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표현방식 다섯 가지 본문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작품에 실제 지명을 대부분 밝혀 놓았지만, 실경을 닮게 그리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는 실경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그래서 필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을 '입[구口]에서 고운 비단[라羅]이 나온다' 즉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으로
'구라체口羅體' 또는 '구라화법'으로 불렀다.
정선의 <박연폭朴淵瀑>은 대상 실경을 과장하고 변형한 구라를 아주 직관적·감각적으로 그려낸 대표작이다.
정선의 진경그림을 전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 다섯 가지 화법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첫째는 하늘에서 굽어본 듯, 제3의 시점으로 근경과 원경을 동시에 포착하는 조감도鳥瞰圖식 부감俯瞰 화법,
둘째는 시점을 이동하며 다시점多視點으로 기억된 형상을 조합하는 합성合成 화법,
셋째는 주제를 부각시키며 전체 풍경을 줄여 그리는 축경縮景 화법,
넷째는 풍경을 간결하게 추상화한 단순화單純化 화법,
마지막 다섯째는 풍경 대상을 주역의 음양론으로 재해석하는 화법이다.
하나, 솔개처럼 굽어본 부감법
부감법을 적절히 보여주는 그림은 정선의 1711년 작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이다.
1711년 금강산을 처음 여행하고 그린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안에 있는 첫 번째 그림으로,
이후 같은 제목의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은 근경의 단발령 전체와 그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금강산이 담겨 있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내금강까지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일제강점기 단발령에 올라 기행문을 쓴 많은 문인들은 정선이 그림에 구라를 쳤다고 했다.
원래 단발령에서 금강산은 웬만큼 맑은 날씨가 아니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1년에 화창하게 갠 날이 며칠 안 되었다고 한다.
단발령을 오르며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산세는 남종화 산수준법인 미점米點으로 처리한 반면,
멀리 떨어져 구름 위로 솟은 금강산은 뾰족뽀족한 수직준법을 반복해 표현했다.
정선은 풍경을 포착하는 화각畵角이 굉장히 넓다.
보통 사람은 가만히 서서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볼 수 있는 좌우 폭 화각이 대개 43~60º인데,
겸재는 90º, 때에 따라서는 아예 180º까지 움직인다.
카메라로 보면 초점거리 28㎜보다 더 넓은 광학렌즈여야만 소화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계속 고개를 돌려가며 그린 것이 정선 화법의 특징이다.
정선 이전의 다른 화가들은 상상하지 못했던 대상 풍경을 보는 방식이다.
정선의 너른 화각은 '호호노인'으로 불릴 만큼 자연을 포용하는 너비가 넓었던 그의 품성과 같이 하는 것일까요.
내가 보는 대상을 그리면서 화면의 근경에 내 위치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제3의 시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하늘에서 부감하는 것이며, 부감법 또는 조감도법이라 일컬어진다.
필자는 솔개처럼 하늘을 높이 날아서 본 것과 같다 하여 솔개화법이라 부르고 싶다.
정선은 실제가 아닌 상상으로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부감하여 한 화면에 담았다.
많은 시인들이 흔히 새처럼 날아 금강산 전체를 보고 싶다고 노래했는데,
정선이 그들의 열망을 그림으로 대신해준 셈이다.
부감법은 천취天趣의 재능을 가진 정선의 논리적 화법이지만, 동시에 동양인의 자연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서양의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 나와 대상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았다.
이는 르네상스부터 발달된 투시원근법이 그런 서양인의 생각을 잘 말해준다.
이에 반해 동양인의 자연관은 정선의 그림처럼 대상과 나를 한 화면에 담았다.
인간과 자연, 나와 대상을 한 덩어리로 인식한 자연관이 <단발령망금강산>을 비롯한 진경산수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둘, 움직이며 보는 다시점 합성법
두 번째는 그림 속 대상 풍경에 따라 보는 곳이 변하는 다시점의 합성 방식이다.
이 화법을 1747년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의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를 예로 들어 자세히 알아보자.
<장안사비홍교>는 1740년대 <금강전도>의 장안사 세부와 비슷한 구성의 그림이긴 하지만,
<금강전도>의 하단 장안사 부분에 비해 부감이 더 심해졌다.
