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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경복궁' 해설

새샘 2019. 11. 21. 14:10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景福宮은 《시경》에 "군자경복君子景福"이란 구절에서 따온 말로서 "덕을 갖춘 군자는 큰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경복궁 안에 사는 '임금은 큰 덕을 갖추어야만 한다'라는 무언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청와대靑瓦臺라… 푸를 청, 기와 와, 높은 집 대, 글자를 모두 합하면 '푸른 기와를 얹은 높은 건물'이란 말이다.

외형에 대한 물질적 묘사만 있을 뿐,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서 왔을까?

미국 사람들이 그들 대통령 관저를 'White House', 즉 백악관白堊館('악'은 하얀 진흙이란 뜻)이라고 부르니까, 그걸 본받은 것이 아닐까?

한심한 게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다.

 

윗 그림 경복궁 근정문勤政門을 보면 음양오행 관념에 따라 정면 칸 수는 세 개, 즉 홀수로 되어 있다.

절의 대웅전이거나 권위 있는 건축들은 모두 중앙에 어칸[어칸御間]이 있고 좌우에 협칸이 있고 이런 식이다.

한가운데 어칸으로 임금이 드나든다.

 

 

경복궁 근정문의 동쪽(오른쪽)과 서쪽(왼쪽)의 작은 문인 일화문과 월화문

 

동편과 서편에 작은 문이 두 개 있어 신하들이 통행하는데, 동쪽 문은 봄에 해당되고 그래서 덕으로는 어질 인仁 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문신文臣들이 이리로 드나들었다.

서쪽 문은 가을에 해당되는데 가을은 죽이는 계절이다.

그래서 이리로 무신武臣들이 다녔다.
아래 그림에서 보면 
동쪽 문은 일화문日華이라고 쓰여 있다.

일화문이란 '해의 정화', 그러니까 '햇빛문'이라고 한글로 새길 수 있다.

그리고 서쪽 문은 월화문月華門, 즉 '달의 정화', '달빛문'이다. 참 예쁜 이름이다.

 

조선 궁궐의 현판 글씨는 모양이 다 이렇게 온화하고 점잖은 형태로 쓰여 있다.

글씨를 겉멋 위주로 쓰지 않고 그저 듬직하고 착실하게 쓴다.

역시 조선 문화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내부

 

근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사에 부지런히 힘쓰는' 근정전勤政殿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근정전을 보면 단청 장식을 했지만 이것도 알프스 기슭의 서양 봉건 영주들의 성들과 비교해 보면 일개 귀족의 응접실만큼도 화려하지 않다.

다만 군주로서 최소한의 위엄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만 했을 뿐이다.

 

아래는 단을 돋우고 위에서는 닫집을 내렸는데 가운데 용상龍床이 있다.

그리고 뒤에 병풍이 서 있다. 바로 위 사진에서와 같은 병풍이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이 병풍,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 앞에 앉는다.

TV 연속극에서 뒤에 이 병풍이 보이지 않은 사람은 조선왕이 아니다.

 

그러니까 대궐 안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능행차를 할 때도 따로 조그만 병풍을 휴대했다가 멈추기만 하면 이 병풍을 친다.

심지어는 돌아가셔도 관 뒤에다 이걸 친다.

그리고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를 건 뒤에도 ― 이를테면 태조 초상화를 모신 전주의 경기전 같은 곳 ― 반드시 이 병풍을 친다.

한마디로 <일월오봉병>은 조선 국왕의 상징이다.

그래서 궁중의 행사 내용을 그린 의궤儀軌 그림들에서 국왕이 차지한 자리에는 사람을 직접 그리는 대신, 바로 이 병풍만 그려 넣는다.

나쁜 사람이 임금 얼굴을 몰래 바늘로 콕콕 찌르거나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한데, 이 병풍이 왜 중요한가?

푸른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다.

그러니 현상이 아닌 원리를 말한 것이다.

해와 달은 음양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것은 오행을 상징하니까 도덕으로 말하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되고, 그 밖에 우리 전통문화의 모든 체계를 상한다.

하늘에서 햇빛이 내리고 달빛이 내리는 것은 햇빛문, 달빛문이 있는 근정전 출입문과 연관시키면 궁궐 건축의 평면 계획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햇빛과 달빛이 내리고 또 자애로운 비가 내려서 못물이 출렁거리는데, 하늘은 하나로 이어져 있고 땅은 뭍과 물, 둘로 끊어져 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데, 저 하늘에서 햇빛 달빛이 비치고 또 비가 내리면 만물이 자란다.

