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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1 -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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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1 - 한韓의 독립과 영역 변천2

새샘 2019. 12. 3. 18:33

                                                               <한의 영역 및 중심지 변천>




3. 한의 중심지 변천


앞 글에서 고찰한 것처럼 한의 영역에 변화가 일어났다면 한의 중심지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중심지는 도읍都邑이었다. 도읍은 그 나라의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중심지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한의 도읍지가 한 곳 뿐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한의 도읍지를 각각 목지국目支國과 월지국月支國이었다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한의 도읍지를 한 곳으로 보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앞의 두 중국 사서에 실린 한에 관한 내용은 많은 부분이 같기 때문에 그 도읍에 관한 기록도 같을 것으로 보고, 월月 자와 목目 자 가운데 어느 하나가 잘못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즉 목 자와 월 자는 문자 형태가 비슷하여 그것을 옮겨 베끼는 과정에서 잘못되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위 두 사서의 기록 가운데 어느 한쪽이 잘못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사료를 취사선택했다. 그 결과 신채호와 정인보 등은 월지국이 옳을 것으로 본 반면 그 외의 대부분 학자(이병도, 천관우, 김정배 등)들은 목지국이 옳을 것으로 보았다.


한의 도읍을 목지국으로 보든 월지국으로 보든 지금까지는 한의 도읍은 한 곳이었을 것이라는 관점을 견해왔다. 그런데 기본사료에는 목지국과 월지국이 모두 한의 도읍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목 자와 월 자가 형태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두 기록 가운데 어느 한쪽은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사료를 비판하거나 선택할 때는 항상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목지국과 월지국 두 곳이 모두 도읍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목지국과 월지국은 같은 곳을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으로서 두 곳 모두 한의 도읍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우선 한에 대한 기본 사료인『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동이전」<한전>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자. 한의 도읍에 관한 『후한서』「동이열전」<한전>을 보면,


"한에는 세 종족이 있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 (한 가운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한의) 제국왕諸國王의 선조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다음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로 마한·진한·변진 등 한韓 전 지역을 마한의 진왕이 다스렸으며, 둘째로 그 도읍지가 목지국에 있었고, 셋째로 한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왕들은 모두가 마한 사람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 3가지 사실에서 2가지 결론이 내려진다. 첫째는 한에는 많은 국이 있었고 각 국에는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한에 있었던 여러 국 전체를 통치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던 왕이 진왕이었으며 그 진왕의 도읍지가 목지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에 있었던 여러 국을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고, 한을 이러한 여러 국이나 정치집단의 연맹체로 이해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러한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한은 고조선시대에 그 거수국이었으며 고조선이 붕괴된 뒤에는 독립국이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한에 있었던 여러 국들은 독립국이 된 한의 거수국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며 목지국은 도읍이 아니라 진왕의 직할국이었으며 한의 도읍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의 도읍에 대해『삼국지』「동이전」<한전>은 『후한서』의 기록과 다르게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한韓 안에서 마한 지역에는 모두 50여 국, 변한과 진한 지역에는 24국이 있었다고 전하면서,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 변한과 진한의 합계가 24국이 된다. 그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진왕은 한 전체를 통치한 것이 아니라 마한에 있는 월지국과 변한과 진한에 있었던 24개 국 가운데 12개 국 정도를 통치했다는 것이 된다. 이 인용문 내용을 좀 융통성 있게 해석한다면 마한 지역은 월지국뿐 아니라 그 주변 지역까지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진왕은 한 전체를 통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에는 진왕이 한 전체를 통치했으며 도읍은 목지국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삼국지』에는 진왕이 한의 일부만을 통치했으며 도읍은 월지국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후한서』와『삼국지』는 같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후한서』와『삼국지』는 같은 시대의 역사서가 아니라는 점이다.『후한서』는 23년부터 220년까지의 동한시대에 관한 역사서이고『삼국지』는 220년부터 279년까지의 동한의 뒤를 이은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서로서『후한서』가 『삼국지』보다 앞선 시대에 관한 역사서이다. 그러므로『후한서』와『삼국지』의 내용 차이는 그 사이의 상황 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한서』에는 진왕이 한 전체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삼국지』에는 진왕이 한의 일부만을 통치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사이에 한의 강역에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한의 도읍지가 목지국과 월지국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강역의 변화와 더불어 도읍이 이동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삼국사기』에 보인다.『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26년>조에 서기 8년 마한은 백제에게 넓은 땅과 국읍을 빼앗겼고, 그다음 해인 9년 <시조 온조왕 27년>조에 백제에게 마한은 멸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8년에 마한에게서 백제가 빼앗은 국읍은 마한에 있던 어느 거수국의 치소를 말한 것인지 마한에 있었던 한의 도읍을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9년에 마한은 멸망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마한이 그 도읍을 백제에게 빼앗겼던 것 같다. 그런데 23년 이후의 상황을 전하는『후한서』와 『삼국지』기록에 마한이 여전히 등장하고 있으며,『진서』「동이열전」<마한전>에는 마한이 277~290년 기간 동안 중국 서진에 사신을 보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마한은 9년에 멸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편찬자들은 마한에 있었던 한의 도읍 목지국을 백제가 병합한 사실을 마한이 멸망한 것으로 표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은 마한 지역의 북부를 잃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한은 마한의 북부 지역과 그 도읍을 백제에 빼앗기고 남쪽으로 천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삼국지』「동이전」<한전> 기록에 한의 진왕이 다스린 영토가 줄어들어 있고 도읍도 월지국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말한 것이다.