그림에서 자신감을 보여주듯, 양필법兩筆法[한 손에 붓 두 자루 쥐고 그리기]의 쌍선雙線 구사에서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는 걸작이다.
장안사 입구의 무지개다리 비홍교는 내금강산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림 속 비홍교는 조선 말 홍수로 무너졌고, 지금은 수평식 콘크리트 다리가 대신하고 있다.
화면 좌우에는 토산과 바위산이 가득한 내금강 입구가 배치되어 있다.
그림 왼쪽 토산이 정양사로 오르는 길이고, 개울 건너로 장경봉과 명경대 가는 길이 보인다.
이런 구성은 필자가 장안사지에서 직접 본 풍경과 비슷하다.
그러나 상당한 변형도 이루어졌다.
특히 산세 부분을 현장사진과 비교해보면, 위로 솟은 모습들이 과장되어 있다.
중앙의 먼 관음봉을 비롯한 산봉우리들을 두 배로 올려놓았다.
가운데 석가봉 암산은 양필로 내리 그은 수직준법으로,
오른쪽 장경봉과 왼쪽 정양사로 올라가는 토산은 언제나처럼 짙은 농묵의 미점준으로 대비시켜 그렸다.
<장안사비홍교> 그림을 실제 장안사 풍경과 맞추려면,
1998년 8월 금강산 답사 때 필자가 초점거리 35㎜ 렌즈로 찍었던 최소 3개의 사진을 합성해야 된다.
즉 그림 속 장안사비홍교의 풍경은
내강리에서 본 비홍교, 비홍교에서 본 장안사, 그리고 장안사에서 본 내금강, 이렇게 총 3개의 시점이 필요하다.
3개의 사진을 합성하고 솔개처럼 부감 상상해서 조합시킨 <장안사비홍교>의 이런 방식은
요즈음 디지털아트와 같은 개념이어서 흥미롭다.
정선이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최고의 디지털 아티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다시점의 합성은 움직임과 함께 이루어졌다.
정선은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실경들을 현장에서 그리지 않고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
눈으로 스케치한 셈이다.
때문에 기억으로 그린 그림은 현장과 크게 달라졌다.
요즈음 인지과학자들 표현대로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 그림이 잘 보여준다.
정선의 기억은 눈에 든 형상의 외모를 다르게 묘사했지만, 대신 몸으로 느낀 실경을 표현했다.
폭포나 개울 물소리, 혹은 바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필묵법을 구사하여 실경이 주는 감명,
곧 대상의 이미지를 정확히 전달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선식 진경회화의 예술적 장점이다.
셋, 중심 이미지를 강조한 축경 방식
풍경에서 만난 중심 이미지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축소 생략하는 축경縮景 화법은 맨 처음 나온 <박연폭>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시각적 닮음과는 무관할 정도의 구라口羅 화법으로 실경을 그렸다.
반면 실경대상과 닮은 축경화법의 대표작은 <박연폭>과 비슷한 시기에 그린 1751년작 <인왕제색仁王霽色>이다.
<박연폭>이 소리의 이미지를 닮게 옮겼다면,
<인왕제색>은 주봉 바위의 시각적 이미지를 닮게 그린 정선 최고의 걸작이다.
정선은 76세인 1751년 윤달 5월 하순, 소나기가 지나간 직후에 이 작품을 그렸다.
'제색霽色'은 '소나기가 지나간 직후 갠'이란 뜻이다.
소나기에 젖은 인왕산 바위의 위용을 짙은 적묵법으로 드러냈고, 그 아래로 비안개가 깔린 모습을 담은 정선의 대작이자 걸작이다.
70대 중반 노인의 먹과 붓 에너지가 넘쳐난다.
근경에는 솔숲의 저택 지붕이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정선의 위치인 셈이다.
왼쪽 옥류천과 오른쪽 청풍계 사이 언덕쯤에 위치한 이 저택은 일단 이춘제의 소유로 추정된다.
