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한민족의 중국 진출: 열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본문
차례
1. 고구려의 요서 공격과 수복
2. 백제의 중국 지배
3. 고구려 부흥 운동
4. 발해의 당나라 공격
5. 이정기 장군의 제나라
6. 신라 장보고의 신라방/구당신라소
7. 고려·조선의 요동 정벌
1. 고구려의 요서 공격과 수복
-고구려(서기전37~668) 건국 초기에는 영토 확장을 위한 주변 소국들 병합
-영토 확보 후 국력이 충실해 진 뒤부터 요서지역으로 진출
*중국 통일 제국인 서한西漢(서기전 206~서기 8)과 그 뒤를 이은 동한東漢(25~220)과 계속 충돌하면서 미천왕美川王시대(재위 300~331)까지 계속
-하지만 그 뒤를 이은 고국원왕故國原王시대(재위 331~371)부터는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대신 남쪽의 한반도로 진출
-이는 고조선의 통치질서와 천하질서를 재건하려는 고구려의 건국이념과 기본정책에 따른 것
1)요서지역 공격
*49년 5대 모본왕慕本王(재위 48~53)은 동한의 우북평군右北平郡·어양군漁陽郡·상곡군上谷郡· 태원군太原郡을 공격하였으며, 동한이 화친을 원하여 원래의 국경으로 복귀
*앞 3군은 오늘날 난하灤[滦]河 서쪽 북경 주변 지역이고, 태원군은 오늘날 산서성 태원시로 북경 서남쪽 멀리 황하黃河 가까운 곳으로 동한 영토 깊숙이 공격
*55년 6대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은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동한 침략 대비
*1세기 말 서쪽은 요서 일부까지의 남만주 일대에 영토 확보
2)요서지역 수복
*2세기부터 본격적인 요서지역 진출
#105년 동한 요동군遼東郡(난하 하류), 118년 낙랑군樂浪郡, 146년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 등 공격
#3세기 중국 삼국시대(220~266)에는 위나라의 요동군 서안평현 공격
*4세기 15대 미천왕시대(재위 300~331)에는 고조선 영토였던 요서 난하 유역까지 완전 수복
#이 시기는 중국의 서진西晉(266~316) 말기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304~439)
#302년 현도성 공격, 311년 요동군 서안평현 차지, 313년 낙랑군 정복, 314년 대방군帶方郡 정복, 315년 현도성玄菟城 정복
2. 백제의 중국 지배
-송서宋書[송나라, 420~479]와 양서梁書[양나라, 502~557]의 백제전에 진晉나라[서진西晉, 266~316]때 백제(서기전18~660)는 요서·진평 두 군의 땅을 소유하여 백제의 군을 설치했다고 기록
*요서군遼西郡은 오늘날 난하 서부유역이고, 진평군晉平郡은 오늘날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옹녕현邕寧縣[백제향百濟鄕이란 지명이 남아있음]으로 추정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하게 된 때라고 했으므로 위魏나라(220~265)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던 백제 8대 고이왕古爾王(재위 234~286) 때인 246년 이전으로 추정
-남북조南北朝시대(386~598) 남제서南齊書[남제, 479~502] 백제전에는 북위北魏(386~534)와 백제의 전쟁[삼국사기에도 기록]에서 승리한 백제 장수들에게 중국 관직을 제수했는데, 제나라에서 이를 승인했다는 기록
-백제 장군들이 제수받은 관직명 중에 광양태수廣陽太守·청하태수淸下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 등이 있음
*광양군은 오늘날 하북성 융화[난하상류], 청하군은 산동성 익도, 성양군은 산동성 거현, 광릉군은 강소성 양주
-남북조시대 북제서北齊書[북제, 550~577] 후주기後主紀에 571년 북제 후주가 백제 위덕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고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570년으로 기록]
*동청주는 오늘날 산동성 청도시와 교주만 연안으로서, 북위시대 백제가 지배했던 성양군 지역에 해당
*따라서 백제는 북위시대부터 북제시대까지 2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음.
