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9 - 신라의 정체성 확보1 본문
1. 들어가며
이 글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할 수 있는 국가 기틀이 마련된 진평왕 때까지의 발전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이 기간에 신라에서는 통치자 이름인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왕王 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이 가운데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은 통치자에 대한 한민족의 호칭이고, 왕은 중국의 호칭이다.
따라서 통치자의 이름을 기준으로 할 때 마립간시기까지는 민족 고유 문화가 우세를 보였던 반면, 왕호를 사용한 시기에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사를 보면 거서간·차차웅·이사금시대는 건국 초기로서 국가의 기반을 닦는 시기였고, 마립간시대는 국가와 통치자에 대한 권위를 강화해나간 시기였으며, 왕호시대는 신라가 국내외에서 강성한 나라로 군림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와 같이 신라사에서는 통치자의 이름과 각 시기의 성격 변화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발전 과정을 신라 초기·마립간시기·왕호시기 등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신라 초기사회는 대체로 국가 단계에 진입하기 전의 사회단계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다.
이는 신라 건국 전에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했던 고조선과 그 뒤를 이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한韓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고조선과 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들은 이미 국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뒤를 이은 왕조인 신라는 당연히 초기부터 국가 단계여야 한다.
국가 단계의 사회의 뒤를 이어 출현한 왕조가 국가 단계 이전의 사회로 퇴보하는 경우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신라가 초기부터 국가 단계의 사회였다는 사실은 문헌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신라가 건국된 뒤 어떤 발전 과정을 겪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신라 국가의 발달사'인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 신라의 발전 과정을 시대순으로 정리해나갈 것이므로 『삼국사기』「신라본기」 기록이 주된 자료이다.
신라 역사는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기반 축조 작업과 성장 과정이 있었다.
그런 성장의 특징은 과연 무엇이었을가?
이를 확인하는 것은 고구려·백제와 대비해서 신라 사회의 특징을 인식하는 작업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통일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의 한민족에게 시사하는 바도 클 것이다.
2. 신라 초기의 발전
신라는 서기전 57년[혁거세 거서간 원년, 전한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건국되었는데, 건국 당시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었다.
신라는 사로斯盧라고도 불렀는데, 『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한韓나라의 진한 지역에 사로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로국이 서나벌의 전신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신라 건국의 핵심세력은 알천閼川 양산촌陽山村·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자산嘴山 진지촌珍支村·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등 여섯 촌락(마을)이었는데, 그곳에 거주한 사람들은 원래 고조선 백성들이었으며 고조선이 붕괴된 뒤에는 진한의 여섯 부部가 되었다.
부는 여러 개의 마을로 구성된 행정구역이었으므로, 위의 여섯 마을은 각 부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많은 마을들로 형성된 국가였다.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진한의 여섯 부는 신라가 건국된 뒤에도 신라의 여섯 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삼국사기』「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17년(서기전 41년)>조에 혁거세爀居世 거서간[재위 서기전 57~서기 4년]이 여섯 부를 순행했다고 적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여섯 부는 나중에 신라 영토가 확장되면서 그 영역도 넓어졌겠지만 건국 초에는 진한의 여섯 부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혁거세 거서간 17년>조의 내용을 보면 신라 사회는 전형적인 농업마을이었다.
신라가 국가 기반을 닦아나가자 주변에서 스스로 항복해오는 나라들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오늘날 경남 지역에 있었던 변한 지역의 나라들도 있었다.
이런 기반 위에 혁거세 거서간은 서기전 37년 도성都城인 금성金城을 쌓고 5년 후에는 금성에 궁실을 지어 왕실의 위엄을 세웠다.
그리고 신라가 독립국임을 대외에 알리기 위해 한韓의 왕실이었던 마한에 사신을 파견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38년(서기전 20년)>조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한 전체를 통치했던 진왕辰王은 마한왕으로서 원래 진왕의 지배 아래 있던 진한과 변한이 신라가 건국된 시기에 이르러서는 진왕의 통치력이 약화되었고, 신라는 이미 진왕의 통치를 받을 의사가 없는 독립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라가 건국된 진한 지역은 원래 마한에 종속되어 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신라의 이와 같은 태도는 대담한 것이고 독립을 천하에 알린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신라의 독립과 성장을 축하하기 위해 동옥저는 사신과 말 20필을 보냈다.
