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혜원 신윤복의 그림 세계 본문
'색채의 마술사 혜원 신윤복'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1817?)은 색채라고는 거의 없었던 담묵淡墨의 시절에 흑백의 신성한 준법을 과감히 깨뜨리면서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엄중한 신분사회 밑에서 인간주의를 표방하고 이를 예술로까지 성취해 놓은 조선의 천재화가 '3원園3재齋' 가운데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불행했다.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이 그랬듯이 그 또한 시대와 화합하지 못했다.
시대가 요청한 풍속화를 그렸으나 풍속화를 그렸기 때문에 시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 한탄 미천한 환쟁이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신윤복은 단연 미스터리하다.
유독 신윤복의 경우만 사료조차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그가 그려 남긴 일부 그림을 제외하고는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제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으며, 그의 인물됨이나 행적은 또한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에 관한 기록이 극히 일부 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화사보략畵士譜略>의 일부 기록과 함께 오세창이 조선시대 화원들의 계보를 밝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일부 전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화사보략>에는 신윤복은 정조 어진을 그린 궁중화원인 신한평의 아들로서 가업을 계승하여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풍속화로 기생이나 무속 놀이를 하는 풍경을 곧잘 그렸으며, 재주나 학식에 있어 비록 단원과 현재에는 미치지 못하나, 당대 화원들이 범본範本[본 받을 만한 대상]만을 모방하던 시절에 오직 신윤복만이 현실 묘사를 주장하여 일가를 이룬 점은 파천황破天荒[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행함]이라 아니할 수 없는 큰 공이 있었고, 더욱이 그 유려한 선과 아담한 색채로 얻어낸 인물들은 한결같이 조선 사람의 골격과 표정을 고스란히 살펴놓았다고 신윤복을 평가하였다.
물론 이런 짧은 기록만으로 신윤복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말이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아니하여 말 같지 않음]이다. 이 정도의 내용이라면 그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후대에 전언되어 내려오는 것보다도 빈약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 말고 다른 길을 또 기대할 수 없음을.
이런 기록을 따라 250여 년 전의 그를 더듬어 찾아가는 것 말고는 딴은 또 접근해 볼 수있는 길이 없는 것을.
신윤복의 젊은 날의 초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3대에 걸쳐 내려온 화원 집안의 분위기는 또 어떠했을까?
특히 그의 아버지 신한평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은 화원들만이 그릴 수 있는 임금의 어진을 모두 3차례나 그린 극소수의 궁중화원이었다.
중인이었던 만큼 정5품 이상의 벼슬은 하지 못한다할지라도 먹고 살며 그림을 배우는 데에는 별 궁색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데 최근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歷>에 뜻밖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의 불운한 말년을 엿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신한평이 정조의 비판으로 두 차례나 귀양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자비대령화원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장식 성향이 두드러진 신한평의 풍속화는 곧잘 정조의 눈밖에 벗어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정조는 신한평의 그런 그림보다는 사대부 출신의 궁중화원인 이인문의 문인 화풍을 더욱 선호했던 것이다.
신윤복의 젊은 날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으로부터 절대 영향을 받아 같은 화원의 길을 걷게 된다.
뿐 아니라 그 또한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 아버지 신한평에 이어 궁중화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아버지 신한평은 그림 묘사보다는 채색 부분에서 자신의 진가를 더 평가 받았던 것 같다.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작업에 모두 3차례나 부름을 받았을 적에도 주관화사主管畵師[임금 얼굴 즉 용안을 그리는 화원]나 동참同參화사[용안을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를 그리는 화원]보다는 매번 수종隨從화사[색을 입하는 화원]로 참여하고 있음이 그런 점을 입증한다.
그림의 조응력조調應力[조화로운 정도]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채색을 거의 도입하지 못하고 있던 시대에 유난히 신윤복에게서만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원색적인 채색의 원숙함은 그런 아버지 신한평의 절대 영향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절은 날 신윤복에게 절대 영향을 끼친 이는 아버지 신한평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불과 13년을 앞서 살았으나, 이미 20대 후반부터 임금의 어진을 그려내며 천재성을 널리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회화사를 다시금 써나가고 있는 김홍도 또한 신윤복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시켜나가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림의 배경을 과감히 생략해버린 김홍도의 구도는 신윤복의 원색 풍속화를 완성시켜 나가는데 중대한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윤복의 그런 원색 풍속화는 유교적 윤리관이 지배 이념이었던 시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시대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해 그에 대한 기록조차 남길 수 없는 금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화원들의 계보를 밝히는 <근역서화징>에서조차 단 두 줄만이 조심스레 전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은 신윤복이 궁중화원의 신분으로 기방 집 출입이나 일삼으며 너무나 비속한 여색을 그렸다고 해서 오래지 않아 그만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배척은 비단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도화서에서 쫓겨난 뒤에도 신윤복에 대한 배척은 계속되어, 그가 그린 그림에 감식은 고사하고 어느 한 사람 제시題詩조차 지어준 이가 없었다. 시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풍문일 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아직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이후 신윤복은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오직 그가 그린 그림 30여 점만이 오늘날까지 전하면서 희미하게나마 그의 존재를 겨우 확인시켜주고 있을 따름이다.