-백제가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220~589)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역은 오늘날 하북성 난하 유역에서 동부해안을 따라 산동성을 거쳐 강소성 남부에 이르렀으며, 남쪽의 광서장족자치구 울림군 지역에도 근거를 마련했을 가능성
-삼국사기 최치원전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당 태사시중에게 올리는 글) 기록
“고구려와 백제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어서 남으로는 오吳[강소성]와 월越[절강성]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중국 북부의 유幽·연燕·제齊·노魯 등의 지역[난하 유역부터 산동성에 이르는 지역]을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거리였으며, 수隋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은 저 요동[오늘날 요서]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3. 고구려 부흥 운동
-고구려 부흥 운동이란 고구려 멸망(668) 후 당唐나라(619~907) 지배와 고구려인의 요동 강제 이주에 대항해 669~673년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과 나당羅唐전쟁의 일환으로 일어난 운동
*중심세력은 검모잠劍牟岑, 안승安勝 및 안시성安市城 세력이었고, 이 가운데 안시성 세력이 가장 강력
*고구려국(670~673) 재건
*670년 부흥군과 신라 연합군이 오골성烏骨城 침공
*671년 안시성이 당군에게 함락
*672년 백수산 전투와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패하면서 부흥군은 신라군에 합병
-670년(문무왕 10년) 3월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각각 군사 1만의 연합작전으로 요동 오골성에서 당나라 휘하 말갈족 군대 격파
-4월 검모잠이 당군과 전투를 벌임으로써 당나라가 반란으로 인식
-670년 7월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에서 장군 검모잠이 왕족[보장왕의 외손?서자?]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국 재건하고, 문무왕은 이를 인정
-671년 요동 부흥군 중심지인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되면서 부흥군 세력 크게 약화
-672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남
-672년 백수산白水山[황해도 재령]에서 당군에게 패배
-673년 호로하瓠瀘河[임진강] 전투에서 부흥군과 신라 연합군이 당군과 격렬한 전투 끝에 패배
-호로하 전투 이후 부흥군은 신라군에 합병되어 이후 신라가 주도하는 나당전쟁(673~676) 계속
-674년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익산]에 보덕국報德國(674~683)을 세워 왕으로 임명
-일본서기에 고구려 멸망 후인 671~682년까지 총 8차례 고려사신 파견 기록
4. 발해의 당나라 공격(발해-당 전쟁)
-732년 발해(698~926) 2대 무왕武王(재위 719~737) 대무예大武藝 명으로 수군장군 장문휴張文休가 해로로 당(619~907)의 산동반도 등주를 선제공격 점령한 다음, 733년 무왕이 직접 육로로 마도산馬都山[현 산해관山海關]의 유주도독부를 초토화시켰던 발해와 당 사이의 전쟁
*발해 북쪽 흑수말갈을 점령하라는 무왕의 명을 아우 대문예大門藝가 거부하고 당으로 망명해버리자 무왕이 대문예의 송환을 당에 요청했고 이를 당나라가 거부한 것이 전쟁의 도화선
-732년 9월 발해 수군장군 장문휴가 군함을 이끌고 해로로 산동반도의 해군전진기지인 등주登州 봉래수성蓬萊水城[현 산동성 연태시烟台市 봉래시蓬萊市]를 선제공격하여 점령한 후 곧 귀환
-당 현종玄宗은 망명한 대문예를 대장으로 삼아 발해 침공할 준비
-당은 신라와 양동작전을 벌여 신라가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했으나 실패
-733년 3월 발해 무왕이 직접 돌궐·거란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육로로 지금의 하북성 산해관인 마도산으로 진격해 전쟁을 벌인 끝에 과거 고구려 침공 전진기지였던 당 유주도독부를 초토화
-이후 발해는 멸망 때까지 향후 200여 년 동안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으며, 신라는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 벌였던 나당전쟁(673~676) 이후 50년 만에 당과 우호적 관계 회복
5. 이정기 장군의 제나라
-제齊나라(765~819)는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619~907) 장군 이정기李正己(732~781)가 절도사로 있던 산동반도 치청번진 등 주변 15개 주를 영토로 삼아 이정기가 죽은 후 아들 이납李納(758~792)이 건국
-제나라는 번진藩鎭 절도사의 세습을 허락하지 않는 당나라에 대항해 ‘4진鎭의 난’을 일으켜 승리하자 당나라가 번진의 독립성을 인정함으로써 4대 왕 55년 동안 존속
-'제'란 나라 이름은 춘추전국시대 강태공姜太公이 세워 무려 800년 이상을 존속하면서 강성했던 제후국 제齊(서기전 1046?~서기전 221)를 재건해 보겠다는 의미
-한반도보다 넓은 산동 15개 주를 다스린 고구려 유민 이정기는 중국 한복판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한 ‘중원 속의 고구려 제왕’이란 평가
-762년 산동 청주靑州[현 익주益都]에서 안록산安祿山(?~757) 잔당인 사조의史朝義의 난 진압으로 명성 떨침
-765년 당 대종代宗(재위 762~779)에게 평로와 치청의 두 번진 절도(관찰)사와 당-신라-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육해상 항로를 총괄하는 ‘해운압신라발해 양번등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를 제수 받고, 산동에 염전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 축적
-776년 산동과 인접지역 등 15개 주에 540만 명, 84만 호, 10만이 넘는 군사력을 보유함으로써 하남에서 가장 강력한 번진 절도사로 성장
-번진 절도사의 세습제를 허용하지 않는 당나라 조정과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청주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현 서안西安]과 가까운 운주[현 제령濟寧]로 옮김.