이처럼 오늘날 경주 지역에서 건국된 신라는 건국시조인 혁거세 거서간시대에 이미 영토가 경주 부근뿐 아니라 경남 일부 지역에까지 확대되었으며, 독립국으로서의 기반도 상당히 튼튼했던 것이다.
이런 튼튼한 기반 위에 즉위한 남해南解 차차웅[재위 서기전 4~서기 23년]은 시조묘始祖廟를 건립하여 왕실의 신성성과 권위를 확립했다.
유리儒理 이사금[재위 24~56년]은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도록 노력하면서 정치제도의 정비를 단행하여 국가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 내용을 보면 건국 이전부터 사용해 오던 여섯 부의 이름을 바꾸어 국가 면모를 쇄신하고, 각 부의 핵심 씨족에서 성姓을 하사하여 귀족으로서의 체모를 갖추도록 했으며, 관제를 정돈하여 17등급을 두었다.
이 시기에 가배嘉俳라는 거국적인 길쌈 겨루기 축제행사를 만들어 국민의 결합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유리 이사금은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42년 이서국伊西國(경북 청도)을 쳐서 멸망시켰는데, 이는 신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한 첫 번째 기록이다.
이후 신라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탈해脫解 이사금[재위 57~80년] 때에는 우시산국于尸山國(경남 울산)과 거칠산국居柒山國(경남 동래)을 통합했다.
신라는 토착인 중심으로 국가 기반과 조직을 튼튼히 하면서 외래인도 포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것은 탈해 이사금과 호공瓠公의 등장으로 알 수 있다.
탈해 이사금은 왜국의 동북 1천리에 있다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생으로 신라에서 성장하여 남해 차차웅 때 그의 사위가 되어 벼슬이 대보大輔에 이르렀고, 남해 차차웅이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호공은 원래 왜인으로 표주박[호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부른 이름으로서 탈해 이사금 때 벼슬이 대보에 이르렀다.
외래인인 탈해가 이사금에 오른 것이라든가 호공이 대보라는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유능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신라에서는 외래인에 대한 차별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포용한 정책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탈해는 이사금에 오른 뒤 신라 건국의 핵심세력인 혁거세 후손들을 주주州主와 군주郡州로 임명하여 주과 군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는 외래세력인 탈해 이사금이 기존 통치세력과의 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한 조처였을 것이다.
파사婆娑 이사금[재위 80~111년]은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고 국방에도 힘을 기울여 본격적인 영토 확장을 꾀했다.
음즙벌국音汁伐國(경북 월성군 안강)·실직국悉直國(강원 삼척)·압독국押督國(경북 경산군 압량)·비지국比只國(경남 창녕)·다벌국多伐國(경북 대구 또는 영일군)·초팔국草八國(경북 경주 부근 또는 영일군) 등의 항복을 받았으며, 굴아화촌屈阿火村(경남 울산 서쪽)을 차지하여 현을 설치했고 내령군奈靈郡(경북 영주)도 차지했다.
이때 신라는 낙동강 동쪽 대부분 지역과 서쪽 일부 지역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사 이사금은 탈해 이사금이 임명한 주주와 군주들을 감찰하여 통치자의 권한을 강화해나갔다.
일성逸聖 이사금[재위 134~154년]은 도읍에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 장소인 것으로 보이는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했다.
이로 보아 이 시기에 신라는 통치자의 권위를 강화하고 통치 조직과 관제를 정돈하는 작업이 상당히 진행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영토 확장에 따른 통치력과 통치 조직의 정비였을 것이다.
아달라阿達羅 이사금[재위 154~183년]은 계립령鷄立嶺(충북과 경북 사이 조령)과 죽령竹嶺(강원 삼척 하장면)을 열어 한반도 중심부와 동부해안으로 통하는 도로를 확보했다.
