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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0 - 신라의 정체성 확보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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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0 - 신라의 정체성 확보2

새샘 2020. 5. 14. 14:02

4. 왕호시대의 도약

 

신라에서 통치자를 왕으로 부른 것은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39년]이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 지증 마립간 때였다.

그리고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의 칭호인 시호, 묘호, 존호 등을 짓는 시법諡法이 시행된 것도 지증 마립간의 사망 때부터였다.

 

통치자를 왕이라 부른 것은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건국 때부터 이미 실시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국식 호칭이었다.

시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중국식 칭호나 예법을 신라가 이 시기에 와서야 채택했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외래문물의 채택이 늦었음을 알게 한다.

이를 신라 사회의 낙후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유문화를 고수해오던 신라 사회가 지증 마립간을 기점으로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외래문화의 수용이 아니라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혼합을 의미한다.

이런 이질문화가 혼합되는 과정에서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법흥왕은 517년 병부兵府를 설치했고 다음 해에는 주산성株山城을 쌓았다.

병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던 군사행정을 정돈하여 총괄하는 부서를 설치했다는 것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문무백관들의 공식 복장에 차등과 서열을 두는 제도를 제정했다.

이때 반포된 율령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기존 율령에 당시 중국·고구려·백제 등에서 실시하고 있던 율령들을 참작하여 보강했을 것이다.

이 율령에는 일반 형법과 신분법은 물론 병부 설치와 운영 및 문무백관의 서열과 복장의 차등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은 대외관계에도 노력을 기울여 521년 중국 남조 양나라[502~557]에 사신을 보냈고, 522년 대가야 국왕과의 혼인동맹을 맺었다.

신라는 기존의 백제와의 혼인동맹 외에 남조와 가야에도 손을 뻗쳐 국제사회에서 튼튼한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528년 불교 공인, 531년 제방 수리로 농업 생산량 증대 및 상대등上大等 제도 실시로 국사를 총괄하게 했다.

532년 금관가야가 항복해 왔고, 536년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중국식 왕호 사용, 재상격으로 귀족회의를 주관하는 등 정치 실권을 장악했던 상대등 제도 설치, 독자 연호 사용 등은 동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다른 왕조들과 대등한 국가임을 천명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신라의 불교 공인은 단순한 외래문화의 수용이라는 점을 벗어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까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상당히 긴 세원이 필요했으며 큰 저항을 받기도 했다.

 

눌지 마립간[재위 417~457년] 때 처음으로 고구려에서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신라의 일선군一善郡(경북 구미, 선산)에 들어왔는데, 모례毛禮라는 사람이 토굴에 그를 모셨다.

묵호자는 중국 양나라 사신이 갖고 온 향의 이름과 용도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불교의 삼보三寶도 설명해주었다.

 

그 후 소지 마립간[재위 479~499년]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부하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가 몇 년을 머물다 사망했는데, 그 부하 세 사람이 남아 불경을 강독하여 신자가 생겼다.

이쯤 되자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키려 했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아 이차돈異次頓(506~527년)의 죽음을 부르게 되었다.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신라에 들어온 지 무려 100여 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훗날인 528년(법흥왕 15년) 불교가 공인되었고, 백성들이 불교 승려가 되는 것이 허용된 것은 진흥왕 5년 544년이었다.

그 사이 많은 신하들이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불교 공인에 반대했고 결국 이차돈의 죽음까지 불렀다.

이런 상황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신라 사회가 한민족의 고유사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하들이 불교 공인을 반대한 것은 불교 승려의 행위나 말하는 바가 상식적인 도道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상식적인 도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의 생활 속에 뿌리내려져 있었던 한민족 고유의 종교사상이었을 것이다.

 

신라에 전래된 불교는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였다.

대승불교에는 윤회사상과 업보사상이 들어 있는데, 이는 현실의 귀족신분제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되었다.

왕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신분은 전생의 업보에 따라 주어졌다는 것이다.

왕이나 지배귀족에게는 신분제를 유지하는 데 더없이 유리한 이론이었다.