이 시기에 한은 백제에게 마한의 북부를 빼앗겼고 진한과 변한 지역에서는 신라와 가야가 독립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은 마한 지역뿐 아니라 진한과 변한 지역의 영토도 줄어들었을 것이다.『삼국지』「동이전」<한전>에 진왕이 마한 지역의 월지국과 진한과 변한의 24국 가운데 12국만을 통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일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었을 테지만『삼국지』「동이전」<한전>의 기록은 그 가운데 어느 한 시기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동이전」<한전>에 한에 78국이 있었다고 말하고 그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는데,『삼국지』는 3세기에 편찬되었으므로 이것은 3세기의 한반도 남부 상황을 말한 것이라 믿는 학자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한에 78국이 있었다는 것은 3세기 이전의 상황을 말한 것이며 당시에 한의 진왕은 그 가운데 12국 정도를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삼국지』「동이전」<한전>은 나머지 66국 지역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삼국사기』와『삼국유사』기록에 따르면 그 지역은 백제·신라·가야의 영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삼국사기』에 따르면 9년에 한은 백제에게 마한 북부와 도읍을 빼앗겼으므로 이 시기에 도읍을 목지국에서 남쪽의 월지국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사실이 훨씬 후대에 관한 역사서인『삼국지』에 기록된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삼국지』「동이전」에 있는 기록처럼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중국인들은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그 사건이 일어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의 강역 변화와 도읍 이동에 관한 사실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중국인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변화가 일어난 연대는 우리 역사서인『삼국사기』기록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목지국과 월지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를 밝힐 수 있는 분명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목지국과 월지국을 같은 곳으로 보면서도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나왔다. 전북 익산, 충남 직산·공주·예산, 경기 광주, 인천 등이 그것이다.


(1) 전북 익산


전북 익은 일찍이 조선시대 신경준·정약용·한진서 등목지국으로 추정했는데 그것은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긴 준왕이 금마군金馬郡으로 망명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제왕운기』에 준왕이 망명한 곳은 금마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금마군을 오늘날 전북 익산군 금마면 일대로 본 것이다. 금마라는 같은 이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준왕의 망명지를『삼국유사』에서는 오늘날 평양 지역으로 말하고 있고『제왕운기』도 오늘날 평양 지역을 마한으로 말한 것으로 보아 준왕이 망명했다는 금마군을 오늘날 전북 익산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익산이 일찍부터 한의 도읍지로 추정되어왔고 그 지역에서 청동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는 것은 관심을 갖게 한다. 익산군의 금마면과 왕궁면의 접경 지역인 용화산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고 금마면의 미륵산에서는 중국 전국시대의 동검인 도씨검桃氏劍이 출토되었다. 금마면 오금산에서는 조문동경粗文銅鏡과 세형동검이 출토되었고 금마면과 접한 팔봉면에서도 세형동검 조각을 포함한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익산군 삼기면에서는 중국 동한시대의 동검이 출토되었다.


