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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말살형(담나티오 메모리아이)

새샘 2020. 9. 2. 20:50

<2세기 경 로마시대 제작된 톤도 Tondo[원형 예술 작품을 말함]인 로마 황제 세베루스 가족. 오른쪽 위가 셉테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 황제, 그 왼쪽은 황후 줄리아 돔나 Julia Doma, 황제 아래는 카라칼라 Caracalla 왕자, 그 옆 왕자인 게타 Geta 얼굴은 지워져있다.(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B%A1%9D%EB%A7%90%EC%82%B4%ED%98%95>

 

라틴어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Damnatio memoriae>(영어 condemnation of memory)라고 하는 기록말살형 개인의 존재를 완전히 이 땅에서 지워버리는 망각의 형벌이다.

개인의 정체성, 관련된 일체 공공문서, 사진, 장소마저도 깡그리 제거하며, 가족, 지인, 그가 알았든 모든 사람까지도 몰살시킨다.

즉 이 땅에 머물다 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도록 만드는 형벌인 것이다.

 

기원은 고대 로마로서 이 망각의 형벌은 대역 죄인에 대한 기억을 사후에 모조리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의 사후에까지 계속 적용되는 이 벌은 한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악의 형벌로 여겨진다.

로마인들은 황제의 실정을 막기 위한 견제와 위협의 도구로 이 형벌을 사용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콘세크라티오 Consecratio>(영어 consecration> 즉 축성祝聖이며 한 사람을 신성하게 만들어 영원히 잊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인물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카이사르 Caesar의 동조자이자 클레오파트라 Cleopatra의 연인이었던 그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에게 반기를 들었다]와 칼리굴라 Caligula, 네로 Nero, 콤모두스 Commodus[이 셋은 미치광이가 되거나 폭력적·가학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게타 Geta[위 그림에서 얼굴이 지워진 로마 황제로서 왕위를 두고 경쟁하던 형 카라칼라에게 암살되었다는 것 말고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가 있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죄인들의 석상과 동상은 파괴했고, 비문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은 지워 버렸고, 그들의 초상이 들어간 화폐는 녹여 없앴다.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해도 사형에 처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기록 말살의 명령이 닿지 못했던 궁벽한 지역들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 앞서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형벌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를 개조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다 이단으로 몰려 사제들과 대립했던 파라오 아크나톤 Akhnaton[아케나텐 Akhenaten이라고도 함] 역시 망각의 형벌을 받았다.

유독 기억 말살에 몰두했던 람세스 2세 Ramesses II자신이 싫어했던 전임 파라오 여럿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는 아멘호테프 3세 Amenhotep III부터 호렘헤브 Horemheb 사이에 존재했던 파라오들의 이름이 표기된 카르투슈(불어 cartouche)[이집트 상형문자 중에서 파라오의 이름을 표기할 때 쓰는 특별한 기호]를 모조리 없애게 했다(물론 외딴 지방에 남아 있는 기록 덕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지른 헤로스토라토스 Herostratus가 이 형벌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작 그는 유명해지고 싶어 방화를 했다고 고백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치도 히틀러 Hitler에 반대한 예수회 사제 알로이스 그림 Alois Grim에게 유사한 형벌을 내렸다.

 

스탈린 Stalin 역시 뛰어난 혁명가들, 특히 적군赤軍의 창시자인 레온 트로츠키 Leon Trotsky를 위시한 레닌의 동지들을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스탈린에게 찍힌 인물들은 사진에서 지워졌고,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캄보디아 독재자 폴 포트 Pol Pot는 1975년에서 1979년까지 담나티오 메모리아이의 극단을 보여 주었다.

그는 대상자의 가족은 물론 친구, 이웃, 더 나아가 대상자가 이 땅에 머물다 갔다는 사실을 증언해 줄 모든 사람을 죽임으로써 인간 존재의 흔적을 근원적으로 말살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해 공식적으로 잊힌 사람만 170만 명,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였다.

 

※이 글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기억 1'(열린책들, 2020)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9. 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