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단원 김홍도의 그림 세계 본문
어느 누구보다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를 잘 안다는 그의 스승 강세황의 글 두 편을 통해 김홍도의 그림 세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예나 지금이나 어떤 화가가 각기 한 가지 기능을 떨쳤지 두루 솜씨를 겸할 수는 없었는데, 사능士能[김홍도의 어린 시절 이름]은 근래 우리 나라에 나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배워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인물·산수·신선 및 불교 그림, 꽃과 과실나무, 새와 벌레, 이런저런 물고기며 게 따위의 그림이 모두 묘품妙品에 드는데 이르렀다.
옛 사람에 비한다 해도 거의 그와 더불어 대항할 이가 없을 것이다.
뿐 아니라 신선과 화조화에 장기가 있어 이미 한 세상을 울리고 후세에 전하기에도 충분하다.
더욱이 우리 동방의 인물이며 풍속을 옮겨 그리기가 뛰어나서 선비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나 장사꾼이 시장가는 모습, 나그네며 규방의 전경, 농사짓는 사내며 누에치는 아낙네, 큰 집과 겹문, 거친 산과 물 같은 풍경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모양새를 빠짐없이 구석까지 다 그려내는데, 그 모양과 생김이 어그러지지 않으니 이것은 결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무릇 그림이라는 것은 모두 전해오는 이전의 작품을 따라서 배우고 익히며 공력을 쌓아서 비로소 비슷하게 되는 것인데, 창의를 홀로 얻어 자연의 조화를 교묘히 빼앗는 데에 이른 것을 보면 어찌 하늘이 내린 기이함이 아니며, 세속을 멀리 뛰어넘었다 말하지 않으랴.
옛사람이 이르기를, 닭과 개는 그리기가 어렵고 귀신은 그리기가 쉽다고 했다.
다시 말해 닭과 개와 같이 우리들의 눈에 쉽게 보이는 것은 대충 사람을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뛰어난 솜씨로 도화원에서 명성을 얻었던 진씨, 박씨, 변씨, 장씨는 거의 김홍도만 못했다.
대저 누각, 산수, 인물, 꽃나무, 벌레와 물고기, 새 따위는 그 형상이 극히 닮지 않음이 없어 종종 자연의 조화를 뺏어오는 일이 있긴 하였으나, 그러나 조선 4백 년의 역사상 김홍도만이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해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욱이 날마다 벌어지는 백 천 가지의 일과 세속의 갖가지 양태를 옮겨 그리기를 잘하여 길거리며 나무터, 시전의 전방과 노점상, 과거장과 놀이마당은 한번 붓을 들면 사람들이 손뼉을 마주치며 기이하다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른바 세상에서 일컫는 '김사능의 속화俗畵'가 이것이다.
진실로 신형스런 마음과 지혜로운 머리로 천고의 묘한 이치를 홀로 깨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듯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서유구가 남긴 다음 증언에도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김홍도는 여염의 일상 풍속을 곧잘 그렸는데, 대저 저잣거리나 화류가, 여관 앞 나그네의 모양새에서부터 땔나무와 오이를 파는 장사꾼, 승려와 여승, 불자들과 봇짐꾼이며 비렁뱅이 따위를 형형색색 각기 그 묘를 다하여 그렸다.
그리하여 그가 한번 화권畵卷[세로보다 가로의 길이가 긴 두루마리식 족자 그림]을 펼치게 되면 부녀자와 어린아이조차 모두가 턱이 빠져라 웃으니 일찍이 고금의 화가 중에는 던 일이다······"
이렇듯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풍속화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의 풍속화가 워낙 폭넓게 알려진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그림 세계를 이해한다면 풍속화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가 그려낸 작업량은 동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 조선말에 이를 때까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였을 뿐 아니라 방대하기까지 했다.
실로 그를 조선의 천재 화가 '3원3재三園三齋'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로 손꼽는데, 아니 단군 갑자 이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일컫는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1788년 가을 김홍도는 정조로부터 금강산과 관동 팔경으로 그려오라는 어명을 받게 된다.
40대 중반의 김홍도는 모든 화원의 꿈이었던 금강산을 마침내 유람하여 그 빼어난 절경을 자신의 화폭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조희룡의 <호산외기>에 의하면, 정조는 이때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별도 지시까지 내렸다고 한다.
금강산을 비롯하여 관동 팔경을 그리러 떠나는 그에게 '경연經筵[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의 협의하던 일]에 모시는 대신처럼 대우하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금강산 유람을 신명나게 하였던 건 스승 강세황까지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윽고 김홍도는 관동 팔경과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그린 자신의 최고 걸작을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명승과 명승을 연결해가며 무려 40~5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 그림을 보고서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애완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홍도의 이 최고 걸작은 안타깝게도 지금 전하지 않는다.
순조 연간에 궁궐의 화재로 말미암에 그만 소실되고야 만 것이다.
다만 화첩 형식의 초본 <해산첩海山帖>이 전5권 70폭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글은 박상하 지음, '조선의 3원3재 이야기'(2011, 일송북)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20. 6. 2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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