이춘제의 부탁으로 저택과 솔숲 주변 풍경을 그린 1740년 <서원소정도>나 <삼승조망도>의 가옥과 담장 위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는 정선의 집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740~1741년의 ≪경교명승첩≫ 중 <인곡유거>나 1746년작 ≪퇴우이선생진적첩≫의 <인곡정사>를 떠오르게 하여, 정선이 자기 집에서 본 인왕의 풍광을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인왕산 전경을 포착한 너른 시각으로 보면, 그린 위치가 이춘제의 삼승정보다는 정선의 인곡정사에 가깝다.
정선이 지금의 옥인동에서 살면서 늘상 보던 풍경을 그림에 담았기에 <인왕제색>은 정선의 진경작품 가운데 실경과 가장 닮았다.
특히 인왕산 주봉의 암반이 쏙 빼닮았다.
농묵을 덧칠한 적묵법의 주봉은 물론이려니와 주봉의 왼쪽 바위 사이에 끼인 뾰족바위와 오른쪽 아래의 선바위까지 모두 비슷하다.
70여 년 동안 봐온 산봉우리니까 구라를 치려야 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덕택에 이번에는 이미지 표출이 아닌 실경사생 유형의 진경산수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실경의 맛을 살린 또 다른 근대성이 읽히는 정선 회화세계의 일면이다.
한편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직후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를 그린 것은
19세기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이 눈앞에 전개된 풍경을 그린 것과도 동일하다.
인상파 그림이 야외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순간순간의 풍경을 포착한 데서 큰 업적으로 인정받았다면,
정선의 <인왕제색> 역시 인상파 그림에 못지않은 근대성을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실제 인왕산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주봉만 닮았지 그 왼쪽과 오른쪽 바위는 안 닮은 것이다.
정선은 민둥바위 왼쪽 도성의 훈좌訓左[조선시대 훈련도감이 경비하던 지역 중 왼쪽]를 심하게 좁혀 그렸다.
산 전체를 압축해 끌어당겼고 오른쪽도 축소했다.
근경의 저택에서 인왕산을 본 좌우 화각은 150º 가량이다.
현재의 송석원 길쯤, 그림 속 정선의 시점에서는 초점거리 28㎜ 광각 렌즈의 카메라 뷰파인더에 인왕산 전경이 담기지 않는다.
이 시점보다 최소한 200~300m 이상 한참을 뒤로 물러서야 전체가 잡힐 정도다.
그런데도 중간이 축소되고 청풍계에 흐르는 바위들이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림이 부감시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저택에서 옥류천 쪽으로 시점을 이동해야 파노라마 카메라에 인왕산 능선이 찍혀,
이때야 비로소 그림과 닮게 인왕산 전경이 덜 축소된 모습으로 잡힌다.
정선의 축경 화법은 1739년작 <청풍계>나 <삼승정>, 1740~41년작 ≪경교명승첩≫의 한강명승도들, 1742년작 ≪임술년화첩≫의 두 그림, 1746년작 ≪퇴우이선생진적첩≫의 <계상정거> 등 강변 풍경에 많이 나타난다.
옆으로 긴 화면 화면에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기는 하지만, 실경에 서면 상당히 풍경을 압축하는 단축화법을 보여준다.
그런 한편 ≪경교명승첩≫의 한강 명승도들은 세심한 표현기법이나 청록산수풍으로 그려졌고,
기록풍속화적 요소도 지니고 있어 정선 진경산수화의 또 다른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별도로 분류한다면, 정선의 진경 화법은 여섯 가지가 될 수 있다.
넷, 기억된 풍경의 단순화 방식
네 번째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은 단순화이다.
정선은 70대 중후반에 <인왕제색>이나 <박연폭> 같은 기세 찬 그림도 그렸지만,
기억에 남는 풍경의 이미지를 가볍고 단순하게 압축하는 화풍도 시도했다.
이는 노년기의 또다른 경향이라 할 수 있다.
1750년대 중후반에 그린 <금강대金剛臺>가 단순화풍의 대표작이다.
금강대는 만폭동 너럭바위 위로 솟아 있다.
정선은 화면 아래에 안개구름을 깔고 왼쪽에는 송림 위로 솟은 청학대를, 오른쪽에는 금강대를 소략하게 나란히 배치해 놓았다.
그 위로 소향로봉과 대향로봉을 그려놓았다.