고대사회에서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으므로 지역에서 이런 청동 유물이 출토된다는 것은 이 지역이 고대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런 점을 근거로 익산군의 금마면·왕궁면·팔봉면·삼기면 지역을『삼국지』「동이전」<한전>에 기록된 여러 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지역을 건마국으로 본 것은 전통적 견해이긴 하지만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이곳이 건마국이었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변하지 않고 계속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전북 익산 지역이 고대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2) 충남 직산


충남 직산이병도 목지국으로 상정했다. 직산은 원래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위례성으로 전해왔으나 정약용과 한진서가 이를 부정했다. 이병도는 목지국의 위치를 고증하면서 당시 한의 위치로 보아 그 도읍지는 한강 이남의 서해안 지역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 지역에서 역사상 옛 도시로 전해오는 광주·직산·공주·부여·익산 등에 주목했다. 그런데 익산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고, 광주는 백제 초기의 도읍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된 곳이며, 공주와 부여는 백제 후기의 도읍지였으므로 이곳들은 일단 문제 밖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는 직산 지역이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건이 좋은 곳으로서 아산만에 접하여 고대에는 교통도 편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도하리·안궁리·평궁리·신궁리 등의 도읍이나 궁궐을 연상하게 하는 지명들이 많은 데 주목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이병도는 직산 지역이 백제의 도읍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백제 이전 오랜 역사를 가진 한강 이남 제1의 고도古都로서 마한의 목지국이었을 것으로 상정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후에 부회와전附會訛傳(말을 억지로 끌어붙여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서 사실과 다르게 전함)되어 직산 지역이 백제의 도읍이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았다.


직산 지역은 지리적으로 보아 한 가운데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마한의 중심지이고 자연환경이나 지명 등이 고대사회의 정치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익산과 더불어 한의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 가운데 하나이다.


(3) 충남 공주


충남 공주 지역신채호한의 도읍지로 추정했다. 그 근거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백제는 온조왕 13년에 그 영토가 남쪽으로 웅천熊川 에 이르렀다는 기록에서 찾았다. 웅천은 오늘날 공주이므로 한의 도읍인 월지국(신채호는 한의 도읍지 이름을 월지국으로 보았다)은 대략 공주 부근일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견해는 추측일 뿐이며 더욱이 이곳에 등장하는 웅천을 안성천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신채호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4) 충남 예산


충남 예산 지역김정배한의 도읍지로 추정했다. 청동기유적과 유물이 서해안을 따라 충청도 일원에 많은데 그 중심이 예산 지역이며, 예산은 평야지대일 뿐만 아니라 문헌에 나타난 마한 50여 국의 기록 순서에 따르면 목지국의 위치가 대체로 충청남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적과 유물은 계속 발견될 것이므로 지난날의 출토 상황만을 근거로 예산을 마한의 중심지로 잡는 것은 다소 성급한 판단이다. 그리고 목지국의 위치를 충남의 넓은 지역 가운데 예산으로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예산 지역이 목지국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좀더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5) 경기 광주


경기 광주정인보한의 도읍지로 추정했다.『삼국지』「동이전」<한전>에 한의 도읍지가 월지국(정인보는 신채호처럼 한의 도읍지를 월지국으로 보았다)으로 나오는데『삼국지』가 편찬된 시기는 마한이 이미 백제에게 멸망한 뒤이므로『삼국지』편찬자는 백제 위례성을 한의 월지국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보았다. 위례慰禮와 월지月支는 같은 뜻을 지닌 말로서 백제 위례성(하남위례성)은 오늘날 경기 광주 지역이었으므로 한의 월지국도 같은 지역이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백제본기」기록에 따르면 8년(온조왕 26년)에 한은 마한 지역에 있었던 도읍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한이 도읍 지역을 백제에게 빼앗길 당시 백제 도읍은 하남위례성이었다. 따라서 하남위례성과 한의 도읍이 같은 곳일 수는 없다. 경기 광주는 한의 영토 가운데 너무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 광주를 한의 도읍 지역으로 보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6) 인천


인천천관우한의 도읍지로 추정했다. 그는『후한서』와『삼국지』<한전>에 기록된 진왕이 한을 다스렸다는 내용을 부인했다. 그리고 한에는 두 진왕이 있었다고 보고 마한의 진왕은 백제 고이왕이며 진한·변한의 진왕은 신라 첨해 이사금으로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고이왕을 진왕이라 부른 것은 백제가 옛 진국辰國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옛 진국 지역의 왕'이라는 뜻이며, 신라 첨해 이사금을 진왕이라 부른 것은 신라가 진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진한 지역의 왕'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한의 진왕인 고이왕은 온조계가 아닌 비류계로서 오늘날 인천을 중심으로 백제 전 지역을 통치했다고 보고 목지국은 오늘날 인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천관우의 주장은 처음부터 기본사료의 내용을 무시하고 지나친 상상력에 의하고 있다. 분명한 근거 없이 한의 진왕을 부인하고 훨씬 후대인 백제 고이왕시대로 시기를 낮춘 것이라든가 미추와 목지가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인천이 목지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그리고 백제가 옛 진국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고이왕을 진왕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도 성립할 수 없다.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진국은 백제 지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청천강까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 종합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한의 도읍지로 추정했던 곳들을 소개하고 한의 도읍지가 될 가능성 여부를 고찰해보았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지역들 가운데 어느 곳도 한의 도읍지로 확정지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따라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잠정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 가운데 한의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을 골라보면 충남 직산 지역과 전북 익산 지역이 된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이 두 곳을 한의 도읍지로 인정하고자 한다.


