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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미 민영익 "노엽풍지도"

새샘 2011. 3. 10. 15:23

민영익,  노엽풍지도, 종이에 수묵, 31×56㎝, 호암미술관

 

 

난蘭은 예부터 고고한 인격자를 뜻했다. 특히 왕조시대에는 임금을 향한 충신의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착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갖가지 난초가 놓인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 있으면 저절로 그 향내가 몸에 배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로부터 훌륭한 벗끼리의 사귐을 일러 지란지교芝蘭之交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난꽃은 이른 봄에 피지만 추운 겨울에도 그 고결한 모습은 한결같다.

 

노엽풍지도露葉風枝圖는 민영익이 1896넌 그린 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먹빛이 윤택해서 참기름이 물 위를 떠다니는 듯하고, 낭창낭창하게 뽑아올린 긴 이파리의 미끈한 탄력이며 빼어난 자태가 비할 데 없이 곱다. 꽃 이파리를 보아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펼쳐서 망울진 작은 봉오리와 함께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조화의 극치를 보이며 작은 한 획 속에도 드러난 농담의 변화가 천연스럽다. 향그러운 꽃은 물론이요, 흙 위에 툭툭 친 이끼점(태점苔點)조차 너글너글하고 유정하며 물기가 낙낙하니 그야말로 귀인자제의 고상한 품격 그대로다. 여백의 균형 또한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하여 왼쪽 위쪽에 중국 서화가 포화蒲華는 다음과 같은 화제를 적었다.

 

  나라(중국) 안에 난 그리는 사람이 드무니 (해내화난인소海內畵蘭人少)

  마땅히 나라 밖에서 구해야 하리          (당어해외구지當於海外求之)

  그대(민영익)는 참된 이치 터득했구려    (군가능오진체君家能悟眞諦)

  먹 향기 이파리에 드러나 바람을 타네    (묵향노엽풍지墨香露葉風枝)

 

제목은 화제에 포함된 '노엽풍지'에서 따서 지었다. 즉 '먹 향기 이파리에 드러나 바람을 타는 난 그림'이란 뜻이다.

 

※운미云楣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그 총명함에 끌린 명성황후 민씨가 친정의 양자 즉 친조카로 삼아 조선말 민씨 세도의 중심이 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는 망국의 책임이 있는 민씨일가의 한 사람이지만 1884년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27살때부터 중국으로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학문을 이어받아 학문과 서화가 뛰어났으며, 특히 묵란墨蘭을 잘 쳤다.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스러져가는 고국 조선을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심경을 달래면서 묵난을 쳤다고 한다. 운미의 대표작은 이 그림이 아닌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은 고 외우 오주석 선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2006, 솔출판사)'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11. 3. 1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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