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8 - 가야의 건국과 체제2: 성장과 멸망 본문
4. 가야 국가의 성장
한의 변한 지역 세력이 성장하여 가야가 건국됐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가야의 뿌리는 변한이며, 가야는 가라加羅·가량加良·가라訶羅·가라呵囉·가락伽落·가락駕洛·가야加耶·
가야伽倻·임나가라任那加羅·임나가량任那加良·아라阿羅·아야阿耶·아나阿那 등으로 표기되었다.
『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진한과 변한 지역에 모두 24개의 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나라 이름들 가운데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과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 보인다.
구야국과 안야국은 그 음이 비슷하니 가야의 전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삼국유사』<가락국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에서 태어난 6명의 동자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난 수로는 대가락(또는 가야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나머지 5명은 다섯 가야의 주主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가야의 통치자들은 왕이 아니라 주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들과 수로왕 사이에는 지위에 차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로왕은 다섯 가야의 주들보다 먼저 태어났으므로 이들의 큰형으로서
대가야 왕실은 다섯 가야 주실主室의 종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가야의 성격을 여섯 가야가 연맹을 형성한 연맹체로 여겨왔으나
연맹체라는 용어는 여섯 가야가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는 연맹체란 이름을 붙이기에 적합하지 않다.
수로왕의 대가야를 포함한 여섯 가야는 모두 가야라는 같은 나라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야라는 한 나라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가야의 수로왕은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다른 다섯 가야의 통치자들은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차등관계를 인정한 것은
다섯 가야가 대가야의 통치 아래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섯 가야의 주들은 대가야 왕실을 그들의 종가로 받을었을 것인데,
이것은 중국 주나라의 봉국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종법제宗法制와 비슷하다.
다섯 가야의 주들은 고조선이나 한韓에 있었던 거수渠帥와 같은 지위로서
대가야의 수로왕을 그들 공동의 군주로 받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가야의 국가 성격은 한의 통치체제를 이은 것으로
왕 밑에 거수와 같은 주主가 있는 형태의 봉국제封國制 국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가야五伽耶>조에서는 다섯 가야의 이름으로
아라가야阿羅伽耶·고령가야古寧伽耶·대가야大伽耶·성산가야星山伽耶·소가야小伽耶 등을 소개하면서,
5가야에 대한 주석에는 위의 다섯 가야에 수로왕의 금관가야金官伽耶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의 금관가야를 대가야라 했고,
<오가야>조에는 금관가야가 아닌 다른 대가야가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가야>조의 대가야는 오늘날 경북 고령군 일대에 있었다.
이것은 대가야가 오늘날 김해 지역에 있었던 금관가야에서 고령군 지역의 가야로 옮겨졌음을 말한다.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금관가야의 몰락과 고령군 지역 대가야의 대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야의 정치적 중심지가 옮겨졌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법흥왕>조에는 금관가야의 통치자 김구해金仇亥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주主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금관가야가 대가야의 지위를 잃은 것은 이보다 앞선 시기,
즉 532년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영토에 대해서는『삼국유사』「가락국기」에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 경계가 되어 있었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 건국자로 전해오는 수로왕의 능은 오늘날 김해시에 있다.
그리고 황산黃山강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낙동강 일부를 이르는 이름이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가야 지역은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북은 가야산,
서북은 지리산을 경계로 한 오늘날 경상남도 일부였다.
경남 지역은 한의 변한 지역이었다.
<가락국기>에 기록된 가야 영토는 금관가야가 대가야였던 가야 초기의 강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야계의 지명을 통해 본 가야 영역은, 북쪽은 낙동강 상류 유역인 상주와 선산 일대,
동쪽은 대구·창녕·밀양·양산·부산·김해 일대의 경계선으로 낙동강 동쪽 지역,
서쪽은 소백산 줄기와 섬진강을 잇는 경계선으로서 매우 넓은 지역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은 가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던 4세기 중엽의 강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고령계로 분류되는 가야계 질그릇이
오늘날 고령군과 김해를 포함하여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거창·합천·함양·산청·의령·진양·하동·사천·고성 등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남원군의 일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이들 지역은 아마도 고령 지역으로 대가야가 옮겨간 뒤의 가야 영역일 것이다.
가야 지역은 가야가 독립하기 전부터 대량의 철 생산을 기반으로 사회가 크게 발전했다.
이에 관련된 기록은『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에도 보이지만
그동안 가야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도 확인되었다.
즉 가야 여러 유적에서 철제 농구와 무기는 물론, 투구·갑옷·마구류 등
매우 발달된 철제품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가야는 94년에 신라 마두성馬頭城을 공격하여 포위한 바 있고,
97년에는 신라 남쪽 변경을 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인 바 있다.
그리고 102년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토 문제로 다투다가
신라의 파사 이사금에게 이에 대한 판결을 요청했는데,
파사 이사금은 이에 대한 판결을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요청하여 수로왕이 이 문제를 판결했다 한다.
이에 파사 이사금은 수로왕의 노고를 치하하는 잔치를 여섯 부에 명하여 베풀도록 했는데,
신라의 여섯 부 중 한 부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을 시켜 연회를 주관한데 대해
수로왕은 크게 노하여 그 부의 주主를 죽이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가야가 건국 초부터 상당히 강한 나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고
주변 나라들한테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115년과 116년 일어난 가야와 신라 사이의 전쟁은 먼저 가야가 신라의 남부 변경을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것이었지만, 전쟁 결과가 신라에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는 점은
당시 가야 국력이 신라보다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년 가야가 신라에 화평을 청함으로써 3세기 초부터 가야와 신라는 화평을 유지했다.
