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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선두주자 영국이 독일에 뒤쳐진 이유

새샘 2020. 5. 16. 15:57

1904년 당시 독일 기업 아에게 AEG 사 공장 - 1883년 독일 실업가 에밀 라테나우 Emil Rathenau(1838~1915)가 베를린에서 독일에디슨응용전기회사를 설립했다. 1887년 회사명을 알게마이넨전기회사 즉 아에게 AEG로 바꾸었으며, 독일 최초의 전기시설 공사의 대부분을 맡았다. 또한 1900년 이전에 독일 전역에 걸쳐 송전선을 설치하고 전차시설을 설치했다. 1985년 다임러-벤츠사 Daimler-Benz가 아에게 사를 매입하였다. 현재 아에게 사에서는 가정용·산업용 전기설비, 원거리통신설비, 공업용 전자부품, 사무기기, 컴퓨터, 가장용 기구 등을 생산하고 있다.(출처-출처자료)

 

18세기 말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1차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1850년에서 1870년까지 여전히 서유럽의 산업 거인으로 우뚝 서있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미국 등은 도전자의 위치였다.

선두주자인 영국은 제철 부문에서의 성장률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지 않았다.

프랑스는 6.7%, 독일은 10.2%인 데 비해 영국은 5.2%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1870년 당시 영국은 아직도 전 세계 철 생산량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었다.

영국 철 생산량은 미국의 3.5배, 독일의 4배, 프랑스의 5배에 달했다.

 

1870년 이후 일어난 두 번째 산업혁명(2차 산업혁명)에서 상황에 변화가 있었다.

물론 영국은 이 기간 동안 산업의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발 국가들의 왕성하고도 위협적인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선두 자리를 잃게 되었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 영국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1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에 비해 1세기나 늦게 뛰어들었지만 뜻밖에도 2차 산업혁명의 승자는 독일이었다.

독일 전기산업은 186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아에게 AEG지멘스 Giemens 등의 회사들은 곧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했다.

생산량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20세기 초 철강생산 부문에서 영국을 앞질렀으며, 전 세계의 화학공업 발전을 선도했다.

 

물론 1914년에도 영국의 산업과 상업의 전성기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독일 제조업 생산량이 6배 늘어난 반면, 영국은 2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독일은 1870년 이전에 이미 영국 공산품의 시장 역할에서 벗어나 자급자족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1871년 이후 독일은 세계 각지에 수출을 개시했다.

독일 세일즈맨들은 영국인들이 자국의 독점 시장이라고 생각해온 시장으로 파고들어, 오스트레일리아, 남아메리카, 중국 그리고 영국 본토에까지 독일 상품의 판매를 확대해 나갔다.

유기화학 제품과 전기 설비 분야에서 독일은 전 세계에서 영국보다 더 많은 판매 실적을 올렸다.

 

영국이 뒤쳐진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영국은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미 낡은 공장과 설비에 자본을 투자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분야나 새로운 방법의 개발을 꺼렸다.

영국은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였기에 산업 중심지도 19세기 초의 생산 규모에 맞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강공업은 대규모 부지와 편리한 교통을 필요로 했다.

영국은 공업도시가 비좁아 독일처럼 대형 제철소를 지을 수 없었다.

1900년경 영국 최대의 제철소는 독일의 평균 크기 제철소보다도 규모가 작았다.

 

다음으로 산업 선진국으로서 '성공의 기억'이 영국의 자세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온 만큼 영국인은 이에 만족했다.

하지만 증기기관이나 제니 방적기 같은 1차 산업혁명의 위업이 다분히 우연적인 결과물인 데 비해, 2차 산업혁명은 순수과학과 순수기술의 긴밀하고도 생산적인 결합의 산물이었다.

그와 같은 업적은 교육 받은 노동자, 훈련 받은 기계공, 과학적 기초를 갖춘 기사, 고도의 교육을 받은 창조적 과학자 등에 의존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독일에는 이런 인적 자원이 있었지만 영국에는 없었다.

독일은 1825년부터 본격적 의무교육을 실시했지만, 영국은 1876년에야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독일은 국가 주도로 과학기술 연구소와 훈련원을 운영했지만,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런 시설이 전무했다.

 

요컨대 영국의 패배는 승자의 자만 때문이었다.

교육의 목적이 창의성 배양이 아니라 신사를 만드는 데 있다고 보았기에, 과학기술 분야로 나아가 창조적 재능을 발휘해야 할 인재들이 정계나 관계로 진출했다.

과거의 경험에만 의지하려는 풍조로 인해 창조적 연구자와 모험적 사업가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기 일쑤인 냉엄한 국제 현실이다.

국가 경쟁력은 국민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추락할 수 있다.

우리 또한 지난 시절의 성공 기억에 안주해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아울러 과학자와 기술자에 대한 처우 개선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5. 1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