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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과 문인에게 더 큰 책임 물은 프랑스 사법부

새샘 2020. 10. 16. 16:17

<프랑스의 대표적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던 로베르 브라지야크. 부역 지식인에 대한 관용론을 펼쳤던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물론 철저한 정의를 외쳤던 카뮈까지 이 젊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아까워하여 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사면해달라는 탄원서를 드골 장군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거부되었고 그는 결국 1945년 2월 6일 총살되었다.>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나치 괴뢰 정권인 비시 Vichy 정부의 이념에 동조하고 대독 협력에 앞장선 인사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모든 분야를 망라한 숙청 작업에서 특히 여론의 관심을 끈 것은 언론인과 문인이었다.

나치 강점기에 친독 성향 신문·잡지에 기고한 언론인, 나치와 비시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 문인들이 주요 숙청 대상이었다.

 

부역 지식인의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계는 치열한 논쟁으로 끓어올랐다.

작가인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청산론' 격돌이 대표적이었다.

모리아크는 청산론이 프랑스 국민을 '저항운동가'와 '부역자'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정치적 차원을 벗어난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했다.

반면 카뮈는 "청산 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청산론의 중심에 섰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부부, 가브리엘 마르셀 등도 청산론 진영에 참여해 부역 지식인들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했다.

 

언론인과 문인이 맨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재판부의 의도적 전략이기도 했다.

이 범주의 부역자들은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었고, 부역 행위의 증거 또한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시 정부의 주역들이 이미 국외로 도망쳐버려 당장 이들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잘 알려진 협력자들부터 처벌하면 숙청 지연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글은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어서 범죄 행위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거나 조서를 작성하기 쉽고, 따라서 신속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파리의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 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무려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중 7명이 처형되었다.

처형된 7명 중 가장 큰 논란이 된 인물은 당시 로베르 브라지야크 Robert Brasillach(1909~1945)였다.
1945년 1월 19일 재판 받을 당시 브라지야크는 36세로, 프랑스의 대표적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문화계 인사들은 사면 탄원서를 드골 장군에게 보냈다.

탄원 서명자 59명 중에는 '철저한 정의'를 외쳤던 카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2월 6일 브라지야크는 총살되었다.

 

"왜 돈으로 부역한 기업가들보다 말과 글로 부역한 자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작가 베르코르는 단호하게 답했다.

"기업가를 작가와 비교하는 것은 카인을 악마와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카인의 죄악은 아벨로 그치지만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3년가량 나치 치하에 있었다.

나치로부터 해방된 후 프랑스 사법 기고나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15만 8,000여 명이었다.

재판을 거쳐 처형된 사람과 즉결 처분된 사람을 합하면 1만여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반민족 행위자 처벌은 이 같은 프랑스의 모습과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는 일제 강점기 반민족적 행위를 했던 친일 민족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회를 설치했다.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일본 정부와 공모하여 한·일 병합에 협력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 등에 대한 처벌이 목적이었다.

이 법에 따라 국회의원 10명으로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아울러 특별 재판부를 두어 반민족 행위자들을 재판하게 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한 1년간 총 680여 건의 반민족 행위가 다뤄졌다.

이 과정에서 노덕술, 김태식 등 친일 경찰과 최남선, 이광수 등이 체포·구속되었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법률 제정과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끈질기게 방해했다.

친일 경력을 가진 경찰이 도리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1년여 만인 1949년 8월 31일에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말았다.

체포된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재판 중 판결이 확정된 것은 38건에 불과했다.

형량도 사형 1건울 포함하여 징역 12건, 공민권 정지 18건으로 가벼웠다(그나마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형량대로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몇 안 되었다).

결국 1949년 8월, '반민곡해위특별조사위원 해체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반민특위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반민족 행위자 처벌은 이렇게 첫 단추부터 프랑스와 다른 방식으로 끼워졌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10. 1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