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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2 - 한반도 말갈의 성격2: 신라와 백제 북쪽 말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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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2 - 한반도 말갈의 성격2: 신라와 백제 북쪽 말갈

새샘 2020. 7. 22. 22:51

<숙신족 이동로와 말갈 분포도>

4. 신라와 백제 북쪽 말갈의 성격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여러 말갈 가운데 그동안 한국사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온 것은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이다.

백제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자주 침략했던 이 말갈은 도대체 어떤 세력이었을까 하는 것이 학자들의 관심이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말갈을 동예로 보아왔다.

이에 따라 이 말갈을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말갈과 구별하여 가짜 말갈로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말갈이라는 이름은 한국 문헌에 먼저 등장하는데, 나중에 등장한 중국 문헌의 말갈이 진짜이고 한국 문헌의 말갈이 가짜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다음 사실들은 말갈이 동예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삼국사기》<지리지>에 명주溟州는 본래 예濊의 옛 땅으로 하슬라何瑟羅였는데, 신라 성덕왕 때 소경小京을 두었으나 그곳이 말갈의 땅과 연접해 있어서 태종무열왕 때 소경을 폐지하고 주州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나오는 예는 신라 북쪽에 있었던 예로서 일반적으로 동예라 부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기록에서 동예와 말갈을 같은 집단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 두 집단이 분명히 서로 다른 집단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삼국사기》에는 말갈에 관한 기록도 보이지만 동예에 관한 기록도 보인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갈의 기록과 동예에 관한 기록이 함께 보이는 것은 말갈이 동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편찬자들이 같은 정치 집단의 이름을 일관성 없이 동예와 말갈 2가지로 혼용해서 썼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예와 말갈은 다른 집단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셋째로 말갈이 등장하는 지리적 위치가 동예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앞글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1 - 한반도 말갈의 성격1'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말갈은 신라보다는 백제와의 관계에서 훨씬 먼저 등장한다.

말갈이 백제와의 관계에서 등장한 것은 서기전 17년부터인데, 신라를 침략한 것은 125년부터였다.

만약 말갈이 동예였다면 말갈은 백제보다는 신라와의 관계에서 먼저 등장했어야 한다.

왜냐면《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에 따르면, 진한과 동예는 경계를 접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진한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진한은 오늘날 경상북도 지역이었고 동예는 오늘날 강원도 지역이었다.

반면 백제는 마한의 서북부, 오늘날 임진강 유역에서 건국되었다.

그러므로 백제 북쪽에 있었던 말갈은 신라와 국경을 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3가지 사실들은 동예와 말갈이 같은 집단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말갈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삼국사기》기록을 검토해보자.

 

말갈은 온조왕 10년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쳐들어갔는데, 백제군은 곤미천에서 싸우다 패하고 청목산靑木山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런데 백제는 아신왕 4년, 그전에 패수 전쟁에서 고구려에 패한 보복을 하기 위해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회군한 바 있다.

그러므로 백제가 말갈과 싸웠던 청목산은 백제의 북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갈은 온조왕 11년에 병산책을 파괴했고, 다루왕 3년에는 마수산馬首山 서쪽을, 7년에는 마수성과 병산책을 침략했다.

그런데 온조왕 8년에 백제가 마수성과 병산책을 쌓자 낙랑이 "이런 행동은 우리 땅을 잠식하려는 뜻이 있는 것 아니냐"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러므로 말갈이 쳐들어왔던 마수성과 병산책은 백제의 북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갈은 진사왕 3년에 관미령關彌嶺을 쳐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8년에 고구려는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러므로 관미성은 백제의 북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은 말갈이 백제의 정북방, 오늘날 임진강 북쪽에 자리잡았음을 알게 해 준다.

따라서 말갈이 동예일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말갈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신라가 초기에 말갈과 접촉할 수 없었음도 알게 해준다.

 

한 가지 말갈의 지리적 위치와 연관하여 유의해야 할 점은 말갈의 위치가 일정하지 않고 계속 변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말갈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간에 백제는 영토에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북쪽 국경도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도 국경 변화와는 상관없이 말갈은 계속 백제의 북부를 침략했다.

