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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0 -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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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0 -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1

새샘 2019. 11. 30. 18:07

<한의 영역 및 중심지 변천>



1. 들어가며


고조선시대부터 열국시대까지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을 고찰해보자.

먼저 이 글에서는 한의 영역 변천을 고찰한 다음, 다음에 올릴 글에서는 한의 중심지 변천 고찰하게 될 것이다.


한은 원래 고조선에 속해 있었던 거수국이었으나 고조선이 붕괴하자 독립국이 되었다.

한은 고조선 말기부터 독립국이 된 이후까지 영역領域[강역疆域]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이러한 강역의 변화에 따라 도읍도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런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한을 삼한三韓이라 불렀으나 그것은 잘이다.

왜냐하면 한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인『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동이전」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와 더불어 그 이름이 한韓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

중국 진秦나라의 망명인들은 자신들이 망명해 살고 있는 한을 한국韓國으로 부르며,

마한馬韓은 한국의 일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삼국지』「동이전」<한전>에도 실려 있다.

『삼국지』「동이전」<왜전>에도 낙랑군에서 왜에 이르는 항로를 말하면서 한국을 거친다고 하여

삼한이라 부르지 않고 한국이라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한의 이름이 삼한이 아니라 한 또는 한국이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한을 삼한이라 부르면 한 지역에 3개의 나라가 있었던 것 같은 분열의식을 심어주게 한다.

일제는 한민족에게 분열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삼한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은 고조선시대부터 오늘날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 말기에 고조선 서부인 오늘날 요서 지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었다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은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인 부여·고구려·숙신·옥저·예·낙랑 등은 그들의 거주지를 잃고

동쪽으로 이주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한은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소용돌이는 한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고조선 말기에 한의 영역이 줄어든 것이라든가

한이 독립국이 된 뒤 오래지 않아 신라·백제·가야 등으로 분열된 것 등은 그러한 소용돌이의 연쇄현상이었다.


그러므로 한의 독립과 변천은 그 자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고조선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전개라는 상황 변화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2. 한의 영역 변천


1) 고조선시대


고조선시대에 한의 영역은 오늘날 청천강을 북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 남부해안에 미쳤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시대에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마한>조에는,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기자)조선을 공격하니 (기자)조선 왕 준準은 주위의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의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했다."는 내용을 전하고는

이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석에서, 고구려가 마한을 병합했으므로 고구려를 마한이라 한 것이며,

고구려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으므로 마한이라 이름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위지는『삼국지』<위서魏書>를 말하는데 그곳에는, "제후 준은 외람되게 왕이라 칭하다가

연燕의 망명인인 위만의 공격을 받아 정권을 빼앗기고 좌우의 궁인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했으나 그 후손은 끊겨 없어졌다."고 기록되어있다.


『삼국유사』<마한>조에서는 준이 마한을 건국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그보다 가치가 높은 『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준이 한 지역으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다가 그 후손이 끊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한이나 마한이라는 이름은 준이 망명하기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마한>조에 최치원이 말한 내용에 대한 저자의 주석에서 마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마한은 고구려에 병합되었는데 그곳에 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동사강목東史綱目』<삼한>조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그곳에는 읍산이 마읍산馬邑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현재 통용되고 있는『삼국유사』<마한>조에는 마馬 자가 탈락되어

마읍산이 읍산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삼국유사』<마한>조에 나오는 읍산을 마읍산으로 고쳐 읽고 있다.

따라서 마읍산이 있었던 곳이 마한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읍산은 오늘날 평양 지역에 있었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조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한 사실을 말하면서,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격파한 뒤 마읍산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패강은 오늘날 대동강이고 평양성은 고구려 말기의 도읍으로서 오늘날 평양이었다.

그러므로 소정방이 빼앗은 마읍산은 대동강 유역, 오늘날 평양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읍산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던 시기

준이 위만에게 정권을 빼아식고 한 지역으로 망명했던 시기이므로 서기전 190년 전후가 된다.

서기전 190년 전후는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위만조선이 건국되었지만,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는 아직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던 고조선 말기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으로서 한에 속해 있었던 시기는 고조선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음은『제왕운기』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왕운기』<고구려기>에는 '고구려는 마한의 왕검성에서 나라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오늘날 서경이다'라고 주석했다.

『제왕운기』가 서술된 고려시대의 서경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오늘날 평양이었다.


고구려가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여러 문헌을 통해서 확인될 뿐만 아니라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고구려가 평양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 기록은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을 알게 해 준다.

즉 앞의 『삼국유사』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들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한은 오늘날 평양 지역을 포괄하고 있어

그 북쪽 경계가 오늘날 청천강 유역에 이르렀음을 알게 해 준다.


2) 열국시대 개시기


그런데 고조선이 붕괴되면서 독립국이 된 한은 그 북쪽 경계가 대동강 유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런 상황은『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서 확인되는데, 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다.

낙랑이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낙랑이 최씨낙랑국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 위치가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은 대동강 남쪽에 있었을 알 수 있다.