 

그런데 신라 사회에는 현실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귀족신분제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한민족의 고유사상인 모든 사람이 더불어 이익이 되고 행복해야 한다는 홍익인간 이념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윤회사상과 업보사상은 그 추구하는 바가 홍익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충돌은 결국 이차돈의 죽음을 가져왔던 것인데, 현실적으로 왕과 귀족에서 유리한 윤회사상과 업보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왕실과 지배귀족 사회의 현상이었을 것이고 일반 서민들의 정서에는 홍익인간 이념이 널리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윤회사상과 업보사상을 따르는 지배귀족들의 정서에도 홍익인간 이념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가치관을 지닌 한민족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만남은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신라가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증 마립간과 법흥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5년],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8년],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1년]시대에 신라는 크게 도약을 하게 되었다.

신라가 훗날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할 수 있었던 국력의 기초는 이 시기에 구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진흥왕안으로는 불교를 일으키고 국사國史를 편찬하는가 하면 음악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 진흥에 힘썼고, 화랑도를 창설하여 나라의 기둥인 젊은 인재들이 민족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심신을 단련시켰다.

이 시기에 강역도 크게 확장되었다.

밖으로는 백제와는 물론 중국의 북조 및 남조와도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튼튼히 하고 민족 통합의 기반을 닦았다.

 

이 시기의 불교 진흥책으로 진흥왕 때 흥륜사興輪寺 준공, 백성들의 승려 허용, 황룡사黃龍寺 완공, 진평왕 때 승려의 중국 유학과 수나라 사신의 황룡사에서의 불경 강의, 진평왕의 황룡사 방문 등이었다.

이와 같이 신라가 불교 진흥에 힘쓴 것은 불교를 통해 신라 문화의 국제화를 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음에도 신라 왕실에서 받들었던 최고신은 여전히 전통적인 민속신이었다.

그것은 역대 왕들이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의 출생지에 세워진 신궁에 참배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진흥왕이 사서인 국사를 편찬한 것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군주와 신하의 잘한 점과 그렇지 못한 점을 기록해 두어야만 후세에 그 내용을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이찬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대아찬 거칠부 등에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도록 했던 것이다.

 

진흥왕의 문화 진흥책은 가야에서 가야금을 가지고 망명한 우륵으로하여금 신라인에게 가야금, 노래, 춤 등의 음악을 가르치게 한 것이다.

또한 화랑도花郞徒를 창설하여 젊은 인재를 양성하고 전통 가치관을 계승 발전시켰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뽑아 수양을 쌓게 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를 기르게 한 뒤, 그 가운데 착한 사람을 발탁하여 조정의 관리로 채용했는데 현명한 재상과 충신, 용맹스러운 장수와 병사가 화랑도에서 많이 나왔다.

 

최치원이 지은 난랑鸞郞이라는 화랑도의 비문 내용에 화랑도는 풍류風流라고도 불렸으며, 그 교敎의 설치 기원은『선사仙史』즉 선仙의 역사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선교仙敎란 고조선시대의 국교였으므로 화랑도는 고조선 이래 전해 내려온 한민족 고유의 가치관과 이념을 계승하여 생활에 실천하는 것을 수련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가치관과 이념의 내용은 공자·노자·석가의 가르침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흥왕은 한편으로는 신라 사회와 문화를 국제화하기 위해 외래 종교인 불교를 진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사를 편찬하여 그것을 통해 정의와 민족정기를 알도록 하고, 화랑도를 설립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한민족의 가치관과 이념을 계승 발전시키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국력의 기반 위에서 진흥왕은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라는 원래 백제와 연맹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응하고 있었다.

541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약을 청하자 이를 수락했고, 548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군사를 보내 백제를 돕게 했다.

 

그러나 신라 국력이 충실해지면서 백제와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550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충남 천안 또는 증평)을 공격했던 응징으로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金峴城(세종 전의면)을 공격하자 이 틈을 노린 진흥왕은 두 나라의 두 성을 모두 빼앗았다.

다음 해인 551년에는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했고 죽령 이북 고현高峴(함남 안변군과 강원 회양군 사이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도 신라 영토가 되었으며, 553년에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침공하여 한강 유역 전부를 차지하였다.

 

그동안 신라와 연맹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로서는 이런 신라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껴 554년 백제 성왕은 신라 관산성管山城(충북 옥천)을 침공했는데, 이 전투에서 백제는 장수와 병사 3만 여명을 잃고 성왕도 전사했다.

555년에 진흥왕은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했고, 556년 동부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오늘날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으며, 562년 가야가 반기를 들자 이를 평정했다.