앞에서 한이 도읍을 목지국에서 월지국으로 옮겼을 것으로 본 바 있다. 그러한 천도는 백제가 성장하면서 한의 북부를 잠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제는 원래 한의 북쪽에 있었던 거수국이었다. 따라서 한의 천도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의 첫 번째 도읍지였던 목지국은 충남 직산이었고, 그다음 도읍지인 월지국은 전북 익산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음 기록도 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24년>조(6년으로 백제가 목지국을 차지하기 3년 전)에 백제가 웅천책熊川柵을 세운 데 대해 마한왕(한왕)이 크게 노한 것이라든가 이 사건이 있은지 3년 뒤에 백제가 목지국 지역을 차지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웅천책은 한의 도읍인 목지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웅천의 위치를 알면 목지국의 위치를 대략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웅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채호는 오늘날 공주로 보았고 이병도는 오늘날 안성천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병도는 안성천 유역의 안성군 공도면孔道面 웅교리熊橋里(속칭 고무다리)가 있고 안성천 하류에는 평택의 군물진軍勿津(군문리진軍門里津 또는 군문이나루)이 있는데 공孔·웅熊·고무·군물軍勿·군문軍門 등은 한국 고대어에서 곰을 뜻하는 고마·개마·곰의 이사異寫(같은 뜻을 가진 다른 말)일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보아 웅천은 안성천일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러한 이병도의 견해에 따르고자 한다. 따라서 목지국은 안성천에서 가까운 직산 지역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마치며


지금까지 한의 독립과 영역 변천 및 그에 따른 도읍의 이동을 살펴보았다. 한의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오늘날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에 오늘날 요서 지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영토를 확장하자 그 지역에 있었던 낙랑 주민 가운데 일부가 거주지를 잃고 오늘날 평양 지역으로 이주하여 최씨낙랑국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한의 강역은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낙랑 남부의 대방 지역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대방국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한의 강역은 오늘날 멸악산맥 이남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한의 강역 변화는 외부의 영향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북부의 국경을 남쪽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한은 고조선의 붕괴로 말미암아 독립국이 된 뒤에도 커다란 강역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것은 신라와 백제 및 가야의 건국과 영토 확장 때문이었다. 이들은 원래 한의 거수국들이었는데 한이 독립국이 된 뒤 오래지 않아 이들도 독립국으로 출발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이렇게 되자 한의 영토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서기전 57년에 한의 동부인 진한 지역, 즉 오늘날 경주에서 건국되어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따라 한의 동부 영토가 줄어들었다. 백제는 한의 서북부인 마한의 북부, 즉 오늘날 임진강 유역에서 건국한 뒤 얼마 안 되어 한강 남부 유역으로 도읍을 옮기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따라 한의 북부 영토가 줄어들었다. 가야는 한의 동남부인 변한 지역, 즉 오늘날 김해에서 건국되어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따라 한의 동남부 영토가 줄어들었. 이렇게 되어 한의 영토는 그 서남부 지역으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는 한의 진왕이 한 전체를 통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한의 진왕이 한의 일부만을 통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한의 강역이 변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은 강역이 변화됨에 따라 도읍을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의 도읍은 마한 지역에 있었는데 백제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의 도읍 지역을 차지하자 한은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한의 도읍이『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는 목지국으로 기록되어 있고,『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월지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한의 도읍이 목지국에서 월지국으로 이했음을 말해준다. 한이 목지국에서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8년(백제 온조왕 26년)이었다.


지금까지는 목지국과 월지국은 한 곳으로서 그 첫 자인 월 자와 목 자는 같은 문자였을 것인데 기록 과정에서 다른 문자로 잘못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의 도읍이었던 목지국과 월지국의 위치를 고증할 만한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와 전설 등을 참고해볼 때 목지국은 오늘날 충청남도 직산 지역으로, 월지국은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 지역으로 추정된다. 한은 3세기 말 무렵 멸망할 때까지 계속 영토가 줄어들었으므로 목지국과 월지국 외에도 그 말기의 임시 도읍이 전라남도 지역에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2. 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