-781년 당나라 조정에 대해 다른 세 번진과 합세하여 4鎭의 난을 일으켜 10만 군사로 당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낙양 수송로인 대운하 차단 성공
-하지만 그해 갑작스레 병사(황달? 암?)
-782년 아들 이납이 제나라 건국하여 2대 왕에 오르고 이정기를 초대왕에 추존
-다른 번진들도 왕을 칭하여 대항하자 당 조정은 반란죄를 사면함과 동시에 절도사 세습과 번진 독립성을 인정하자 번진도 왕호를 철회하면서 전쟁 종식
-이납 사후 이사고(아들), 이사도(이사고 이복동생)가 계승하면서 4대 55년 동안 발해에 54회에 걸쳐 사신 파견하면서 우호 관계 유지
-당 헌종憲宗(재위 805~820)이 당나라 중흥에 나서면서 817년까지 절도사 세력 토벌에 성공
-818년 남은 제나라 치청번진 토벌을 위해 통일신라에 원군을 지원 요청하자 819년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은 장군 김웅원金雄元과 함께 군사 3만을 파병함으로써 제나라 토벌을 위한 나당연합군 형성[이때 장보고는 당군으로 참전] ⇒ 이는 사서에 기록된 한민족 최초의 해외파병
-나당연합군이 제나라 치청번진을 공격하자 내부반란으로 마지막 절도사였던 이사도가 살해 당하면서 819년 제나라 멸망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668)한 지 150년 후인 819년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나라가 또다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6. 신라 장보고의 신라방/구당신라소
-장보고張保皐(787?~846)는 한반도에 신라와 발해가 있었던 남북국南北國시대(698~926)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때인 828년 청해진淸海鎭[현 완도]대사가 되어 서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 일본, 남방, 서역 등과의 무역을 통해 당대 최고의 해상무력집단을 이루었던 해상왕
-당시 당나라 동해안의 산동반도, 강회江淮지방[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사이 평원 지역], 항주만 등에 750년부터 조성된 신라인 자치구역 즉 코리아타운인 신라방新羅坊[도시 지역]과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시골 지역]가 신라와 중국과의 교역 거점
-828년 산동반도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현 위해威海시 영성榮成시 석도진石島鎭에 법화원法華院[현 이름은 적산법화원이며 이곳에 장보고 기념관과 동상 등이 있음]이란 절을 세워 재당 신라인의 결집지가 되었음
-805년 무렵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간 후 당의 무령군武寧軍 장교가 됨.
-819년 이정기 장군의 제나라 마지막 왕 이사도(재위 806~819)를 토벌하는 진압군으로 당시 신라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으로 참여하여 제 멸망에 기여
-821년 전역하여 산동 영성 적산포에 머물면서 당-신라-왜를 오가며 무역활동
-828년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완도에 1만 명 군사로 청해진 설치하고 대사大使로 임명.
-청해진대사 시절(828~835) 동안 해적활동과 신라인 노예매매가 사라졌음.
