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다윈과 글래드스턴,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 본문
생물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 Charles Robert Darwin(1809~1882) 생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영국 총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1809~1989)이 다윈의 거처를 직접 방문했다.
다윈의 학문 업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글래드스턴이 누구인가?
19세기 후반 영국 총리를 4 차례나 역임한 존경받는 정치인이요 박애주의자였다.
당대 거물 정치인의 방문을 받은 다윈은 이렇게 소감을 남겼다.
"그토록 위대한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철학자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1872~1970)은 두 사람의 만남을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다윈이 글래드스턴의 방문을 영광스럽게 여긴 것은 그의 겸손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윈에게 '역사적 안목'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다윈이 명예롭게 여기는 게 맞을지 모르나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다윈이 아니라 오히려 글래드스턴이라는 것이다.
후대에 미친 영향력과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점에서 다윈은 글래드스턴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들고, "글래스드턴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라.
아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윈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둘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 인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객관적인 평가가 되기 어렵다.
한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을 박은 뒤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라야 가능하다.
다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의名醫였다.
특히 할아버지는 국왕 조지 3세가 주치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뛰어난 의사였다.
그러나 이렇듯 저명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다윈은 학창 시절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가업인 의학에도 소질을 보이지 않았다.
다윈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쌀쌀맞게 말하곤 했다.
"너는 사냥과 개 경주와 쥐 잡기 말고는 관심이 없구나. 그러다간 너 자신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겠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가문에서 가장 아둔한 아들'을 교회에 보내던 당시 영국 사회의 관습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다윈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1827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한다.
이렇듯 어린 시절 열등생 소리를 듣던 다윈은 섭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해양탐사 측량선 '비글 Beagle 호'에 승선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다윈 자신을 위해서는 인류를 위해서나 의사가 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다윈과 글래드스턴의 경우에서 보듯이 언론을 뜨겁게 달구는 당대의 정치적 사건들은 그것들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과분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유럽사에서 17세기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유럽 모든 국가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히 싸우던 이 시대는 또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1564~1642)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대 사람들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을까? 당연히 30년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역사의 평가는 어떨까? 압도적으로 갈릴레이에게 더 큰 비중을 둔다.
철인 소크라테스 Socrates(서기전 470년 경~서기전 399년)의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당대의 아테네인은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그 무렵 아테네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던 수많은 소피스트 sophist[그리스어 원래 의미는 '알고 있는 사람 즉 현자賢者'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궤변가'란 부정적 의미로 사용]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했다.
2,500년이 지난 우리 눈에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차이가 분명히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게 어려웠다.
우리는 숲을 볼 수 있지만 그들에겐 나무만 보일 뿐이었다.
날마다 언론에서 크게 다루는 '현실 정치'가 역사의 흐름을 온통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러셀의 '역사적 시야'로 보면 역사의 원동력은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100년, 500년 뒤에는 기라성 같은 정계 거물들의 이름은 존재감이 없어지고, 한적한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어느 과학자의 이름만이 기억될 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역사를 읽으며 '더 중요한 것',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키우는 것도 우리 미래의 도약을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사진을 제외하고는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며, 일부 내용은 새샘이 보완하였다.
2020. 5.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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