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산성 발굴로 추적하는 세력 다툼, 아차산 고구려 보루 본문
서울 시내 한가운데의 고구려 유적
서울 광진구 아차산牙且山(또는 阿嵯山, 峨嵯山)을 한 시간 정도 걸어 오르면 어른 키 높이의 성벽이 나타난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방어시설로 분류되는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관찰하거나 막는 시설]다.
남한 최대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 보루堡壘들 가운데 하나인 제4보루 유적의 일부다.
고구려 성벽은 나무판을 세우고 그 사이에 흙은 채운 뒤 밖으로 돌을 층층이 쌓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중국 지안[집안集安]의 국내성 일대 고구려 석성石城도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백제나 신라와는 다른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 방식인데
고구려 유적이 산재한 북한보다 남한의 아차산에서 먼저 확인되었다.
이곳은 헬기 착륙장이 들어서 가장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1997년 아차산 보루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당시 군용 헬기장을 표시하는 H자 돌들 가운데 고구려시대 온돌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숨진 곳이다.
고구려 온달 장군의 모델로 여겨지는 고승高勝 장군도 603년 아차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차산성 성벽 위에 오르면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답게
한강과 중랑천, 왕숙천 일대는 물론 멀리 몽촌토성과 풍남토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고구려군이 백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왕숙천을 통해 남진한 것처럼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도 왕숙천을 따라 남침했으며,
국군과 북한군이 한강 일대에서 벌인 주요 전투지는 6세기 당시 고구려-백제 전투지와 상당 부분 겹친다.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군사 전략성 요충지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지금 아차산성 오르는 길은 온통 숲길이지만 1500년 전에는 말이 다니는 길인 마도馬道가 놓여 있었다.
고구려 보루 곳곳에서 발견된 각종 마구馬具가 이를 증명한다.
말을 탄 고구려 장수들이 가파른 산길을 헤집고 보루 곳곳을 누비며 병사들을 독려했을 것이다.
9개월 동안 찾아 헤맨 명문 토기 반쪽
아차산 고구려 보루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1994년 4월 구리문화원에 의해 처음 이뤄졌다.
아차산이 행정구역상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공정 논란 이후 고구려에 대한 사회 관심이 높아지자 광진구도 뒤늦게 뛰어들었다.
1994년 당시 구리문화원에서 근무한 심광주 현 한국토지주택박물관장이
아차산 지표조사를 통해 고구려 토기들을 발견했다.
심광주는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에 일대 성벽을 '고구려 보루'라고 명시했다.
통상 지표조사를 한 고고학자가 발굴까지 맡는 게 일반적이지만,
심광주는 몽촌토성과 구의동 출토 유물을 정리해본 경험이 있는 서울대박물관이 발굴하는게
출토 맥락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양보함으로써,
서울대박물관이 1997년 9월 23일 아차산 발굴의 첫 삽을 떴다.
발굴에 착수한 지 한 달쯤 지난 10월 25일 아차산 4보루 중앙부에서 둥근 토기 접시가 하나 발견되었다.
앞서 토기 조각은 여러 개 나왔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반으로 쪼개진 접시 한쪽에 세로로 쓴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유적에서 명문 토기는 매우 희귀한 편이다.
발굴단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명문을 차근차근 해석해나갔다.
'후부도後部都'란 글귀였다.
그런데 일부러 깬 듯한 그릇 단면에서 글자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단면에 낀 이끼로 추정컨대 오래전에 깨진 것임이 분명했다.
온전한 문장을 파악하려면 나머지 토기 파편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다.
이날부터 지난한 토기 색출 작업이 시작되었다.
발굴을 위해 파낸 흙을 모두 수거해 일일이 체로 걸러봤지만 허사였다.
산을 내려가 그동안 찾아낸 토기 조각들을 풀어놓고 하나씩 다시 조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은 여기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발굴단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움을 삭여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그토록 찾아 헤맨 명문 토기 반쪽은 이듬해 7월 30일 발견되었다.
처음 반쪽을 찾아낸 곳에서 남쪽으로 불관 2~3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이었다.
파낸 흙을 임시로 보관할 공간이 부족한 산성 발굴 현장의 특수성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1997년 발굴에서 '후부도' 조각이 나온 지점을 경계로 남쪽 면에
임시로 흙을 쌓아놓는 과정에서 토기 반쪽이 묻힌 것이다.