 

이렇게 하여 신라는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단지 영토가 넓어졌다는 의미뿐 아니라 한강과 황해를 따라 중국과 직접 통할 수 있는 외교 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신라 강역은 오늘날 경남 창녕, 서울 북한산, 함남 함흥 황초령, 함남 이원군 마운령 등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巡狩碑와 단양 적성비赤城碑가 잘 말해준다.

 

이렇게 넓은 영토를 확보한 진흥왕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앙이 지방보다 강해야 한다는 원리를 실천하기 위해 귀족의 자제와 6부의 부호들을 국원國原(충북 충주)을 소경小京[작은 수도]로 삼아 이주시켰다.

그 결과 신라는 일단 균형 잡힌 국가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신라는 이 시기에 중국과의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564년 중국 북조의 북제北齊(530~577)에 사신을 보냈고, 565년 북제에게서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이해에 중국 남조의 진陳(557~589)은 신라에 사신과 승려를 파견하면서 불교 경론을 보내왔다.

그 후에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에 사신 교환을 계속했다.

 

이런 신라의 대중국 외교는 중국에 통일국가인 수隋나라(581~619)가 들어선 진평왕 때도 계속되었다.

이렇게 돈독한 관계를 토대로 신라는 611년 사신 파견 때 수나라에 고구려를 치기 위한 군사 동원을 요청했는데, 수나라 양제는 이를 수락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당唐나라(619~907)가 들어선 뒤에도 신라의 대중국 외교는 변함없었다.

 

신라는 중국에 통일국가가 출현하기 전부터 대중국 외교를 벌여왔고, 통일국가인 수나라와 당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이를 한층 발전시켜 고구려를 협공하는 방향으로 이용했다.

중국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는 전략은 이미 이 시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라는 왕호를 사용한 법흥왕 때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 진흥왕 때에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신라는 한민족 고유의 가치관과 이념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불교를 통해 신라의 사회와 문화를 국제화하려고 노력했다.

이 시기에 신라는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고, 강본약지强本弱枝의 국가 구조[강한 중앙정부와 약한 지방정부]도 형성되었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고구려를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훗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는 기초가 되었다.

 

5. 마치며

 

지금까지『삼국사기』「신라본기」기록을 기초로 신라 초기·마립간시대·왕호 시대 등 세 시기로 구분하여 신라 국가의 발달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초기신라가 건국된 서기전 57년부터 서기 355년까지로서 국가 기틀을 잡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신라 통치자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으로 불렸다.  

신라 초기는 건국 주체세력인 여섯 부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 경제 기반을 튼튼히 하면서 신라가 독립국으로 출범했음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주변 지역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시기였다.

 

신라는 건국시조인 혁거세 거서간시대에 이미 도성인 금성金城을 쌓고 그곳에 궁실을 지어 국가 기초를 세우고, 사신을 한韓왕에게 보내 신라가 독립국임을 알렸다.

남해 차차웅은 시조묘를 건립하여 왕실의 신성성과 권위를 확립했다.

유리 이사금은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기반을 확립했다.

즉 여섯 부의 이름을 바꾸고 성을 하사하여 각 부의 핵심 씨족이 지배귀족으로서의 체모를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17등급을 두어 관직의 등급과 서열 체계를 구체적으로 정했다.

가배라는 행사를 시작해 국민 결합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신라는 토착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 기반과 조직을 튼튼히 하면서도 외래인까지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탈해 이사금과 호공의 등장이 이를 말해준다.

탈해 이사금은 통치자가 된 뒤 혁거세 거서간의 후손들을 주주와 군주로 임명하여 주와 군을 다스리도록 함으로써 기존 통치세력과의 결합을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파사 이사금은 생산을 독려하여 경제 기반을 튼튼히 하고 생활이 어려운 백성을 돕는 한편 국방에도 힘을 기울였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감독했다.

유리 이사금시대에 시작된 영토 확장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낙동강 동쪽 지역을 거의 다 차지했고 서쪽 일부 지역도 차지했다.

일성 이사금은 정사당을 설치했는데, 이는 영토 확장에 따른 통치자의 권위와 통치 조직의 강화였다.

아달라 이사금에 이르러서는 한반도 중심부와 동부해안으로 통하는 도로를 확보하여 각 지역 사이의 교통을 편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문물의 교류를 촉진했고 한강 유역에 진출하는 기반을 확보했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를 위협했고, 왜열도의 맹주였던 히미코가 보낸 사신의 예방을 받기도 했으며, 가야의 보호국으로 군림했다.

