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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과 몽고메리

새샘 2020. 10. 21. 12:31

<패튼과 몽고메리. 평소답지 않게 서로 마주보며 활짝 웃고 있는 패튼(왼쪽)과 몽고메리(오른쪽).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흘렀다. 패튼의 진주 손잡이 콜트 권총과 몽고메리 특유의 전차병 베레모가 보여주듯, 이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남의 이목을 끌 줄 알았다. 브래들리 장군(가운데)은 두 사람 사이에서 좀 더 차분한 지휘 스타일을 구사했다.(사진 출처-https://www.pinterest.co.kr/pin/538672805425549450/)>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미국의 조지 패튼 George Smith Patton 장군(1885~1945)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윤회와 전생을 믿었던 특이한 군인이다.

패튼은 자신이 전생에 전사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오래된 전쟁이 신선한 매머드를 얻기 위한 석기 시대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트로이 목마를 건설하는 그리스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카이사르 밑에서 보병군단 사령관을 역임했고, 3차 십자군원정에서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와 함께 검을 휘둘렀다고 믿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운명은 투사가 되는 것이며, 이번에 죽는다면 시간 여행을 통해 군대가 싸우는 또 다른 전쟁터에 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전 연구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패튼은 자신의 이런 믿음을 1918년에 쓴 시에 담았다.

 

 "유리창을 통해, 희미하게, 장래에 영원히 옛날처럼 싸우며

  죽으면 또다시 투사로 태어나고 또다시 죽으리라."

 

북아프리카에 주둔하던 시절 한 영국군 장교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19세기에 살았더라면 분명히 나폴레옹의 위대한 사령관이 되었을 겁니다."

패튼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이미 그렇게 했는걸요"라고 대답했다.

진주로 장식된 권총을 차고 줄담배를 피우며 악을 쓰듯 명령하는 그는 병사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존경했다.

 

1942년 8월 윈스턴 처칠에 의해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 제8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버나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장군(1887~1976)은 엘 알라마인 전투 Battle of El Alamein(1942년 11월)에서 독일의 롬멜을 이집트 밖으로 몰아냈다.

항상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가였던 몽고메리는 행동에 옮기기 전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해 연합군 사령관들을 짜증나게 했다.

그는 철저한 사전준비, 세심한 정보, 치밀한 조직이 성공적 전투 수행의 핵심이라고 강조했고, 이러한 방침으로 느리긴 하지만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패튼과 몽고메리는 히틀러가 자랑하는 독일의 육군·공군·전차군단에 맞서 싸운 연합군의 가장 우수한 두 지휘관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이 당대의 가장 훌륭한 장군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상대방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의 전형인 몽고메리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던 패튼은 성격과 기질이 맞지 않았다.

 

<조지 C 스콧, 칼 말든, 마이클 베이츠 주연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PATTON'(1970). 1943년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 롬멜 장군의 독일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 중인 미국 제2기갑병단에 패튼 장군(조지 C. 스콧 분)이 부임한다. 유능한 부관 브래들리 장군(칼 말든 분)이 함께 했다. 패튼은 기갑병단을 엄격하게 훈련시켜 롬멜 군단을 분쇄한다. 그는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마이클 베이츠 분)을 지원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 침공 작전에 투입된다.(사진 출처-http://www.yes24.com/Product/Goods/339652)>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립은 시칠리아 침공 계획인 '허스키 작전 Operation Huskey'(1943년 8월)에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던 이 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자신이 팔레르모로 향하는 동안 패튼을 꼼짝 말고 있게 해달라고 연합군 지휘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몽고메리가 전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패튼이 아니었다.

패튼은 평소 몽고메리가 강조해온 공군 지원, 충분한 정보, 측면 보호 등을 모두 배제한 채 부대를 이끌고 곧장 팔레르코로 진격해 6일 만에 점령했다.

팔레르모 점령은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몽고메리를 격분시켰다.

둘 사이의 경쟁은 이제 개인적 감정이 되었다.

 

브래들리 Omar Nelson Bradley 장군(1893~1981)은 "패튼은 몽고메리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마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부류였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가장 훌륭한 장군이라고 확신했다.

상대방을 끔찍이도 싫어했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나란히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진영 논리에 빠져 대립과 분열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이지만,

그것이 국가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지경에는 이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10. 2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