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현재 심사정 "도성을 바라봄(망도성도)" "바위와 파도(강암파도)" 본문
"서울의 풍경을 그린 경구팔경도첩京口八景圖帖"
○화가로서 통유의 경지, 입신의 경지에 다다르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행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에 대핸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은 고사하고, 같은 시대를 산 친구들이 전하는 흔해빠진 문집에서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니 그에 대한 증언 따윈 애당초 씌어진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비정한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그저 어두운 그늘 속에서만 살아가야 했던 그의 불우한 일생을 누구도 주목할 필요조차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세상을 뜬 그 이든해에 지은 묘지명이 전하고 있어 심사정의 삶을 얘기해주고 있다.
그의 먼 손자뻘 되는 심익운이 지은 '현재거사 묘지명'이 그것이다.
"청송 심씨는 그 공훈과 덕이 세상에 떨쳤다.
우리 만사부군晩沙府君(증조할아버지 심지원)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했는데, 거사(심사정)는 그의 증손자였다.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사물 그리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네모난 것과 둥근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 일찍부터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옛 사람이 그린 화결畵訣(청나라 화가 공현이 쓴 산수화 교본)을 보고 탐구한 뒤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여 마침내는 이제까지 해오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그윽하면서 소산한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래의 고루한 방법을 바꾸는 데 힘써 중년 이후로는 융화천성融化天成(천성이 다른 사람들과 잘 융화됨)하여, 잘 그리려고 애써 기대하지 않아도 공교롭게 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관음대사와 관성제군의 상을 그렸는데, 그것은 꿈에 본 것을 그린 것이었다.
연경에 다녀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연경의 시중에는 거사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돌이켜보건대 어려서부터 말년에 이를 때까지 근심과 걱정,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나날을 보냈으면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할 때에도 그림물감을 풀어내면서 궁핍한 쓰라림이나 천대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 통유通幽(이치나 고아한 정치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그윽하며 미묘함을 넘어섬)의 경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멀리 이국 땅에까지 전파되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를 사모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사의 그림은 이렇듯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대성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략)"
○천재 화가 겸재 정선에게 배웠으나 겸재를 뛰어넘다
소론이었던 심사정의 할아버지가 붕당정치로 권력을 잃고 실각하자 심사정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회면당한 채 그저 어두운 그늘 속에서 숨죽여 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의 그림 그리는 재주를 통해 현실적 피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또 그렇듯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질곡의 인생을 살아가야 했기에 여느 화가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신만의 삶의 성찰이 진득이 담겨있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어려서부터 말년에 이를 때까지 근심과 걱정,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나날을 보낸 불우한 화가였기에 그는 누구보다 정서의 확대, 감정의 깊이, 관조의 고조를 붓 끝에 담아낼 수 있게 된다.
비록 고민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을지 모르나, 고통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당대의 천재 화가였던 겸재 정선에게서 어려서부터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천재의 그림세계를 비교적 일찍부터 속속들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사정은 스승 정선의 그림을 그대로 이어가거나 닯질 않았다.
아니 닮으려 몸부림하였을지라도 처음부터 닮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심사정은 스승인 정선의 그림과는 그 화풍에서부터 전연 색다른 자신만의 또 다른 그림세계를 열어나게 된다.
선비화가의 낙관이 찍혀있는 그림이라면 으레 누군가의 제시題詩 몇 마디가 격식처럼 따라붙기 마련인데, 하지만 심사정의 그림 속에는 그 흔해빠진 제시 한 편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그의 그림세계를 인정해 준 후견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당대에 널리 명성을 얻은 그림 감식가이자 수장가이기도 하였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9~1770),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과 함께 같은 화가의 길을 걸었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그들이다.
이들 모두가 순전히 심사정의 그림을 매개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심사정이 38살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때마침 심사정이 김광수의 집을 김광국과 함께 어울려 한때를 보내면서 <와룡암소집도臥龍菴小集圖>(간송미술관 소장)를 그렸는데, 그 그림 속에 김광국이 지어 부친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이 전한다.
"········소나기가 그치자 정원에 온통 피어오르는 경관이 마치 송나라 미불의 산수화와도 같았다.
현재는 무릎을 끌어당기고 앉아 한동안 경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말고 갑자기 큰소리로 그림종이를 찾았다.
그리하여 현재의 화의畵意를 빌려 <와룡암소집도>를 그렸는데, 그 필법은 윤택하면서도 깊이 스며들어 나와 상고당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조촐한 술자리가 벌어지면서 참으로 즐겁게 놀다가 돌아올 때 내가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집에서 곧잘 즐겨 감상했다."
노론의 이병연과는 서로 정반대의 당색이었지만 서로 다른 둘 사이를 오고간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그리하여 이병연의 나이 79세 되던 해인 1749년 가을, 43세의 심사정이 그를 위해 그려드렸던 <소림모정도疏林茅亭島>(간송미술관 소장)가 지금에도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섯 살 연하의 표암 강세황 또한 심사정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지지자이자 후견인이었다.
그는 심사정과 같은 길을 걷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더욱이 강세황은 누구보다도 심사정의 그림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현재가 겸재보다 더 낫다'고 스스럼없이 평가한 몇 안 되는 전문가였던 것이다.
