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오주석의 화산관 이명기 "채제공 초상" 해설 본문

글과 그림

오주석의 화산관 이명기 "채제공 초상" 해설

새샘 2019. 9. 20. 17:30

이명기, 채제공 초상, 비단에 채색, 121x80.5㎝, 보물 제1477-1호, 수원화성박물관

 

위 그림은 조선 정조 때 좌의정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초상인데 수원에 화성 신도시를 건축할 때 총 책임자였다. 오른쪽 화제 첫 줄에는 '상국(정승) 번암(호) 채제공 백규보(자)의 73세 때 초상(번암 채상국제공 백규보 칠십삼세진 樊巖蔡相國濟恭伯規甫七十三歲眞)'이라고, 그리고 그 아래에 '그린 사람은 이명기(화자이명기 畵者李命基)'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둘째 줄 화제는 '정조 임금 15년(1791) 신해년에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다음 특별히 사랑했던 신하였기 때문에 초상을 그려 오라고 해서, 이걸 두 장 만들어 하나는 임금께 올리고 하나는 본가에 넘겨주었다(성상십오년신해 어진도사후승 명모상 내입이기본명년임자장 聖上十五年辛亥 御眞圖寫後承 命模像 內入以其餘本明年壬子粧'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지금 채제공 후손 댁에서 소장하게 된 그림인데,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의 초상인 셈이다. 그런데 연분홍빛 옷을 입고 있다. 이게 늙은 정승의 정장이다. 조선은 참으로 묘한 나라다. 요새 노인이 이렇게 핑크 빛 옷을 입었으면 화학 염료의 천한 빛이 겉으로 번들거렸겠지만, 이게 천연염색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은은한 멋이 우러난다. 그런데 임금께서 그에게 부채와 향낭을 하사하셨다.

그래서 이분이 감격해서 초상화 왼쪽 위에 이렇게 화제를 적었다.(아래 확대 그림)

 

"네 모습, 네 정신은 부모님이 주신 은혜고 (이형이정 부모지은 爾形爾精 父母之恩)

 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덮은 것은 성스러운 군주의 은혜로다 (이정이종 성주지은 爾頂爾踵 聖主之恩)

 부채, 이것도 임금님 은혜요 향낭 역시 임금님 은혜니 (선시군은 향역군은 扇是君恩 香亦君恩)

 한 몸을 싸고 장식한 것이 어느 물건인들 은혜 아닌 것이 있으랴 (분식일신 하물비은 賁飾一身 何物非恩)

 다만 부끄러운 것은 나 죽은 다음까지라도 그 은혜들을 다 갚을 계책이 없는 것이다(소괴헐후 무계보은 所愧歇後 無計報恩)

 번암 채제공 노인이 직접 짓고 썼다(번암자찬자서 樊巖自贊自書)"

 

이렇게 옛 초상화에 붙어 있는 글들은 참으로 멋지다. 한 사람의 삶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찬문 세부

 

이번에는 얼굴을 보자. 참 잘 생겼다! 선이 굵어 가지고 정말 정승감이다. 그런데 살짝 곰보다. 옛날 초상화를 보면 곰보가 많다. 마마(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운 병이었으면 '마마'라는 높은 이름을 붙여 가지고 '마마, 마마' 하면서 얼른 떠나시라고 했을까? 그래서 이렇게 살짝 곰보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팔뜨기 눈이다! 사팔뜨기인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거 정말 조금밖에 사팔뜨기가 아닌데, 조금만 슬쩍 돌려놓았으면 멋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분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옛날 분들은 사서삼경을 배워도 한 번 배우고 만 게 아니라 완전히 다 외웠다. 중학생 정도만 되면 분량이 적은 <대학>, <중용> 정도는 죄 외운다. 그 <대학>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성어중誠於中이면 형어외形於外라', '마음에 내적인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은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또 다른 말도 있는데, '소위성기의자 所謂誠其意者는 무자기야 毋自欺也'라고 한다. 즉, '그 뜻을 성실하게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가장 중시했던 글귀가 바로 이 '무자기 毋自欺', 즉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런 글을 한 번 본 게 아니라, 누구나 외우고 있는데, '좌의정이 제 초상을 만들면서 눈알을 살짝 돌리게 했다' 이런 소문이 들리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정말 우스갯감이 되고 만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얼굴 세부

 

옷을 그려도 밑바탕부터의 성실함은 마찬가지였다. 이 색감, 정말 아주 기가 막히다. 속에 껴입은 청색 옷이 아른아른 은은하게 비춰 보이는데 이렇듯 점잖고 고상한 것이 소위 조선 사람들이 생각했던 아름다움, 격조라는 것이다. 일본 기모노(착물着物)처럼 겉으로 난리법석 치는 문양을 잔뜩 깔아 놓은 것이 아니라, 저 아래서부터 은은하게 떠오르는 색조, 이런 것이 격조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림 바탕이 얇은 비단인데 어떻게 이렇게 진중하고 깊은 아름다움의 효과가 날까? 색을 칠할 때 물감을 비단 올 뒤에서부터 거꾸로 밀어 넣는 것이다. 밀어 넣어 가지고는 앞에서 다시 받아친다. 밑바닥부터, 속부터, 바탕부터 단단하게 다진다. 더욱 정성을 들일 때는 예를 들면, 빨강색을 예쁘게 내기 위해 그 보색인 초록색을 먼저 뒤에서부터 그려 넣고, 그 위에 다시 빨강을 칠한다. 정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의복 세부

