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백제사 해석을 바꿔놓은 동아시아 최대의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본문
20년 세월이 걸린 대역사
2016년 4월에 둘러본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의 해체 보수 현장은 거대한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2019년 3월 해체 보수 작업을 마치고 공개되었다]
가설덧집 아래에 사람보다 큰 석재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크레인으로 돌을 들어올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단 위에 선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목봉을 내리치며 흙을 다지고 있었다.
백제인들은 표면이 울퉁불퉁한 돌 사이에 흙을 깔아 돌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공법을 사용했다.
이때만 해도 6층[백제시대 원형은 9층으로 추정] 중 기단부만 복원이 진행되어 석탑의 속살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는 1999년 문화재위원회의 해체 보수 결정 아래 20년 동안 진행되었다.
앞서 1998년 구조안전진단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석탑 파손 부위에 덧댄 콘크리트가 노후화되어 안정성이 우려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3년 전 해체 보수 현장에서 살펴본 석탑의 내부 구조는 독특했다.
사람 키 높이의 석벽들 가운데로 십十자 형 복도가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었다.
이 시대 석탑은 중국 요나라 시대의 거대 목탑들처럼 사람들이 탑 안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이런 유형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들 가운데 미륵사지 석탑이 유일하다.
미륵사지 석탑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동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
十자 공간의 한가운데이자 교차점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들이 마치 블록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백제시대 국보급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한때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현장을 지휘한 배병선 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장은 2009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발견 당시를 회고하며 "이곳에서 다보탑이나 석가탑 해체 보수 때에도 느끼지 못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다. 실수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인 사리호舍利壺와 사리를 모시게 된 경과를 기록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석탑 심주석에서 희대의 유물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1370년 만에 드러난 보물들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수습할 당시의 모습(사진 출처-https://www.ajunews.com/view/20190501095027806)>
2009년 1월 14일 오전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현장.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순간 배병선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되었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사리장엄구가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주석 윗면에는 먹으로 十자를 그린 선이 선명했고 테두리에서는 석회를 발라 밀봉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통상 심주석 아랫돌인 심초석心礎石에 들어있는 사리장엄구가 심주석 윗면에서 발견된 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배병선은 유물을 촬영한 사진을 들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그날 열린 간부회의에서 미륵사지 유물의 가치와 복합 문화재[공예품이자 매장문화재]의 성격을 감안해 연구소 내 건축실과 고고실, 미술실, 보존실이 총망라된 유물수습팀이 즉각 꾸려졌다.
이에 따라 최맹식 당시 고고연구실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난영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전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규식 보존과학연구실장(현 복원기술연구실장) 등 전문가 29명이 그날 오후 1시쯤 현장에 급파되었다.
현장 책임자는 고건축을 전공한 배병선이었지만, 유물 수습은 보존실 소속 함철희 연구원이 맡았다.
유물 수습은 보존처리와 직결된 전문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3시 고유제告由祭[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제사}를 치른 뒤 5시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가로 25센티미터, 세로 25센티미터, 깊이 26.5센티미터의 구멍[사리공舍利空]에는 금동으로 만든 사리호가 온갖 구슬에 파묻혀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지금껏 발굴된 백제의 금속 유물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수습팀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유물을 꺼내는 순서를 정하는 것이었다.
사리공에는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관을 꾸미는 데 쓰던 물건], 청동합靑銅盒[불교에서 공양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청동으로 만든 그릇],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백제시대 당시 유물들을 사리공 안에 봉안한 순서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봉안된 순서 자체가 귀중한 학술 자료인 데다 이 순서와 정확히 반대로 유물을 하나씩 꺼내야 손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워낙 좁은 공간에 유물들이 밀집해 있다보니 굴절 거울을 동원해도 봉안된 순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리공의 3분의 2을 채운 구슬들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현장에서 유물 배치도를 그리기가 힘들 정도로 구슬 숫자가 많아 이례적으로 3D 스캐닝을 동원했다.
무엇보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사리호와 사리봉영기 중 무엇을 먼저 꺼낼지를 놓고 수습팀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배병선은 고민 끝에 사리호부터 꺼내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인 유물 수습에 착수한 건 조사가 진행된 지 2시간이 지난 오후 7시쯤이었다.
배병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사리봉영기가 사리공 벽면에 걸쳐 있어서 밑이 살짝 뜬 상태였어요. 금판에 새긴 글자 위에 주칠朱漆[붉은색 옻칠]이 떨어져 나갈까봐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사리호랑 직접 붙어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죠."
지름 1밀리미터의 미세한 금 구슬을 꺼낼 땐 땅에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건져올렸다.
사리호와 함께 봉안된 각종 섬유류는 대나무 칼로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유물이 발견될 때마다 현장 회의→촬영→실측→수습 순으로 진행되다보니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 공기에 이미 노출된 유물들의 손상을 최소화하려면 신속한 수습이 요구됐다.