그 숱한 만물 가운데 대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음양오행의 가장 순수한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가장 슬기로울뿐더러 동물에게 없는 도덕심까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지인天地人 우주를 이루는 세 가지 재질인 삼재三才가 모두 갖추어진다.

 

삼재란 세 가지 재주가 아니다.

동양 철학에서 글자를 쓸 적에는 추상적으로 쓰기 위해 한자의 변을 떼는 관행이 있다.

그러니 삼재三材에서 나무 목木을 떼어버렸다.

이 삼재가 참 중요하다.

아침 일찍 임금이 일어나 깨끗이 씻고 옷차림을 갖추고 조정 일을 살피러 나와 가지고, 공손하니 빈 마음으로 여기 용상에 정좌를 하면 어떻 모양이 될까?

천지인, 석 삼三 자를 그은 정중앙에 이렇게 올곧은 마음으로 똑바로 섰을 때, 바로 임금 왕王 자가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주 한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큰 뜻을 세우는 순간, 천지인의 우주 질서가 바로잡힌다는 뜻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한자 해설 책을 보면 석 삼三 자는 우주의 삼재를 뜻한다는 설명이 있고, 임금 왕王 자는 그 삼재를 하늘로부터 인간을 거쳐 땅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관철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그 자체로는 미완성이다.

우주의 하늘, 자연과 땅이 드러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미완성인 것이다.

오직 자연의 섭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덕을 받들어 성실하게 행하는 착한 임금이 한가운데 앉을 때에만 이 그림의 뜻이 완성된다.

 

그럼, 임금은 어떤 뜻을 받들어야 할까?

하늘의 해와 달은 무슨 뜻일까?

약 6년 전에 음양오행을 모르고서는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끝에 《주역》 공부를 처음 시작했다.

처음 책 첫머리에서 하늘 괘 건乾과 땅 괘 곤坤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았는데, 그때 크게 놀랐다.

 

"천행天行이 건健하니, 군자 이以하여 자강불식自彊不息하나니라", 이런 글귀가 있다.

그 뜻은 '천체의 운행은 굳건하니, 군자는 하늘 위 천체의 질서 있는 움직임을 본받아 스스로 쉬지 않고 굳세게 굳세게 행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하늘의 해와 달이 지각하는 것, 본 적 있나요? 그것을 본받아 군자는 늘 옳은 일에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땅 또한 만만치 않다.

"지세地勢 곤坤이니 군자 이以하여 후덕재물厚德載物하나니라".

이것은 '땅에 펼쳐진 형세를 곤이라 하는데 ―영주 무량수전 앞에 소백산맥의 물결이 펼쳐진 것을 상상해 보라― 군자는 그 넓은 땅에 저렇게 두텁게 흙이 쌓여 있듯이 자신의 덕을 깊고 넓게 쌓아서, 온 세상 모든 생명체를 하나같이 자애롭게 이끌어 나간다'는 뜻이다.

정말 큰 글이 아닐 수 없다!

 

일월오봉병, 작가 미상, 종이에 채색, 162.6×337.4㎝, 삼성미술관 리움

 

<일월오봉병>에 담긴 깊은 뜻을 간추려 보자.

하늘에 해와 달, 땅에는 뭍과 물, 그리고 좌우에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붉은 소나무 두 그루와 두 갈래로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가 있다.

중간에 다섯 봉우리가 층을 이루며 대칭으로 우뚝 서 있다.

해는 양, 달은 음이다.

도덕적으로 말하면 해는 아버지처럼 굳세고 일관되게 나아가는 덕이요, 달은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덕스러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상이다.

아래에 다섯 봉우리가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저 산처럼 두텁게 쌓아 올린 다석 가지 덕을 상징한다.

여기서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듯이 두 갈래 폭포가 힘차게 떨어진다.

아래 못에서는 물보라가 탕탕 퉁기면서 생기 넘치게 일어나고 있다.

좌우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상서로운 소나무가, 붉은빛 푸른빛으로 찬란히 빛난다.

 

<일월오봉병>의 붉은 나무와 검은 물을 볼 때마다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뮐쌔 / 곶 됴코 여름 하나니 /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조선을 건국하면서 가졌던 우리 선인들의 장엄한 이상이 이 병풍 그림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 옛 문화는 이렇듯 심오하고도 빼어난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오주석 지음,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2017,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1. 2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