이것은 각 지역 상의 교통을 편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문물의 교류를 촉진했고, 167년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신라의 성장은 백제에 위협이 되었고, 왜열도 고을나라들의 맹주였던 히미코[비아호卑彌呼]가 보낸 사신의 예방禮訪을 받기도 했다.
벌휴伐休 이사금[재위 184~196년]은 185년 소문국召文國(경북 의성)을 병합했다.
내해奈解 이사금[재위 196~230년]은 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낙동강 하류와 경남 남해안 일대에 있었던 여덟 나라)의 침략을 받은 가야를 구원해주었으며, 212년에는 가야 왕자를 볼모로 삼아 가야의 보호국으로 군림했다.
조분助賁 이사금[재위 230~246년]은 231년 감문국甘文局(경북 금릉 개령면)을, 236년에는 골벌국骨伐國(경북 영천)을 병합했다.
첨해沾解 이사금[재위 247~261]은 아들이 없어 김씨인 미추味鄒 이사금[재위 262~283년]을 세웠다.
지금까지 박朴씨와 석昔씨가 왕위를 이어왔지만 처음으로 신라에 김金씨 왕이 등장한 것이다.
미추는 알지閼智의 후손으로 계림鷄林 출신이며, 탈해 이사금이 데려다 궁중에서 길러 벼슬이 대보에 이르렀다.
미추 어머니는 박씨였으므로 신라 왕실과 관계 없는 혈통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계열로는 왕실 계통이 아닌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신라가 왕위 계승 문제에 비교적 개방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유능한 인물이라면 아버지가 왕실 계통이 아니더라도 왕위에 오를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기림基臨 이사금[재위 298~310년] 때인 300년 신라는 최씨낙랑국(대동강 유역)과 대방국(황해도) 지배세력의 투항을 받아들였고, 307년에는 나라 이름을 신라로 고쳤다.
이 기간에 신라가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다져졌던 것이다.
3. 마립간시대의 발전
내물奈勿 마립간[재위 356~401년]이 즉위하면서 통치자 이름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김대문金大問(?~?)의 설명에 따르면 '마립麻立'이란 신라 방언으로 말뚝을 말하는데, 말뚝은 '푯말'이란 뜻으로 자리를 정해두는 것이니 왕의 푯말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푯말은 아래에 배열되어 있으므로 이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지은 것이라고 했다.
이전 통치자 칭호였던 차차웅은 원래 무巫를 의미했으나 당시에는 존장자尊長者를 뜻하는 말이었고, 이사금은 연치年齒[나이]가 많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차차웅과 이사금은 연장자를 뜻하는 말로서 통치자라는 의미가 약하지만, 마립간은 정치적 권력의 서열을 나타낸 말로서 통치자라는 뜻이 강했다.
이런 통치자 이름의 변천은 이 시기에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내물 마립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는데, 이것 역시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증거다.
내물 마립간은 대내적으로는 덕치德治를 베풀면서 정치적 성장과 사회안정을 가져왔고, 대외적으로는 백제·고구려·전진 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고구려 세력의 너무 크게 팽창하여 그 압력을 감당할 수 없어 고구려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392년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실성實聖이 귀국하여 마립간[재위 402~417년]에 오른 뒤에는 다시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卜好를 볼모로 보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신라를 자신들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는 거수국 정도로 생각하여 400년 신라에 쳐들어온 왜구와 왜구를 조종한 임나가라를 정벌하여 신라를 보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눌지訥祗 마립간[재위 417~458년] 11년인 427년(고구려 장수왕 15년) 고구려가 오늘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통합하는 천하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취하자, 신라는 433년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했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기도 했다.
자비慈悲 마립간[재위 458~479년]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 개로왕도 죽임을 당했는데, 이때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신라는 1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고구려군을 퇴각시켰다.
소지炤知 마립간[재위 479~499년]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백제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가야와도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력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처들을 취했다.