『후한서』는 동한시대 상황을 알려주는 역사서인데 중국 동한시대(25~220년)는

고조선이 붕괴된 뒤로서 열국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한의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든 것은 고조선의 붕괴와 더불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낙랑은 원래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오늘날 난하 동부 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낙랑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자 그 지배층과 주민 일부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했는데 고조선이 붕괴되자 최씨낙랑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한은 대동강 이북 지역을 최씨낙랑국에게 양보하고 그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한이 강역의 일부를 최씨낙랑국에게 양보한 데는 함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는 동류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3) 열국시대 초기


한은 독립국이 된 뒤 또 한 번의 강역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런 상황은『삼국지』「동이전」<한전>에 보인다. 즉,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지어 있고 남쪽은 왜와 접하여 사방으로 4천 리 가량 되었다."

라고 하여 한의 북쪽에 대방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전에는 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었는데 이제는 대방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최씨낙랑국은 대방국과 함께 300년에 신라에 투항하면서 멸망했다.

그러므로 대방국은 최씨낙랑국보다 늦게 건국되어 멸망할 때까지 그 남쪽,

오늘날 황해도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국이 있었던 시기 한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 황해도 남부이거나 그 남쪽어야 한다.

아마도 오늘날 멸악산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대개 험준한 산맥이나 강을 국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방을 한사군의 낙랑군을 분할하여 설치했던 대방군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이다.

이 대방은 대방군과는 다른 대방이었다.


대방국은 그 이름이 대방군과 같았던 것으로 보아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의 대방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건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는 동한의 뒤를 이은 중국의 삼국시대(220~266년)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220년부터 279년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앞의『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 기록된 것보다 늦은 시기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씨낙랑국과 대방국의 건국으로 인한 한의 강역 변화는 한의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었으나

한은 내부 요인으로 인한 영역의 변화도 맞게 되었다. 그것은 신라·백제·가야의 건국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신라·백제·가야는 한에 속해 있었던 거수국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독립성을 띠고 영역을 확대하게 됨에 따라 한의 강역은 줄어들게 되었다.


그 강역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신라·백제·가야의 건국 과정을 보자.


신라新羅는 진한辰漢의 여섯 부部가 중심이 되어 서기전 57년(서한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면서 출발했다.

서나벌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야벌徐耶伐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서나·서라·서야는 사로斯盧·사라斯羅·신라 등과 같은 말로서 음을 달리 표기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진한은 한의 일부로서 오늘날 경상북도 지역이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진한과 변한 지역에 있었던 24개 거수국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다. 이것은 신라가 원래 한의 거수국이었던 사로(신라)가 독립국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독립하여 그 영역을 확대함에 따라 한의 동부 영토가 축소되는 상황이 일어났은 당연하다.


백제百濟도 원래 한의 거수국이었다.

백제는 서기전 18년(서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건국되었는데,

온조왕은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도읍을 하남위례성으로 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산은 오늘날 북한산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도읍이었던 하남위례성은 오늘날 한강 남부 유역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13년>조에는, "가을 7월에 한산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고 마한에 사신을 보내 천도할 것을 고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14년>조에는,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시기는 온조왕 14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남위례성에 정식으로 도읍하기 전 백제는 일시 한강 북쪽 어느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곳은 오늘날 임진강 유역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의 북쪽 국경은 멸악산맥이었으므로 임진강 유역은 한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한의 북부 변경에서 건국되었던 것이다.

백제가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한의 양해 아래 이루어졌으며 백제는 초기에 한의 거수국으로 있었다.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 한에는 모두 78개의 국(거수국)이 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든가,『삼국지』「동이전」<한전>에 기록된

마한 지역에 있었던 한의 50여 개의 거수국 이름 가운데 백제가 보이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백제는 오래지 않아 독립국으로 출발하여 한의 영토를 침범했다.

이에 따라 한의 북부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가야 또한 한의 거수국으로 출발한 국가였다.

가야는 42년(동한 세조世祖 광무제 건무建武 18년)에 건국되었다.

가야에는 여섯 가야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수로왕의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영역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고『삼국유사』「기이」<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가야 건국자로 전해오는 수로왕의 능은 오늘날 김해시에 있다.

그리고 황산강에 대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해도호부 동쪽 40리의 양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 일부

이르는 이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가야 지역은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북으로 가야산, 서북은 지리산을 경계로 한

오늘날 경상남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지역은 한의 변한 지역이었다.


가야加耶·伽耶·伽倻는 구야狗邪·拘邪 또는 가라加羅 또는 가량加良 또는 가락駕洛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삼국지』「동이전」<한전>에 실린 변한과 진한 지역에 있었던 한의 24개 거수국 이름 가운데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이 보인다. 변진구야국은 바로 가야국을 말한 것이다.

이 기록들은 가야가 원래 변한(변진) 지역에 있었던 한의 거수국으로 출발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가야가 독립국이 되어 영역을 확대하게 되자 한의 동남부 영토는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4) 한의 영역 변천 결론


이상과 같이 한은 고조선 말기에 그 북부 지역에 최씨낙랑국과 대방국이 건국되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두 번에 걸쳐 영역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고조선이 붕괴되고 한이 독립국이 된 뒤에는 그의 거수국이었던

신라·백제·가야가 독립하는 내부적인 요인에 따라 다시 영토의 변화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토 변화는 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진서晉書』「동이열전」<마한전>과 <진한전>에는 마한과 진한이 277년·280년·281년·286년·287년·289년·

290년에 중국의 서진西晉(265~316년)에 사신을 보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3세기 말까지 한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1. 3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