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0 -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1 본문
<한의 영역 및 중심지 변천>
1. 들어가며
고조선시대부터 열국시대까지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을 고찰해보자.
먼저 이 글에서는 한의 영역 변천을 고찰한 다음, 다음에 올릴 글에서는 한의 중심지 변천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한은 원래 고조선에 속해 있었던 거수국이었으나 고조선이 붕괴하자 독립국이 되었다.
한은 고조선 말기부터 독립국이 된 이후까지 영역領域[강역疆域]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이러한 강역의 변화에 따라 도읍도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런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한을 삼한三韓이라 불렀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한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인『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동이전」에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와 더불어 그 이름이 한韓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
중국 진秦나라의 망명인들은 자신들이 망명해 살고 있는 한을 한국韓國으로 부르며,
마한馬韓은 한국의 일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삼국지』「동이전」<한전>에도 실려 있다.
『삼국지』「동이전」<왜전>에도 낙랑군에서 왜에 이르는 항로를 말하면서 한국을 거친다고 하여
삼한이라 부르지 않고 한국이라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한의 이름이 삼한이 아니라 한 또는 한국이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한을 삼한이라 부르면 한 지역에 3개의 나라가 있었던 것 같은 분열의식을 심어주게 한다.
일제는 한민족에게 분열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삼한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한은 고조선시대부터 오늘날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 말기에 고조선 서부인 오늘날 요서 지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었다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은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인 부여·고구려·숙신·옥저·예·낙랑 등은 그들의 거주지를 잃고
동쪽으로 이주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한은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소용돌이는 한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고조선 말기에 한의 영역이 줄어든 것이라든가
한이 독립국이 된 뒤 오래지 않아 신라·백제·가야 등으로 분열된 것 등은 그러한 소용돌이의 연쇄현상이었다.
그러므로 한의 독립과 변천은 그 자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고조선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전개라는 상황 변화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2. 한의 영역 변천
1) 고조선시대
고조선시대에 한의 영역은 오늘날 청천강을 북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 남부해안에 미쳤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시대에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마한>조에는,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기자)조선을 공격하니 (기자)조선 왕 준準은 주위의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의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했다."는 내용을 전하고는
이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석에서, 고구려가 마한을 병합했으므로 고구려를 마한이라 한 것이며,
고구려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으므로 마한이라 이름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위지』는『삼국지』<위서魏書>를 말하는데 그곳에는, "제후 준은 외람되게 왕이라 칭하다가
연燕의 망명인인 위만의 공격을 받아 정권을 빼앗기고 좌우의 궁인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했으나 그 후손은 끊겨 없어졌다."고 기록되어있다.
『삼국유사』<마한>조에서는 준이 마한을 건국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그보다 가치가 높은 『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준이 한 지역으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다가 그 후손이 끊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한이나 마한이라는 이름은 준이 망명하기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마한>조에 최치원이 말한 내용에 대한 저자의 주석에서 마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마한은 고구려에 병합되었는데 그곳에 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동사강목東史綱目』<삼한>조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그곳에는 읍산이 마읍산馬邑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현재 통용되고 있는『삼국유사』<마한>조에는 마馬 자가 탈락되어
마읍산이 읍산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삼국유사』<마한>조에 나오는 읍산을 마읍산으로 고쳐 읽고 있다.
따라서 마읍산이 있었던 곳이 마한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읍산은 오늘날 평양 지역에 있었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조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한 사실을 말하면서,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격파한 뒤 마읍산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패강은 오늘날 대동강이고 평양성은 고구려 말기의 도읍으로서 오늘날 평양이었다.
그러므로 소정방이 빼앗은 마읍산은 대동강 유역, 오늘날 평양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읍산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던 시기는
준이 위만에게 정권을 빼아식고 한 지역으로 망명했던 시기이므로 서기전 190년 전후가 된다.
서기전 190년 전후는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위만조선이 건국되었지만,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는 아직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던 고조선 말기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으로서 한에 속해 있었던 시기는 고조선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음은『제왕운기』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왕운기』<고구려기>에는 '고구려는 마한의 왕검성에서 나라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오늘날 서경이다'라고 주석했다.
『제왕운기』가 서술된 고려시대의 서경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오늘날 평양이었다.
고구려가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여러 문헌을 통해서 확인될 뿐만 아니라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고구려가 평양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 기록은 오늘날 평양 지역이 마한에 속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즉 앞의 『삼국유사』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들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한은 오늘날 평양 지역을 포괄하고 있어
그 북쪽 경계가 오늘날 청천강 유역에 이르렀음을 알게 해 준다.
2) 열국시대 개시기
그런데 고조선이 붕괴되면서 독립국이 된 한은 그 북쪽 경계가 대동강 유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런 상황은『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서 확인되는데, 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다.
낙랑이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낙랑이 최씨낙랑국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 위치가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은 대동강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는 동한시대 상황을 알려주는 역사서인데 중국 동한시대(25~220년)는
고조선이 붕괴된 뒤로서 열국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한의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든 것은 고조선의 붕괴와 더불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낙랑은 원래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오늘날 난하 동부 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낙랑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자 그 지배층과 주민 일부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했는데 고조선이 붕괴되자 최씨낙랑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한은 대동강 이북 지역을 최씨낙랑국에게 양보하고 그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한이 강역의 일부를 최씨낙랑국에게 양보한 데는 함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는 동류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3) 열국시대 초기
한은 독립국이 된 뒤 또 한 번의 강역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런 상황은『삼국지』「동이전」<한전>에 보인다. 즉,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지어 있고 남쪽은 왜와 접하여 사방으로 4천 리 가량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