60대 때인 1730~40년대에 그린 <만폭동>의 복잡한 구성과 산만한 선묘에 비해,
<금강대>는 간략한 구성으로 고요하다.
이는 실제로 본 지가 오래되어 자연히 기억에 또렷한 금강대의 중심 형상만 남은 결과로 여겨진다.
그러는 바람에 더욱 회화성이 높은 명작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옅푸른 담채로 눌러주어 연하게 드러낸 소향로봉과 대향로봉 실루엣은 현대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두 바위의 정상과 두 봉우리를 보는 화각은 수평각이 30º 정도인데,
초점거리 105㎜ 이상인 망원 렌즈로 멀리서 좁게 포착한 구성이다.
이런 방식은 미점 토산에 푸근히 안긴 1750년대 중후반의 <정양사>와 더불어 정선의 최말년 회화 경향으로,
기존 작품과 다른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자연, 풍경의 이미지, 또는 그 서정적 느낌은
또렷한 햇살 아래에서보다 눈비가 내리거나 안개 속에 어슴푸레 실루엣으로 드러날 때 더 깊이 다가온다.
이는 멜랑꼴리 melancholy[우울감이나 비애]한 상태로 쉽게 감상적이 되기 때문이다.
반투명한 흰 비단에 비친 산세 이미지를 보며 풍경의 마음을 생각하고,
이를 화면에 옮기는 밑그림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정선의 생각을 전하는 글귀는 흥미롭다.
눈에 보이는 풍경보다 마음으로 담은 진경산수화를 추구한 정선이
바로 그런 실루엣 방식으로 자연을 작품화했음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산수의 마음으로 산수를 본다'는 동양화론을 구체화하려는 화가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대단한 설명인바,
<금강대>와 같은 말년 작에서 그 형상이 적절히 표현된 듯싶다.
다섯, 음양론의 재해석으로 대상을 과장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은 풍경을 음양론으로 재해석한 방식이다.
이는 정선의 산수화 대부분에 적용되는 방식으로 <박연폭>의 솟은 바위와 폭포, 그리고 숨은 그림처럼 넣은 남녀 성기형태 바위, <금강전도>의 수직준 바위표현과 미점의 토산표현 등이 그것이다.
정선의 1730~40년대작 <성류굴聖留窟>은 풍경을 음양론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그림이다.
경북 울진의 쌍굴인 성류굴은 정선이 청하현감 시절(1733~35) 여행했을 법하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류굴 앞에는 동해안으로 왕피천이 흐른다.
실경을 보면 부드러운 강변에 토산과 벼랑의 바위산이 부터 있다.
그러나 정선은 바위산을 높이 숫게 과장하여 토산과 분리해 그렸다.
1980년 초반 필자가 성류굴 답사를 처음 갔을 때 실경과 그림이 닮지 않아 아연실색했었다.
정선이 이곳에 와보지도 않고 그렸을 거라 확신했을 정도였다.
그 당시에는 이 구라화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정선은 가운데 선바위를 우뚝하게 변형시켰지만, 현장에 가보면 그렇게 과장할 여지가 거의 없다.
결국 정선은 굴을 여성에 비유하여 음陰의 기운으로 보고, 이에 따라 남근형 바위를 불끈 세워 양陽의 기운을 맞춤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풍경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정선이 ≪주역≫에 밝았다고 전해오듯이, 조선 땅을 풍수지리 개념의 음양론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요즈음 떠오른 생각인 것으로 보면, 나이가 들어와 그런 감이 오는 모양이다.
화법을 살펴보면, 바위나 벼랑의 표현은 명대 절파화법식 부벽준을 적묵법으로 변조했으니 북종산수화법이라 할 수 있다.
토산에는 피마준에 태점, 혹은 미점산수의 남종화법이 구사되어 있다.
정선은 이렇게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을 절충해 자기형식을 창출한 것이다.
이런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은 동아시아 산수화의 고전적 전형과 그 이론을 완성한 곽희의 산수론에 공감한 것이다.
'자연과 일체화된 마음'이야말로 산수를 볼 때나 그릴 때 의식해야 하는 '산수의 마음[임천지심林泉之心]'이다.
※출처: 이 글은 이태호 지음, <한국미술사의 라이벌>(세창출판사, 2014)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20. 8. 3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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