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전傳 영천자 신잠 "설중심매도" 본문
국립중앙박물관 안에는 조선 중기의 선비화가 신잠申潛(1491~1554)의 <설중심매도雪中尋梅圖>라는
횡권橫卷[가로로 긴 두루마리 그림]의 긴 그림이 있다.
견본絹本[깁(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에 그린 그림]인 이 그림은 가로 2미터가 넘는 굉장히 긴 그림으로,
선비가 노새를 타고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가는 모습을 그렸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탐매도探梅圖>라고 불렀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로 전해지고 있는 신잠이란 사람은 자가 원량元亮, 호가 영천자靈川子라고 하는데,
1917년 오세창이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사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문장[시詩], 글씨[서書], 그림[화畵]에 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렸다고 되어 있다.
특히 묵죽墨竹을 잘 했다고 해서 대[죽竹] 그림 이야기가 잔뜩 나온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인 남태응이 역대 명화가들의 특징과 장단점을 서술한 평론서 ≪청죽화사靑竹畵史≫에 보아도
포도와 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지, 산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설중심매도>는 그림이 대단히 훌륭하다.
이것이 과연 산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이 그린 그림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대단한 실력인데, 재미있다.
그림은 무게가 있고, 선이 확실하고, 나무, 수목 그린 것이나, 산수 그린 것이 조금도 가벼운 곳 없이
안정되어 있는 등 대단히 능숙한 솜씨로 그렸다.
모든 정경들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세부 묘사는 물론 붓질과 담묵의 농담도 뛰어나
보통 솜씨를 훨씬 뛰어넘는 원숙한 경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그림을 어디서부터 보아야 하는 것이 애매하다.
즉 왼쪽에서부터 들어가는 그림인지 오른쪽에서 들어가는 그림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앞쪽에 노새 탄 선비가 뒤를 돌아보고 있고 그 뒤에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동자 하나가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따라가는 모습이 보이는 등, 그림의 포인트가 돌아보는 것에 있기 때문에 왼쪽에서부터 들어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포인트를 잡는 것이 그림을 보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심매도'란 화제畵題가 말해주 듯 왼쪽 다리 끝 바위 틈으로 흰 매화가 핀 매실나무가 한 그루 있기는 하지만,
그림의 포인트는 노새 탄 선비가 돌아보고 뒤에 동자 하나가 무엇을 생각하면서 따라가는 데 있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옛날 같으면 당나라 시인 맹호연(689~740)이란 사람이 파교灞橋[당나라의 장안長安(현 시안西安)에 있던 다리 이름]를
건너 매화꽃 구경을 갔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 그림은 맹호연의 이야기 같지는 않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막감이 감도는 설경雪景을 배경으로 선비가 노새를 타고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할 때,
문득 뒤따르는 동자의 발걸음이 더디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 속의 바위에 뿌리박고 있는 매실나무에 핀 하얀꽃이 그림의 주제를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멀리 높은 계곡에 흘러내리고 있는 폭포는 두 사람이 이미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매화라는 것이 어떤 존재였기에 선비들이 눈 속에서도 매화를 찾아 헤매고,
끊임없이 시로 읊조리고 또 그림으로 그렸을까.
다른 식물과 달리 매화는 추위가 덜 가신, 아직 잔설이 분분한 초봄에 다른 어떤 식물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특성이 있다.
매화는 또 후각을 자극하지 않는 은은한 향기를 지닌다.
이런 매화의 특성이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적 윤리관과 자연주의 정신에 결합되면서
의인화되고 이상화되었던 것이다.
신잠은 기묘사화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게 됨으로써
제약된 현실을 벗어나 자연으로 도피하여 마음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망을 가졌을 것이다.
옛 성현들이 그랬던 것처럼 노새를 타고 설중매雪中梅를 찾아 유유히 산속을 거닐며
세속을 멀리하고 자연에 몰입해 인간의 본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마음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일으켜 그로 하여금 이 <설중심매도>를 그리게 한 것이 아닐까.
<설중심매도>는 설산에서 매화를 찾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이 그림이 후세에 던져주는 첫 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적막감이다.
이 적막한 분위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영원성을 느끼게 해준다.
만약 적막감이 없었다면 그림 속의 인물은 풍속화 속의 인물처럼 세속화되어 버릴 것이고,
계곡의 폭포는 한낱 시원하고 보기 좋은 경치 정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설중심매도>는 매화를 찾아 나섰을 때 느낀 자연에 대한 감격을 표현한 것이 아닌,
그 감격을 다시 감정의 정지 상태로 돌린 그런 경지에서 터득한
인간과 자연의 불가사의한 도道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허균 지음, '나는 오늘 옛 그림을 보았다'(북폴리오, 2004).
2021. 1.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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