-838년부터 왕위 다툼에 참여하여 846년 문성왕에 대한 반란
-846년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
-죽은 지 5년 후 851년 청해진을 없애고 거주민을 벽골군碧骨郡[현 김제金堤]으로 강제이주시킴으로써 청해진은 완전히 없어짐
-중국과 일본 사서에서 우리보다 장보고를 훨씬 높이 평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소개된 이름은 활 잘 쏘는 아이 즉 활보란 뜻의 궁복弓福과 궁파弓巴이며, 삼국사기에는 중국 신당서를 인용해 장보고張保皐로 기재
*중국은 '지킬 보保'와 '언덕 고皐' 자를 써서 나라 지키는 언덕과 같은 동아시아의 큰 인물로서 적산명신赤山明神으로 추앙
*일본에서는 '보배 보寶'와 '높을 고高' 자를 써서 보배 즉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명신明神으로 추앙
-장보고가 한국사에 끼친 영향
*선종의 국내 확산: 해적 출몰을 막아 선종 승려의 당 유학 항로 보호
*당나라시대 유행했던 도자기 월주요越州窯 기술을 도입 생산한 신라청자는 고려청자로 발전: 강진, 해남 등지에서 월주요 발견
7. 고려ㆍ조선의 요동 정벌
-요동 정벌이란 고려高麗(918~1392)와 조선朝鮮(1392~1897; 대한제국 1897~1910)이 원元나라(1271~1368)와 명明나라(1368~1644) 영토였던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의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려와 조선이 일으키거나 계획한 전쟁
-1~3차의 요동 정벌 가운데 현 중국 땅을 공격하여 차지했던 것은 1차 뿐
- 1차 요동 정벌은 원·명 교체기인 1357, 1369, 1370년 세 차례에 걸쳐 31대 공민왕恭愍王(재위 1351~1374)의 명으로 원나라 영토였던 동녕총관부東寧摠管府 지역을 공격하여 일시 점령 ⇒ 1차 요동 정벌을 동녕총관부 정벌이라고도 함
-2차 요동 정벌은 1388년 명나라가 고려 영토였던 철령 이북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시도하자 이를 차단하면서 요동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최영崔瑩(1316~1388)이 주도한 요동 정벌로서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 ⇒ 2차 요동 정벌을 위화도 회군이라고도 부름
-3차 요동 정벌은 1395년 조선 조정에서 올린 표전문表箋文 사건으로 명나라가 정도전鄭道傳(1342~1398) 압송을 요구한데 대한 정도전의 요동 정벌 계획으로서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죽으면서 무산
1)1차 요동 정벌(1357~1370)
*1357년 공민왕의 명을 받은 장수 인당仁璫이 압록강을 건너 압록강 하구 원나라 역참으로 한반도와 요동의 통로인 파사부婆娑府[현 단동丹東] 등 세 곳을 공격 격파 ⇒ 이는 670년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와 신라 설오유 연합군의 요동 오골성 침공 이후 700여 년만에 이루어진 요동 정벌
*1369년 이인임李仁任을 총사령관으로 원의 동녕총관부 공격 시작
*1370년 1월 이성계가 1만 5천 군사로 동녕총관부 오녀五女산성(우라于羅산성) [현 요령성 본계시 오녀산성] 점령하여 주민 1만 명 투항
*1370년 11월 이인임, 이성계, 지용수池龍壽, 임견미林堅味가 요동 중심지인 요양성 점령 ⇒ 이는 발해 멸망(926) 후 445년 만에 요동지역 탈환
*요양성 전투 중 군량 창고에 불이 나 양식 부족으로 곧 회군함으로써 한민족 마지막 요동 진출이 되었음.
2)2차 요동 정벌(1388)
*1차 요동 정벌 후 공민왕이 요동 포기 선언하자 1371년 명나라는 북원의 요양행성遼陽行省 점령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朱元璋, 재위 1368~1398)가 고려에 강경정책 시행함으로써 고려와의 관계 악화
*1387년 북원北元(1368~1635) 나하추[납합출納哈出]가 명나라에 항복, 1388년 북원이 명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북원 멸망
*1388년 명나라는 철령 이북 땅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철령위 설치 시도
*철령위 설치를 무산시키려고 최영과 고려 32대 우왕禑王(재위 1374~1388)은 요동정벌 준비
*1388년 4월 18일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는 군사 5만을 이끌고 서경西京을 출발하여 5월 7일 위화도威化島 도착[서경에서 위화도까지 19일 걸렸음]
*1388년 5월 22일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6월 1일 개경에 도착[같은 거리를 9일 걸렸음]함으로써 요동 정벌 무산
*회군 배경: 북원 멸망에 일조하여 고려 정계에 기반이 허약한 친명파 이성계는 명나라 영토인 요동 정벌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며, 명나라가 반격하면 자신의 영지인 동북면이 가장 큰 피해 우려
○철령위 위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철령 위치는 북한 강원도와 함경남도 경계인 원산만 부근 함경남도 안변[바로 위 지도의 '철령1']
*함경남도에 있는 철령위 설치를 무산시키기 위해 과연 요동까지 공격했을까???