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략하려고 할 때 신라는 군사를 지원했고,
212년에는 가야가 왕자를 신라에 볼모로 보냈다.
그러나 이후『삼국사기』「신라본기」에 가야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긴 기간 동안
등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실시하자 그 영향이 신라는 물론 가야에까지 미쳤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당시 고구려 보호 아래 있던 신라에 침입한 왜국을 토벌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금관가야의 종발성從拔城을 함락했다.
이 전쟁으로 김해의 금관가야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대가야의 지위를 상실하면서
고령군 지역으로 대가야가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5세기 무렵에 고령 양식의 가야 질그릇이 확산되는 현상이 보이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고령군 지역의 대가야가 세력을 확대하여
가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 후 가야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라·백제 등과 협력했는데,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신라를 침공하자
가야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도운 것은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495년 가야는 신라에 꼬리가 5척이나 되는 흰 꿩을 예물로 보내 화친을 표시했고,
508년 가야국 왕은 신라에 요청하여 신라 이찬의 여동생과 혼인했다.
또 524년 신라 법흥왕이 남쪽 변경을 순행할 때, 가야국 왕이 그곳에서 회합을 갖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금관가야는 국력이 매우 약화되어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면서
532년에 신라에 투항하여 종말을 고한다.
이후 가야는 신라 팽창을 막기 위해 백제와 연합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554년 백제 성왕이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 관산성管山城을 친 것은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영토를 확장하고 있던 신라 진흥왕은 배후의 위험한 세력을 없애기 위해
562년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사다함詞多含과 더불어 가야를 치게 했는데
이 전쟁으로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5. 마치며
지금까지 가야의 건국 연대, 건국 초의 사회 수준, 건국 뒤의 성장과 멸망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에 관한 기본사료인『삼국사기』<가락국기>와『삼국사기』<김유신전>에는
가야가 42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연대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백제·고구려의 건국과 한韓의 쇠퇴라는 당시 주변의 정치 상황을 살펴볼 때
42년에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42년은 기본사료에 나타난 가야의 건국 연대이므로
이를 부인할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가야는 그 지역 토착인들이 건국했는데
그들은 가야를 건국하기 훨씬 전부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조선시대와 한韓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의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여 정치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이 붕괴하고 한이 독립했으나 통치질서가 확립되지 못해 사회가 어지럽자
그들은 가야국을 세워 독립했던 것이다.
가야는 한의 변한 지역에 건국되어 한의 사회 수준을 계승한 나라인데,
한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상당히 발달된 국가 단계의 사회였다.
따라서 가야는 건국 초부터 국가 단계의 사회였고,
42년은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한 연대임이 한층 분명해지는 것이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가야에서는 고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 종교사상의 핵심을 이루었던
하느님 숭배사상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야의 국가 성격은 봉국제 국가로서
금관가야를 대가야로 부르고 그 통치자가 가야의 국왕으로서 가야 전체를 통치했고,
그 밑에 다섯 가야가 있어 그 통치자들을 주主라 했는데,
그들은 대가야의 왕을 공동의 군주로 받들었다.
이런 봉국제는 고조선과 한의 거수국제와 같은 것이다.
가야는 400년 무렵까지는 오늘날 김해 지역에 있었던
금관가야가 대가야로서 가야 전체를 통치했으나,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은 뒤로는 금관가야의 국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가야 전체의 통치권을 갖는 대가야가 오늘날 고령군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후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에 투항했고
가야의 나머지 세력은 고령군 지역 대가야의 통솔 아래 562년까지 존속했다.
가야 강역은 초기에 오늘날 김해를 중심으로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북은 가야산, 서북은 지리산을 경계로 한 오늘날 경상남도 일부였다.
그러나 4세기 북쪽은 낙동강 상류 유역인 상주와 선산 일대,
동쪽은 대구·창녕·밀양·양산·부산·김해 일대의 경계선으로 낙동강 동쪽 지역,
서쪽은 소백산 줄기와 섬진강을 잇는 경계선으로서
매우 넓은 지역을 차지하여 가장 강성함을 보여주었다.
금관가야가 몰락하고 대가야가 오늘날 고령군 지역으로 옮겨간 5세기에는
영역이 고령군과 김해를 포함하여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고
서쪽으로는 거창·합천·함양·산청·의령·진양·하동·사천·고성 등을 비롯해
전라북도 남원군 일부 지역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지역은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하기 전부터
대량의 철 생산을 기반으로 사회가 크게 발전했는데,
가야국은 독립한 초기에 이미 신라를 침공할 정도의 국력을 가졌으며
수로왕의 명망 또한 매우 높았다.
3세기 초부터 신라와 서로 돕는 화평관계를 유지했고,
400년에 신라를 침범한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남하한 고구려 군대에게 금관가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리하여 금관가야가 몰락하면서 대가야는 오늘날 고령군 지역으로 옮겨간 뒤
가야는 신라·백제 등과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데 힘을 모았으며
혼인동맹을 맺는 등 우호를 돈독히 했다.
그 후 가야는 신라의 팽창을 막기 위해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가야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라 진흥왕은
배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562년 가야을 침공함으로써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4. 1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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