신윤복운 그렇듯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고 마는 듯했다.
그를 찾는 이는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데 사후 백여 년이 지나 신윤복은 자신이 구현한 원색만큼이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일제 식민 통치로 우리 역사가 신음하고 있던 시대에 그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챈 일본인 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관야정關野貞]에 의해 다시금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울 인사동 거리에는 우리의 지나간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일제 식민 통치 시대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 잡화점들은 그런 인사동 거리로 줄줄이 몰려들었다.
순전히 조선의 문화재를 헐값으로 긁어모으기 위해서였다.
조선 미술에 관심에 많았던 세키노 역시 그런 인사동 거리에서 한 권의 낡은 화첩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미 백여 년 전에 까맣게 잊고 만 신윤복의 풍속화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신윤복의 풍속화를 비로소 그가 재발견한 것이어었다.
그러나 비록 세키노에 한 발 늦긴 했지만 신윤복의 풍속화를 재발견한 이가 또 있었다.
일본인 잡화점들이 인사동 거리를 온통 뒤덮고 있던 시절, 당시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적 상점을 운영하던 젊은 조선인 전형필(지금의 간송미술관 설립자)이 그였다.
'민족 문화재의 보존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다'고 생각한 전형필은,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고 만 조선의 문화재를 되찾는 데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다.
세키노에 의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신윤복의 풍속화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몇 년에 걸친 어기찬[한번 마음먹은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성질이 매우 굳센] 노력 끝에 막대한 거액을 들여 일본인 거상에게서 마침내 신윤복의 풍속화첩을 되찾았다.
그것이 곧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간송미술관 소장)이다.
시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만 이후 희미하게나마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사실 조선의 화가들 가운데 신윤복의 풍속화만큼 널리 알려진 우리 옛 그림도 딴은 또 없을 성싶다.
고궁이나 민속 박물관에 가보면 실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의 그림은 각종 기념품 속에 복제되어 인기를 모으고 있음이 어렵잖게 목격된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가히 열풍이다 싶은 그의 풍속화가 대개 몇몇 그림에 한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그림을 만나볼 수 없는 것이다.
'
이는 물론 유명세에 비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이 그림이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일제 강점시대 일본인 거상에게서 거액을 들여 되찾은 <혜원전신첩>에 담긴 풍속화 30점 말고는 다른 그림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혜원전신첩> 또한 베일에 싸여있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을 전하고 있다.
<혜원전신첩>이 그려지 시기가 신윤복의 20대 초반인 1780년대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혜원전신첩>은 원래부터 화첩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을 근대미술평론가 오세창이 소장하게 되면서 화첩을 분리하여 다시금 엮은 것으로 보인다.
화첩 속 그림의 왼쪽에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라는 오세창의 제자題字가 쓰여 있고, 제자 아래 '위창葦滄 서書'라는 오세창의 서명과 함께 오세창의 호 위창이란 붉은 낙관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미뤄 짐작되고 있다.
어쨌든 신윤복이 그림을 그린 시대는 전례 없이 큰 변화를 나타냈던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였다.
18세기 영·정조 대의 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음란한 유흥이 사회적으로 자주 문제가 되어 몇 년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한 금법과 형률이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초 이래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을 수 있었던 신분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하루 아침에 상천常賤이 양반 행세를 하기 일쑤였다.
또 그로 말미암아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한 반가의 출현으로 기방창가의 번창, 화류계나 사찰을 중심으로 한 부녀자의 음란유흥 등 상천과 반가를 가릴 것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폐단이 심했다.
더구나 관가의 부패조차 만연해져 사회적 기강마저 크게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조건은 어떤 형태로든지 필연코 그 시대 예술의 경향을 결정짓는데 반영된다는 명제를 고려해 볼 때, 앞서 언급한 영·정조 시대의 사회적 조건이나 분위기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예술을 요청했다.
바로 그런 요청에 대답하고 나선 예술이 다름 아닌 신윤복의 원색 풍속화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윤복은 당시의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야 했다.
다른 시대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또 다른 조건이었던 탓에 남다르게 원색마저 과감히 도입하여 여색과 반가의 이중성을 사실대로 담아냄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성을 획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독창성은 아직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절대 금기였다.
신윤복이 당대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이란 저주받고 추방당한 가난한 영혼으로부터 창조되어지며 비로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져간 지 백여 년이 지나 다시금 우리들 곁으로 화려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딴은 그러한 독창성을 획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이 글은 박상하 지음, '조선의 3원3재 이야기'(2011, 일송북)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며, 그림 출처는 http://haksunje.com/m/product_detail.html?brand_uid=95495.
2020. 7. 2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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