481년 신라는 백제·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고, 484년에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공하자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母山城에서 고구려를 크게 격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487년에는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가 출생한 나정蘿井에 신궁神宮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공문을 전달하는 우역郵驛을 사방에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함으로써 통치에 필요한 통신망 강화와 더불어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같은 해에 반월성半月城을 수축하여 그 다음 해 소지 마립간은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지 마립간시대의 이런 일련의 종교적·정치적 조처는 신라 자체의 정치적 성장에서 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남진정책에 자극을 받아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490년에는 도읍에 시장을 개설하여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교환되고 유통되도록 했는데, 이는 신라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사회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 혼인동맹을 맺었다.
493년 백제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는데, 소지 마립간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는 신라가 백제와의 혼인을 통해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한 것으로, 이런 동맹관계는 남진하는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양국이 다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494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견아성犬牙城을 포위하자 백제 동성왕은 군사 3천 명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군의 포위를 풀도록 했다.
그 다음 해에는 고구려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자 신라는 장수 덕지德智를 보내어 백제를 도와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이와 같이 신라와 백제의 고구려 남진에 대한 동맹관계는 돈독했던 것이다.
지증智證 마립간[재위 500~514년]은 14년이란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소지 마립간이 닦은 정치적·사회적 기반 위에서 국가 권위를 공공히 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첫째로, 나라 이름을 명확히 하고 통치자 이름을 바꾸었다.
신라는 이미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했음에도 사라·사로·신라 등이 혼용되고 있었다.
나라 이름이 이렇게 혼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하게 해 503년 '덕업德業이 날로 새롭다'는 뜻을 지닌 '신新'과,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을 지닌 '라羅'를 합한 '신라新羅'를 나라 이름으로 하고, 왕의 존호尊號를 신라 국왕이라 정했다.
이에 따라 지증 마립간의 뒤를 이은 법흥왕法興王부터는 마립간이라 부르지 않고 왕이라 불렀다.
둘째로, 예제禮制와 행정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세우고자 했다.
504년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반포했고, 다음 해에는 주州·군郡·현縣의 행정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돈하여 군주軍主를 두었다. 군주라는 이름은 185년에 이미 사용되었지만, 당시 군주는 전쟁때 지휘관에게 주는 일시적인 이름이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행정단위인 주의 군무를 총괄하는 관직 이름이 되었다.
514년 지증 마립간이 사망하자 시호를 지증이라 하여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법諡琺[시호諡號, 묘호廟號, 존호尊號 등을 짓는 법]이 실시되었다.
이런 조처들은 국가기강과 사회질서를 바로세우기 위해 실시했을 것이다.
셋째로,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했다.
504년 파리波里(강원도 삼척 부근)·미실彌實(경북 영일 흥해)·진덕珍德·골화骨火(경북 영천) 등 12개 성을 쌓았고, 다음 해에는 강원도 삼척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이런 조처들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북방 고구려 침공을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을 취했다.
505년 겨울에 얼음을 저장해두었다가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해운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제도도 확립했다.
512년 하슬라주何瑟羅州(강원 강릉) 군주인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于山國(울릉도와 독도)을 복속시킴으로써 활동 영역이 동해안으로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때 우산국을 복속시키게 된 것은 앞서 해운업을 장려하는 제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509년에는 도읍에 동시東市를 설치하여 각지 상품들의 유통을 촉진했다.
신라에서는 이보다 앞선 490년 도읍에 시장을 설치했는데 이와 별도로 동시를 설치했다는 것은 이 사이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502년 순장 제도를 폐지했다.
왕이 사망하면 남녀 각각 다섯 사람을 순장을 금했던 것으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또한 군주들에게 농사와 우경牛耕을 장려하도록 명했는데, 우경의 확산은 노동능률을 높여 생산을 크게 증대시켰을 것이다.
506년 가뭄과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구호물자를 지급했다.
514년에는 도읍 부근의 아시촌阿尸村(경남 함안)에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6부와 남지南地 주민 일부를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도읍 주변 지역을 개발하여 지방보다 중앙 경제력을 강화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가 안정을 이루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마립간시대는 신라 사회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그 기반 위에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
그런 상황은 지증 마립간시대에 종합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신라의 국력 신장은 고고학 자료로도 확인되는데, 이 기간에 축조된 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한 거대한 고분들은 그런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5.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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