나머지 반쪽 토기에는 '○兄형'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었다.
두 쪽을 합치면 '후부도○형後部都○兄'이란 다섯 글자의 글귀가 만들어진다.
앞 두 글자 '후부'는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뒤 세 글자 '도○형'은 인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발굴단은 해석했다.
여기서 '형'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 어구로 보았다.
이 견해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는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아차산 4보루에 이어 홍련봉 2보루에서도 2005년 명문 토기가 나왔다.
점시 모양의 이 토기에는 '경자庚子'라는 명문이 적혀 있었는데, 520년 경자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년명 토기는 유물이 묻힌 유적의 절대 연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고구려는 5세기 무렵 대전까지 남하할 때에는 몽촌토성에 주둔했으나
500년 무렵 백제에 점차 밀리면서 한강 이북의 아차산에 보루를 건설했다.
그러다 551년 한강 유역에서 최종 철수하면서
구의동은 물론 아차산 일대 보루들도 모두 폐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차산 보루는 500~551년까지 약 50년 동안 존속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부 백제 연구자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한강 이남을 군사적으로 일시 점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발굴단 현장 책임조사원이었던 최종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한강 유역은 물론 충남 지역까지 고구려식 지명이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단순한 군사 정벌로 그친 게 아니라 행정적으로 지배한 근거라고 반박한다.
아차산 4보루에서는 둘레 210미터가량의 성벽과 7곳의 건물터, 간이 대장간 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인근 홍련봉에서는 아차산 보루들 가운데 유일하게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기와 건물이 흔치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지역에 고구려군의 사령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구의동 보루에 남겨진 기습 공격의 흔적
500년경 축조된 아차산 보루는 백제-신라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물러난 551년까지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 군사기지로 쓰였다.
최종택은 장수왕이 한강을 빼앗고 남진을 본격화한 475년 이후부터 500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보루 없이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가 아차산 일대에서 발견된 고구려 토기들에 비해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즉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토기는 500년에서 55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몽촌토성과 구의동, 아차산 보루에서 발견된 고구려 토기에 얽힌 비화도 눈길을 끈다.
1977년 광진구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을 계기로
구의동 유적이 발굴 조사될 당시 발견된 토기를 놓고 학계는 한동안 혼선을 빚었다.
당대 고고학계 거두였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백제토기라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구의동 유적을 백제 고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1989년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네 귀 달린 긴 목 항아리(광구장경사이호廣口長頸四耳壺)'가
고구려 토기임이 밝혀지면서 이것과 닮은 구의동 유적 토기도 백제가 아닌 고구려 토기임이 드러났다.
이는 전성기의 고구려가 아차산과 능선으로 이어진 구의동 보루와 더불어 한강 건너 몽촌토성에까지
군대를 주둔시켰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1988년 서울대박물관 연구원이던 최종택은 몽촌토성 발굴에도 참여함으로써
몽촌토성 고구려 토기와 구의동과 아차산에서 출토된 토기를 함께 분석했으며,
이후 북한과 중국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자료까지 아울러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아차산 보루의 고고 자료들은 551년 당시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후퇴한 정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한강변에 있는 데다 소규모(10명) 병력만 주둔해 백제군의 공격에 취약했던
구의동 보루에서는 쇠솥과 무기류가 여러 점 출토되었다.
이는 생존에 필수 도구인 쇠솥과 무기를 챙겨서 후퇴하지 못할 정도로
구의동 보루의 고구려군이 적군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당했음을 보여준다.
10명의 병력 규모는 고구려군의 주력 무기였던 창이 발견된 숫자를 토대로 추론한 것이다.
발굴단은 고구려군 병사 1인당 약 300발의 화살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아차산 4보루에서는 쇠솥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기류도 별로 없었다.
이곳에서는 구의동 보루보다 약 10배 넓은 면적의 온돌이 확인되어
100여 명의 병력이 주둔해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아차산 4보루에서 지휘관의 투구가 아궁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두고 최종택은
"전의를 상실한 고구려 지휘관이 철수에 방해가 되는 무거운 투구를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발굴단은 6세기 전반 아차산 일대 보루들에 2000여 명의 고구려군이 주둔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구의동에서 아차산에 이르는 각 보루는 깃발 등을 이용해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들판의 식량을 거둬 산성으로 올리는 이른바 청야淸野전술로 지구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글은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20. 10. 2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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