 

이 점은 신라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라 지마 이사금 14년에 말갈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한 후, 신라의 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된 뒤에도 말갈은 계속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말갈이 한 곳에서 붙박이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이동했음을 알게 해준다.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은 같은 집단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집단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삼국사기》에서 백제·신라와 관계된 말갈의 기록을 보면, 백제와 관계된 기록이 나타나는 기간에는 신라와 관계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신라에 관계된 기록이 나타나는 기간에는 백제와 관계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즉 서기전 17년(온조왕 2년)~서기 108년(기루왕 32년): 백제와의 관계에서만 나타나고 신라와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125년(지마 이사금 14년)~203년(내해 이사금 8년): 125년(백제 기루왕 49년)의 백제와 관계된 기록 1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난다.

210년(초고왕 45년)~391년(진사왕 7년): 백제 관계에서만 나타나고 신라와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395년(내물 마립간 40년)~481년(소지 마립간 3년): 신라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고 백제와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482년(동성왕 4년)~507년(무령왕 7년): 백제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고 신라와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위의 분류 가운데 125년부터 203년까지 말갈이 신라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기간 동안 백제와도 관계를 가진 기록이 125년에 1건 보이는데, 그것은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므로 백제가 5명의 장수를 파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이 백제와의 관계 기록은 말갈이 신라를 침공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말갈이 백제를 침공한 시기에는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신라를 침공한 시기에는 백제를 침공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이 같은 집단으로서 이동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말갈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우선 말갈에 대한 다음 기록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백제 온조왕) 18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엄습해 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생매장했다."

"(백제 고이왕) 25년 봄에 말갈의 장長 나갈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치니 왕은 그 사신을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이 인용문에서는 말갈의 우두머리를 추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삼국사기》에서 고구려·백제·신라·최씨낙랑국·대방·동예 등의 나라 통치자에 대해서는 모두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말갈에 대해서만 이들과 달리 추장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말갈이 국가가 아니라 그보다 작은 집단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삼국사기》에 보이는 여러 말갈은 모두 전쟁 기록 속에 나타나며 군대로 등장한다.

그들은 주로 전쟁하는 집단이었다.

물론 말갈 사람 모두가 전쟁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기록에 나타난 말갈들은 모두 전쟁하는 집단이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반도 중부에 있었던 말갈은 항상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는데, 백제와 신라의 북부 국경은 남북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백제와 신라의 국경 변화에 따라 말갈의 위치도 변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필요에 따라 이동해 다니는 집단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삼국사기》에 백제 또는 신라와 관계를 가지고 등장하는 말갈에 관한 기록을 모두 확인한 결과 신라와의 관계 15건, 백제와의 관계 32건 등 모두 47건인데, 말갈과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은 백제 구수왕 25년에 말갈 추장 나갈이 좋은 말 10필을 백제에 보냈다는 것이 유일한 반면 나머지 46건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 기록으로서 주로 말갈이 백제와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이다.

 

앞글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1 - 한반도 말갈의 성격1'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말갈은 숙신의 후예였다.

숙신은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중국과 가까운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자리 잡아 고조선의 거수국들 가운데 가장 일찍 중국과 교류했다.

그런데 숙신의 사신은 중국을 방문할 때 활·화살·화살촉을 예물로 가지고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대에는 민간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신이 가지고 간 예물은 국제교역의 상품 역할을 했다.

숙신은 그들의 특산품인 활·화살·화살촉을 중국의 특산품과 교환하거나 높은 가격으로 팔았던 것이다.

 

그런데 숙신이 이런 무기를 중국에 수출했다는 것은 무기 만드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뜻한다.

무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면 그것을 다루는 솜씨나 전쟁능력도 뛰어났을 것이다.

이런 숙신은 고조선 말기에 와서 오늘날 요서 지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이어서 한사군이 설치됨에 따라 여러 곳으로 흩어져 이주했는데, 연해주의 읍루를 제외하고는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주로 약탈이나 전쟁에 종사하면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말갈이라 불렸으나 중국인들에게는 계속 숙신이라 불리다가 북위 때(386~534년) 물길로 불렸으며 그 뒤에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된 듯하다.

 

이들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말갈이라 불린 뒤에도 한반도와 만주 밖에서는 중국인들에게 계속 숙신이라 불렸음은 이 기간의 여러 중국 문헌에 숙신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도 역시 숙신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지역의 말갈은 백제와 신라를 자주 침략했으면서도 고구려를 침략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말갈은 고구려 및 최씨낙랑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로서 최씨낙랑국이 말갈을 시켜 백제를 침략했으며, 고구려는 말갈과 연합하여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고구려가 말갈과 연합하여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시기는 백제 북쪽에 있었던 최씨낙랑국이 멸망한 뒤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갈은 원래 최씨낙랑국의 남부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그 지역을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의 남부에 있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최씨낙랑국·숙신(후의 말갈) 등은 고조선시대에 오늘날 요서 지역에 서로 가까이 있었던 거수국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백제 왕실이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다고는 하지만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토착세력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이주해 온 말갈과는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말갈은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이주해 왔다는 점에서 최씨낙랑국이나 고구려와 같은 처지였다.