특히나 그는 어느 누가 제시 한 편 지어 붙여주는 이 없는 심사정의 그림을 보고 수차례 화평과 함께 화제를 쓰곤 했을 뿐더러, 오십 대에 접어들어서는 두 사람의 그림을 한데 모아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간송미술관 소장)을 엮었을 만큼 돈독함을 과시하고 있다.
강세황이 심사정의 <수묵화죽도축水墨畵竹圖軸>(간송미술관 소장)에 부친 발문을 보아도 둘의 예술적 우정이 그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모든 화가들이 현재를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
그와의 교분은 옛날 세속 밖에서 노닐 때였는데, 헤어져 있으니 어찌 자주 서로 볼 수 있겠는가.
수장하고 있는 축軸 중에 (그의 그림이) 두어 점 있어서 이따금 펼쳐보며 크게 기뻐한다.
(그의 그림을) 친구 삼으면서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나는 외롭지 않다네·····"
다시 말해 심사정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하더라도, 당대에 손꼽히는 그림 감식가들과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로부터는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심사정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화가 누구도 받지 못한 찬사였다라는 것이다.
○청산은 어찌 말이 없이 학처럼 야위었느냐
정선의 그림세계가 산수화에서 시작되어 산수화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면,
심사정은 산수화보다 화조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굳힌 듯하다.
강세황 역시 <현재화첩玄齋畵帖>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재는 처음에 심주沈周를 공부하여 초년에는 피마준披麻皴(위는 가볍고 아래는 무겁게 하는 필법)이나 혹은 미점법米點法(점을 조합하여 이루어가는 필법)을 사용했으며, 중년에 들어서는 대부벽大斧劈(무겁고 곧은 형세의 필법)을 시작했다.
현재는 그림에서 능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으나, 가장 잘 그리는 것이 화훼花卉(화초花草 즉 꽃과 풀)와 초충草蟲(풀벌레)이었고, 그 다음이 영모翎毛(새와 짐승)였으며, 그 다음이 산수화였다·····"
24살의 이덕무(1741~1793) 또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성문 밖 모화관을 지나 반송지 북쪽 골짜기에 자리한 58살의 심사정 집을 찾았던 방문기에 강세황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심사정이) 비단 위에 방금 네 폭의 그림을 끝마쳤는데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어떤 도인이 구경하고 서있는 그림과, 짙푸른 나무 그늘과 하얀 폭포 사이에 두 나그네가 마주앉아 있는 그림과, 약초를 캐느라고 광주리와 도끼를 땅 위에 내려놓은 그림과, 야윈 노새를 타고 가는 주인 뒤에 초라한 시동이 책을 메고 다르는 그림이다.
모두가 다 고상하여 속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림들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그림을 잘 그린 당대의 철장哲匠(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조영석, 정선과 더불어 그 명성이 같았는데, 혹자는 그의 초충과 묵룡墨龍 솜씨는 아무도 견줄 수 없다고 했다.
조영석과 정선 두 사람은 이제 다 늙어서 지금의 대가를 논한다면 이 한 사람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사정이 산수화를 전연 그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간송미술관에서 볼 수 있으며, 서울 풍경을 그린 <경구팔경도첩>(개인소장)이 전해지고 있다.
산수화에 대한 평가 또한 마땅히 그의 차지였지만 화훼와 초충만큼 평가받지는 못했던 듯하다.
<경구팔경도첩>에 부친 강세황은 발문에서 이렇게 감탄사를 금치 못하고 있다.
"파도가 일렁이고 험한 바위너설이 깎아지른 듯하다.
어디를 가리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히 기절奇絶(비할 데 없이 기이함)하여 보는 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심사정 집을 찾았던 이덕무는 그때의 방문을 뒷날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체로 그는 기이함에 빠져 꽉 막혀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때묻고 조잡한 자들에 비하면 그 빼어남이란 천연天淵(위로는 높은 하늘까지 이르고, 아래로는 깊은 못까지 이름)과도 같은 분이다."
이날 이덕무와 심사정이 나눈 대화를 재생해보자.
"·······선생님, 지금 무엇을 그리고 계시는 겁니까?"
"·······내가 지금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줄 자네는 어찌 알았는가?"
"그림을 그리고 계실 때의 선생님 눈빛을 보아두었었습니다."
"·······자네는 언제 거기까지 보아두었던가."
"하면 이제는 선생님께서 지금 무슨 그림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지 제게 일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또 말인가?
자네 역시 내가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 줄 이미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일세."
"아닙니다, 선생님. 이번에는 제가 진정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그리도 알고 싶은 것인가?"
심사정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덕무는 그가 자신에게 들려줄 생애 마지막 깨달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쳐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무얼 그리고 있는지 꼭 알고 싶습니다."
"·······하면."
심사정은 한동안 두 눈만 끔벅이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청산靑山을 그리고 있노라 대답했다."
이덕무는 그의 눈가에 소리 없이 괴어가는 눈물 방울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스러지고만 그의 눈빛에 그만 속으로 탄식했다.
그럴 때 심사정이 독백처럼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청산은 어찌 말이 없이······· 학처럼 여위었는고."
※출처-그림을 제외한 글은 박상하 지음, '조선의 3원3재 이야기'(2011, 일송북)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20. 6. 2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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