상 구경, 둘다 협소하면 사람의 기운이 크게 떨어지는 법이네.....................

허황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느니 실제 존재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낫고,

말을 과장하여 하느니 안목을 넓히는 것이 낫네.

해동의 나라가 비록 좁기는 하지만, 내가 힘을 다해 본다면 내 정신을 확트게 하여 넓힐 수 있네."

 

집을 나선 창해가 동반한 것은 청노새(털색깔이 푸른 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이 무렵 명산 열풍이 불어 금강산에 오르지 않는 건 식자층의 수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등산은 호사롭고 떠들썩하기 그지 없어 친구를 불러모으고 때로 기생과 악공까지 대동하였으며, 말을 타거나 중을 동원하여 남여를 타고 산에 올랐다.

 

그러나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고독하게 자연과 대면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 비로봉을 네 번이나 올랐다.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백두산을 등반하기 전에 두 번,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마지막으로 1788년 강세황, 김홍도, 김응환을 비롯한 화인들과 함께 올랐다.

이때 강세황이 장안사에 묵고 있을 때 약속도 하지 않은 정란이 어디선가 표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정란은 금강산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금강산을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화가들에게 그려달라고 해서 <산행도>란 화첩을 만들었다.

이때 그림은 최북이 그렸고, 글은 이용휴가 지었으며, 글씨는 강세황이 써서 이 셋을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이용휴가 지은 글은 정란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차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산에 다녀갔다 해도 오히려 空山이었지.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구나!

그대를 두고 山門을 처음 연 분이라 해도 좋겠구나!"

 

 

 

정란은 전국을 떠돈 여행가지만 시와 문장에 능한 문인이었으므로 세상을 주유하며 시와 글을 지어 해낭(시문의 초고를 넣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산의 풍치를 묘사한 그림과 산맥과 수맥을 표시한 <유산기(遊山記)>가 그 해낭에 들어 있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이 서첩이 <불후첩(不朽帖)>이다.

정란은 자신의 여행 체험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서 서첩의 이름을 불후첩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화첩을 당대의 명사들에게 보이고 글을 받았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정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채재공으로서 그는 정란을 보고 "당신이란 사람 자체가 썩어서 사라지지 않는 존재다"라며 그림이나 찬사가 필요없다는 말을 남겼다.

 

정란은 예술적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교유한 화가는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김응환, 허필 등이었다.

특히 김홍도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는 제목으로는 화가의 운치있는 집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정란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여기에 멋진 사연과 함께.

 

 <정란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단원도, 왼쪽의 거문고 연주하는 자가 단원, 가운데 부채를 든 자가 강희언, 오른쪽 수염기른자가 정란이다>

 

단원도 그림 상단에는 정란이 쓴 두 편의 시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은 제사(題辭)가 실려 있다.

정란은 1780년 묘향산을 거쳐 의주로 해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금강산을 거쳐 돌아온 뒤 단원의 서울집을 방문했다.

이때가 1781년으로 단원이 36세, 정란은 57세였다.

아마 백두산을 유람한 행적을 단원에게 전해주고 그림을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간 듯하다.

그 자리에 화가 강희언(1710~1784)도 함께했다.

여기서 정란은 백두산 여행담을 재미있게 늘어놓으면서 나이가 가장 많은 정란이 좌장의 위치를 점하여 앞에 앉고, 단원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희언은 술을 권했다.

한 시대의 명사 세 명이 둘러앉아 즐겁고 진솔한 시간을 보내면서 이를 진솔회(眞率會)라 불렀다.

 

이날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784년 경기도 안기역의 찰방(요즘의 역장)으로 재직하던 김홍도를 정란이 또 찾았다.

정란은 "얼굴과 용모에는 여전히 산수의 기운이 서려 있고, 늙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력은 쇠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음해 봄 한라산을 등반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김홍도는 그의 여행욕에 대해 "대단히 기이하고 웅장하다"고 경탄하며 그와 "닷새 낮밤으로 취하면서 회포를 푼 뒤" 4년 전 모임을 추억하며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이다.

그림의 맨아래 오른쪽 버드나무 휘늘어진 열린 대문 옆에 벙거지를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아이가 정란을 따라다니는 종이고, 그 옆에 비쩍 마른 바로 그 청노새가 보인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린 명작 속에 당대 최고의 여행가 정란이 우연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오시하는 오골의 자태와, 누가 뭐라든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면에서 화가와 여행가는 서로 통하는데가 있었던 것이다.

 

정란은 서른살부터 이십여년간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탐방했다.

남으로는 낙동강, 덕유산, 속리산, 월출산, 지리산을 엿보았고, 서로는 대동강을 굽어보았으며,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 금강산을 올랐다.

지리산이나 금강산을 그저 앞마당으로 간주할 만큼 조선의 산천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백두산과 한라산은 미답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정란의 나이 쉰다섯 되던 해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웠다.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정란의 백두산 등반은 거의 1년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등반의 구체적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란은 백두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에게 신기한 견문을 전달했다.

강이천에게는 갖은 고생한 일, 유람하면 본 일, 산과 계곡의 기이함, 구름과 초목의 온갖 모습을 밤새도록 말해주었다.

화가 최북에게는 자신이 본 것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친구 신국빈에게 보여주었다.

최북의 그림 속 정란은 일거수일투족에서 백두산과 맥이 통해 있는 느낌이었다고 신국빈은 소감을 말했다.

백두산 등반으로 인해 정란의 내면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정란이 한라산과 조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김홍도와 만난 1784년 새봄이 되면 한라산을 오르겠노라고 한 걸 보면 1785년 봄 한라산 등반에 성공한 듯하다.

 

만년에 정란은 서울을 들러 성대중을 찾아가 <불후첩>을 내어놓고 글을 받으려 했다.

이때 성대중은 한 가지 일화를 들어 정란이 불후의 이름을 남길 것을 예언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옛일에 해박한 사람이 있어 창해옹을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아마 이마두(利馬竇, 마테오리치)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은 한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는데도 항해를 그렇게 보았다.

창해옹은 그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좋아했다.

이마두는 천하를 두루 구경하였고, 창해옹은 동국을 두루 구경하였다.

크고 작기에는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하기는 같다. 그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하다."

 

정란은 여행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온 나라 안의 어린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창해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여행가, 산악인이라 이름지어 부를 만큼 열정적 산수벽의 소유자로, 18세기 문화계의 한 매니아로 기억될 인물이다.

이런 정란을 당시 사람들 대다수는 비웃거나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친한 친구들조차 선비의 길을 버리고 산수에 탐닉하는 그를 비판했다.

반면 일부 지식인들은 정란의 열정적 여행벽에 박수를 보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용휴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났으면 굳세게 자립하여 품은 뜻을 실천해야 할 뿐, 이 칠척의 몸을 과거시험 답안지나 금전출납부 속에 매몰시켜서야 되겠는가?

정일사가 삼한 땅의 아름답다는 산수를 전부 유람하고 드디어 바다를 건너 탐라에 들어가 한라산을 유람한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비웃는다. 속된 뿌리가 골수에까지 파고든 사람은 비웃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백년 뒤에 비웃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선비 정란은 남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이백 년 전에는 전문적인 여행가의 삶은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위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이용휴는 수백 년 뒤에는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지금 사람들은 이용휴의 물음에 무어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이 글은 안대회가 지은 '조선의 프로페셔널: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없이 도전한 사람들(2007, 휴머니스트)'에 실린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 각 분야의 프로페셔널 10명에 대한 생생한 삶을 기록에 근거하여 알리고 있다.

 

2008. 1.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