 

그리고 아래 돗자리 그린 걸 보라! 짧은 선 하나하나가 시작과 끝이 다 살아있다. 이런 초상화 그림을 그릴 때는 보통 화가 다섯 명이 그린다. 최고의 화가는 얼굴을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몸체를 그리고, 조수 세 사람이 이런 부차적인 세부며 장식 문양을 색칠한다. 그래서 맡은 바 한 획 한 획을 그야말로 정성스럽게 그리는 것이다. 이게 지금 사람들이 도저히 못 미치는 점이다. 얼굴 데생은 그런 대로 엇비슷하게 할 수 있지만 이런 세부에 쏟아 붓는 정성이 훨씬 부족하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돗자리 세부

 

그런데 손은 좀 잘못 그렸다. 부채까지도 참 멋들어지게 그렸는데, 특히 부채 바깥쪽에 색을 좀 어둡게 칠해 가지고 도드라져 보이도록 서양화법으로 잘 그렸는데, 손을 못 그렸다! 우리나라 옛 그림이면 무조건 좋다, 훌륭하다고 국수주의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다. 이건 명백히 못 그렸다! 손은 서양 사람들이 잘 그리고 조각도 참 잘 만든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로댕의 <성당>이라는 작품을 보라. 그 손에는 거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해 전율이 느껴지는데, 사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참된 영혼은 그 뒷모습과 손 모양에서 더욱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초상화에서는 손이 왜 이렇게 기본 데생조차 어색하게 되었느냐 하면, 조선시대 화가는 초상화에서 밤낮 얼굴만 그려 봤지 손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사 작품 같으면 넓은 소매 속에 손을 넣어서 공손하게 맞잡은 형태로 그린다. 손을 그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님이 갑자기 부채를 하사하시는 바람에 손을 그리게 된 것이다. 평생 안 하던 일을 갑자기 하려니까 아무리 천하제일의 초상화가 이명기라 한들 그 손을 잘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손이라는 게 굉장히 그리기 어려운 섬세한 것이다. 아주 쩔쩔매었음이 그림에 보인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손 세부

 

이게 바로 우리나라 조선의 표구다. 사실 표구는 일본말이고 우리말로는 장황 裝潢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표구가 아예 한국말이 되어 사전에도 실려 있다. 점잖은 옅은 빛 옥색 천을 위 아래로 민패로 바르고 그림 주변에 화면과 같은 색 바탕을 좀 더 환한 띠로 둘렀을 뿐, 문양이란 일절 없다. 그러니까 저 주인공 초상화의 격이 은은하게 번져 나가면서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표구 위쪽에 주홍빛 유소 流蘇(끈을 말함)를 드리웠다. 정말 품격이 고상한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지금 당장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갖다 놓아도 이보다 더 고상한 디자인을 찾을 수 없을 게다. 이랬던 것을 화려한 일본 표구처럼 비단 모양으로 바글바글 난리법석을 치게 둘러 놓으면 그림보다 오히려 표구가 더 도드라져서, 속된 말로 개 꼬리가 흔드는 격이 되고 만다.

 

똑 같은 동아시아 국가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이렇게 다르다. 혹 어느 시골집 같은 곳에 갔는데 이런 표구가 되어  있는 그림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림은 거의 다 찢어졌다고 해도 그래도 귀중한 유이다! 그것도 100년이 더 된 오래된 유물,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옛날 분들이 어떻게 표구했는지 그 색조의 구성이며 좌우 비례조차 사실 정확히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표구 자체에도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표구를 포함한 전체 모습

 

아래 그림을 보니, 채제공 이분이 영의정이 되었다. 정조의 신임이 대단해서 좌의정 때도 3년간 영의정, 우의정 없이 독상 獨相을 지냈는데, 드디어 영의정이다. 그런데 작품을 보라! 제 아무리 영의정일지라도 사팔뜨기는 여전하다. 이렇게 진실, 참 [진眞]을 추구하는 회화 정신은 결코 흩어져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되자 그만 이 정신이 망가지고 말았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세부, 종이에 채색, 155.5x81.9㎝, 문화재청

 

이명기李命基(1770 전후~1848 이후). 호는 화산관華山館. 조선 후기 화원화가. 특히 초상에 뛰어났고, 인물과 바위 모습, 필법 등에서 단원 김홍도의 화풍을 많이 따르고 있다. 단편적으로나마 서양화법을 받아들인 흔적도 엿보인다. 주요 작품으로 <채제공 초상>외에 <서직수 초상>, <관폭도> 등이 있다.

 

※이 글은 오주석 지음,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2017,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9.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