*중국 명사明史 조선열전에는 “철령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부터 (원나라) 개원로開元路[현 길림성 장춘시]에 속해 있었으니 (명나라) 요동에서 다스리게 하고, 철령 남쪽은 예부터 고려에 속해 있었으니 본국(고려)에서 다스리라. 서로 국경을 확정해서 침범하지 말라[1387년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재위 1368~1398)가 고려 우왕에게 보낸 국서]”고 기록
*1388년 우왕이 명 홍무제에게 답신으로 보낸 표문에는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은 철령이라고 꾸미니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기재
*중국 사료에서 말하는 철령위는 두 곳인데, 하나는 1388년 옛 철령성 봉집현奉集縣[현 요령성 심양 동남쪽 진상둔진陳相屯陣 봉집보奉集堡]에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으며, 다른 하나는 1393년 북쪽 옛 은주銀州[현 요령성 심양 북부 철령시 은주구]로 이전하여 설치
*이 두 군데 철령위 중 첫 번째인 2차 요동 정벌의 시기나 장소로 비교해 볼 때 1388년 설치했다가 곧 폐지된 현 요령성 심양 동남쪽 진상둔진 봉집보의 철령위가 2차 요동 정벌의 도화선이 된 철령위[바로 위 지도의 철령2]로 비정批正[비평하여 정정함]됨
○위화도 위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위화도 위치는 현 중국 단동시 앞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인 하중도河中島
*그런데 이 위화도는 문헌에 기록된 위화도 특징에 부합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
*인하대 대학원 박사과정 허우범은 2019년 논문 <위화도의 위치 재고찰>에서 위화도는 압록강 지류 포석하 중상류의 2개 지류 사이에 위치한 중국 요령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서점자徐店子로 비정
특징 | 관전만족자치현 서점자 | 현 압록강 하중도 위화도 |
압록강 지류로서 주분에 3개의 강줄기가 흐름 | O | X(본류 하중도) |
산봉우리(태조봉)와 개천(회군천)이 있음 | O | X(평평한 토사층) |
강변에 있는 땅을 뜻하는 연강沿江 및 강변지지江邊之地 | O(강물이 휘돌아나가는 지역을 섬으로 부름) | X(강변이 아닌 강 가운데) |
경작과 둔전 가능한 옥토로서 중국 월경자와 불법경작자 추쇄推刷[도망자를 붙잡아 본고장으로돌려보냄] | O | X(사람이 살 수 없음) |
배나 뗏목 없이 직접 걸어서 건넘 | O | X(강폭이 넓고 강물이 많아 걸어서 건널 수 없음) |
3)3차 요동 정벌 계획(1392~1398)
*조선 건국(1392) 후 명태조 홍무제가 취한 조선에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에 대한 반발로서 정도전이 준비한 요동 정벌 계획으로서 1차 왕자의 난으로 무산되면서 계획으로 끝남.
-명나라 홍무제의 조선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정도전의 중앙집권화 및 군사력 강화[사병 철폐, 진법 연습 등]가 요동 정벌을 위한 것이라는 의구심에서 생긴 것으로 보임.
-명나라는 1395년 표전문 사건[명 태조의 이름과 같은 음을 가진 불경스런 글자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으로 사신을 억류하고 작성 책임자로 정도전을 중국으로 보내줄 것으로 조선에 요구
-명이 억류한 정총 등은 정도전 일파이며, 이방원李芳遠(1367~1422) 일파인 권근과 하륜 등은 억류하지 않거나 풀어줌.
-1397년 명에 억류된 정총이 죽자 정도전과 그 일파들은 3차 요동 정벌을 위한 전쟁 준비 착수
-이성계의 잦은 병치레와 다른 대신들도 요동 정벌 불가를 역설함으로써 이성계 역시 불가 쪽으로 기울어짐.
-1398년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戊寅靖社 또는 방원의 난 등으로도 불림]으로 정도전이 살해됨으로써 3차 요동 정벌 무산
-정도전이 주도한 3차 요동 정벌은 명의 압박으로 불안해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1. 윤내현, 한국 열국사 연구, 만권당, 2016
2. 위키백과 Wikipedia
3. 강경구, 고구려 부흥운동의 신고찰, 한국상고사학보 47, 2005
4. 박영호, 산동이야기, 씨에디터, 2019
5. 서울신문 인터넷판 2018. 3. 12 철령위 기사
6. 인천일보 인터넷판 2019. 10 .1 위화도 기사
7. 김기표, 북벌의 역사, 역사문화모임, 2018.
2020. 6. 2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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