그러므로 최씨낙랑국이나 고구려는 전쟁에 능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인정해주면서 전쟁에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은 처음에는 최씨낙랑국에 부용附庸된[독립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집단이었으나 최씨낙랑국이 멸망한 300년 이후에는 고구려에 부용된 집단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 부용집단이었음은《구당서》「북적열전」<말갈전>에, 그들은 모두 수십 부部나 되는데 각각 추수酋首가 있어 더러는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고 더러는 돌궐에 신속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은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5. 마치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말갈은 여러 종류가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 보더라도 고구려에 속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말갈, 백제와 신라의 북쪽 한반도 중부에 있었던 말갈, 중국 당나라에 속해 있었던 말갈, 발해에 속해 있었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말갈 등 네 종류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 문헌에서는 속말부·백돌부·안거골부·불열부·호실부·흑수부·백산부 등 일곱 부의 말갈이 오늘날 내몽고자치구 적봉 북쪽에서 몽골 동부 및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말갈은 여러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성격이 서로 달랐는데도 말갈이란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비록 서로 다른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지만 원래 같은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 숙신이었다.

숙신은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한민족의 일부였으므로 말갈은 한민족이었던 것이다.

 

숙신은 오늘날 요서 지역, 즉 난하 동부 유역에 있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그런데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오늘날 요서 지역을 차지하자 그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영토를 잃고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숙신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 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자 그 지역에 남아 있던 토착인들이 다시 한 번 이동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숙신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일부는 한반도와 만주에, 일부는 중국의 동북 변경에, 일부는 내몽골자치구 동부에서 몽골 동부 및 연해주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내몽골자치구와 몽골 동부 및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여러 말갈 가운데 흑수말갈만이 '숙신→읍루→물길→말갈'이란 이름 변화를 거쳤고, 다른 말갈들은 '숙신→물길→말갈'이란 이름 변화를 거쳤으며, 백제와 신라 북부에 있었던 말갈과 고구려에 속해 있었던 말갈은 '숙신→말갈'이란 이름 변화를 거쳤다.

 

말갈이란 이름은 중국보다 한민족이 먼저 사용했다.

숙신의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해 오자 한민족은 그들을 말갈이라고 불렀다.

한민족이 그들을 말갈이라 불렀음은 서기전 37년의 기록에서 이미 보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들을 계속 숙신이라 부르다가 북위시대에 이르러 물길이라 불렀고, 북조 말기인 563년 무렵에 말갈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말갈이란 이름은 한민족이 원래 사용했던 것을 중국인들이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그들을 총칭하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숙신족 가운데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던 일부는 읍루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다른 집단들은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그 지역에 있었던 나라의 부용집단이 되었다.

숙신은 원래 우수한 활과 화살·화살촉 등을 생산하여 중국에 수출했으며 무기를 잘 다루고 전쟁에도 능숙했는데,  그러한 전통이 말갈에게 이어졌던 것 같다.

그런 성격은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주로 전쟁이나 약탈을 하면서 생활하는 집단이었다.

 

지금까지는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은 동예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원래 백제의 북쪽, 오늘날 황해도 남부를 차지하여 최씨낙랑국에 부용된 집단이었다.

그러나 최씨낙랑국이 멸망하고 그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된 뒤에는 고구려의 부용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황해도 남부 지역에 있었으므로 강원도 지역에 있었던 동예일 수는 없다.

 

이 말갈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 때문에 이들을 동예로 잘못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갈이 신라의 북부를 침략한 것은 125년 이후로, 백제를 침략하기 시작한 서기전 17년보다 140여 년이 지난 뒤부터였다.

이는 신라가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한 후 말갈과 접촉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말갈이 처음부터 신라 북쪽에 있었던 동예일 수는 없다.

그리고 말갈이 백제의 북부는 물론 신라의 북부도 침략하여 문헌에 위치가 일정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이들이 필요에 따라 이동하는 집단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한마디로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은 동예나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고, 최씨낙랑국에 종속되어 있다가 최씨낙랑국이 멸망한 뒤에는 고구려에 종속된 부용집단이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7.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