결국 수습팀은 이틀에 걸쳐 밤을 꼬박 새우며 강행군을 이어갔다.
사리장엄구 발견부터 수습 완료까지 사흘 동안 배병선은 현장에 마련한 간이침대에서 6시간만 자고 버텼다.
1월 16일 유물 수습을 모두 마친 뒤 19일 현장에서 언론 공개회가 열렸다.
이튿날 오전 유물들은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 용기에 종류별로 보관한 뒤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했다.
특히 사리호와 사리봉영기는 솜이 담긴 오동나무 용기에 별도로 넣어 옮겼다.
사리호는 조사 결과 총 삼중 구조였다.
마치 러시아 전통 인형 마주르카처럼 금동으로 만든 사리호 안에 금 사리호가, 그 안에 다시 유리 사리호가 들어 있었다.
세 종류의 사리호가 사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던 셈이다.
선화공주는 실존 인물인가?
사리봉영기에 새겨진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최고위 관직]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처음 확인시켜줬다.
그동안 고건축 전문가들은 부여 왕흥사王興寺 창건 기록(삼국사기 600년, 창왕 청동사리함 명문 577년)을 근거로 미륵사 창건 시기를 그와 인접한 600년대 초로 봤지만 실제는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였던 것이다.
명문은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의 배필로 알려진 선화공주善花公主(?~?)가 과연 실존 인물인가라는 의문도 제기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소년 시절 '마를 캐는 아이(서동薯童)'로 어렵게 지낸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향한다.
선화에 반한 서동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결심하고는 꾀를 쓴다.
'선화공주는 남몰래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가사의 '서동요薯童謠'를 아이들이 부르도록 한 것이다.
소문을 듣고 딸을 오해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냈고, 궁 밖에서 기다리던 서동은 그녀를 유혹했다.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서동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이 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설화 속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주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와 달리 주자 성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정비正妃를 여러 명 거느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백제사 연구자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만 6명을 뒀다.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모두 무왕의 정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역사학계에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사리봉영기는 함께 발견된 유물의 편년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크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벡재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복원 철학의 문제
미륵사지 석탑은 문화재 복원에 대한 사회적, 학문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원형을 무시한 미륵사지 석탑 동쪽의 동원구층석탑의 날림 복원(1992년 완공)이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만큼은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익산 시민들 사이에서는 미륵사지 석탑도 동원구층석탑처럼 잔존 층수 6층이 아닌 백제시대 당시 원래 층수 9층으로 복원해달라는 요구가 나왔다.
원형을 훼손하더라도 온전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학계는 6층까지만 보수 정비하겠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원래 계획을 지지했다.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설계도나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원형을 확인할 길이 없는 7~9층을 상상으로 복원하는 것은 역사적 진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더구나 2015년 7월 유네스코가 미륵사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 내건 조건도 원형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수 정비 방식이었다.
문화재 복원 역사가 우리나라보다 오래된 유럽에서는 설사 원형 고증이 이뤄진 문화재라도 인위적인 복원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유적 등은 새로운 건축 부재를 덧댈 때 색상이나 질감을 일부러 다르게 해서 원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관람객의 눈을 속이지 않고 문화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복원 철학에 따른 것이다.
고건축 전문가로 경주 감은사지 석탑과 다보탑, 석가탑 복원에 모두 참여한 배병선도 사리장엄 수습 못지않게 석탑의 해체 복원 방식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동안 미륵사지 해체 보수를 맡으며 백제시대 원부재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핵심 원칙을 세웠다.
아무리 깨진 돌이라도 그냥 버리지 않고 새로룬 석재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보강해 가능한 한 재활용했다.
화강암 원석을 다듬을 때에도 전통 방식대로 일일이 정으로 쪼았다.
배병선은 "현대 기술을 총동원해 복제를 시도해도 옛 부재랑 똑같을 수는 없다. 옛 조상들의 정성을 현대인들이 완벽하게 재연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해체 보수 과정에서 원부재와 신부재의 비율을 6대 4 정도로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이런 원칙이 없었다면 복원은 훨씬 빨리 진행됐겠지만, 문화재 고유의 원형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해체에만 3년이 걸렸다.
해체 결정 당시 국내에 고건축 복원 전문가들이 드물어 복원 방식을 정하는 데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문화재위원들은 일단 해체를 해본 뒤 구체적인 복원 방식을 정하자는 입장이었다.
특히 2009년 사리장엄이 발견된 직후 해체 복원 작업이 약 1년 동안 중단되었다.
이때 학계 일각에서는 1층은 해체하지 말고 2층부터 해체 보수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탑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1층 내부 구조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보수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배병선의 판단이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
※출처: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021. 1. 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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