 

262년 미추 이사금이 통치자가 되자 박씨·석씨와 더불어 김씨 왕이 등장했다.

미추는 어머니가 박씨였으므로 신라 왕실과 관계 없는 혈통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신라가 왕위 계승에 개방적이었음을 알게 한다.

307년에는 나라 이름을 신라로 고쳤는데, 이 시기까지는 신라 초기로서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립간시대는 356년부터 513년까지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

내물 마립간이 즉위하면서 통치자 이름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는데,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훨씬 더 권위 있는 이름이었다.

내물 마립간 이전에는 박씨·석씨·김씨 세 성이 왕위를 맡았으나  내물 마립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는데, 이는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내물 마립간은 안으로는 덕치를 베풀면서 밖으로는 백제·고구려·전진 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너무 크게 팽창한 고구려 압력을 감당할 수 없어 고구려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성과 복호를 볼모로 보내는 등 고구려에 신속臣屬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427년 고구려가 오늘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펴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했다.

소지 마립간은 백제와 동맹을 더욱 공공히 하면서 가야와도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나정에 신궁을 짓고 반월성을 수축하여 왕이 그곳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왕실 권위를 높이고 통치력을 강화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을 돌보고 죄수들을 사면하는 한편, 농업 생산을 장려하고 백제와는 혼인동맹을 맺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지증 마립간은 14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소지 마립간이 닦은 정치적·사회적 기반 위에서 국가 권위를 공공히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첫째로 나라 이름을 명확히 하고 통치자 이름을 왕으로 바꾸었다.

둘째로 상복법을 제정하여 예제를 바로 세우고 주·군·현의 행정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돈하여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셋째로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실직주에 군주軍主를 두는 등 국토방위를 강화했다.

넷째로 해운업에 관한 제도를 마련하고 도읍에 동시東市를 설치하는 등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을 폈다.

다섯째 순장을 금했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우경을 장려했으며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마립간시대는 신라 사회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그런 기반 위에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

이런 상황은 지증 마립간시대에 종합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국력 신장은 고고학 자료에서도 확인되는데, 황남대총을 비롯한 거대한 고분들이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왕호시대는 514년 법흥왕 때부터로 민족 통합의 기반을 닦은 시기였다.

신라가 이렇게 늦게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회였음을 알게 해준다.

법흥왕은 군사행정을 정돈하여 병부를 설치했고 율령을 반포하여 문무백관들의 공식 복장에 차등과 서열을 두는 제도를 제정했다.

대외관계에도 노력을 기울여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냈고 가야와는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불교를 공인했고 제방들을 수리하여 농업 생산 증대에 만전을 기했다.

재상에 해당하는 상대등 제도를 실시했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동아시아의 다른 왕조들과 대등한 국가임을 천명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는 100여 년 이란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불교 공인에 반대하면서 이차돈의 죽음을 가져왔다.

이처럼 신라 사회에서 불교가 자리 잡기 어려웠다는 것은 한민족 고유사상이 그만큼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한민족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만남을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게 되었다.

이후 신라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증 마립간과 법흥왕이 구축한 기반 위에서 진흥왕·진지왕·진평왕 시대에 신라는 큰 도약을 했다.

진흥왕은 불교를 일으켜 귀족신분제를 유지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음과 동시에 신라 문화를 국제화했고 국사를 편찬하여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세웠다.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가르치게 하는 등 문화 진흥에 힘썼고, 화랑도를 창설하여 젊은 인재들이 민족 주체성을 갖도록 했다.

 

경남 창녕, 서울 북한산, 함남 함흥 황초령, 함남 이원군 마운령 등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와 단양 적성비가 잘 말해주듯이 이 시기에 신라 영토는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넓었다.

백제는 물론 중국의 북조와 남조와도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튼튼히 하고 민족 통합의 기반을 닦았다.

 

신라는 왕호를 사용한 법흥왕 때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 진흥왕 때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신라는 한민족 고유의 가치관과 이념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불교를 통해 신라 사회와 문화를 국제화하려고 노력했다.

이 시기에 넓은 영토와 강본약지强本弱枝의 국가 구조도 형성되었다.

중국과의 외교에서 성공을 거두어 고구려를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왕호시대는 신라 사회가 국제화되고 넓은 영토를 확보하면서 중국과의 외교에 성공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훗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는 기초를 닦은 시기였던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5.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