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무한의 공간에서 몇 십 년간 계속되는 경주 월지(안압지) 유적 발굴 본문
신라시대 무한無限의 정원
"여긴 사방 어디서도 전체를 볼 수 없는 무한의 공간이오."
경북 경주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서 만난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인터뷰 중간에 선문답 같은 말을 꺼냈다. 과연 그러했다.
천년 왕성 월성月城 동문 터와 맞보고 있는 월지 남쪽에 들어서자, 연못을 중심으로 복원된 건물들과 인공섬 대도大島, 소도小島가 한눈에 들어왔다.
월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지점이다.
그러나 연못의 서북쪽 방면에 자리 잡은 중도中島 일대는 이쪽에선 볼 수가 없었다.
40여년 전 윤근일과 함께 월지를 발굴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안압지 발굴 조사와 복원>이란 글에서
"월지는 무한한 바다를 좁은 공간에 표현했다"고 썼다.
월지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연회를 베풀던 경치 좋은 연못과 정원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월지에 대해 "서기 674년(문무왕 14)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하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했다.
삼국통일 직후 왕경王京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문무왕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월지에 집약한 게 아닐까!
나중에 그가 바닷속 수중 왕릉에 묻힌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선생님, 방금 이런 게 나왔는데 뭔지 아시겠어요?"
"음, 모양이 딱 그건데····. 뭐라 설명애햐 할지 모르겠네요."
1975년 5월 29일 월지 북쪽 기슭 발굴 현장. 최정혜 당시 조사원이 바닥 개흙층에서 발견한 175센티미터 길이의 기다란 나무 조각을 한 남성 조사원에게 내밀었다.
조각을 뒤덮은 진흙을 닦아낸 남성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챘지만 대답을 머뭇거렸다.
남녀유별이 아직 유난했던 70년대에는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남성의 심벌 모양이었다.
왕궁 연못에서 느닷없이 남근상男根像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이쪽으로 쏠렸다.
윤근일은 이렇게 회고했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가 발굴 현장에 와서 목제 남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보니 최태환 작업반장이 남근에 실을 살짝 묶어놓았어요.
약품 보존처리 중이던 목제 유물들에 둘러싸인 남근을 손쉽게 찾으려고 한 거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근상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학계에서는 예부터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제의용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해 고대 로마 품페이 유적에서도 도시 곳곳에서 남근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되었다.
일각에서는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데다 귀두 부위에 돌기까지 붙어 있어 여성의 자위 기구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만들다가 중간에 버려진 불량품 형태의 남근상 2점도 발견되었다.
윤근일은 "남근상의 길이가 실제 발기되었을 때의 그것과 비슷하고 표면을 정성스레 다듬은 점도 예사롭지 않다"고 말했다.
삼국시대의 배 최초 발견
둘레 1005미터, 면적 1만5658제곱미터에 이르는 월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유람선을 띄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75년 4월 16일 연못 한가운데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목선木船] 한 척이 발견되었다.
길이 6.2미터, 너비 1.1미터로, 3개의 판목을 세로로 결구結構시킨[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든] 형태였다.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선박이었다.
문제는 엎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나무배를 안전하게 들어내는 것이었다.
부식이 쉽게 일어나는 유기물 특성상 1300년 묵은 나무는 스펀지처럼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윤근일은 1960~1990년대 경주 발굴 현장을 지킨 백전노장 고故 김기출 작업반장과 상의한 끝에 나무배 아래로 나무장대 여러 개를 수직으로 교차시켜 밀어넣었다.
그러고선 고무줄로 단단히 묶은 뒤 마치 상여를 메듯 들어올렸다.
인부 30명이 달라붙어 경사로에서 나무배를 끌어올리는 도중에 균형이 맞지 않아 살짝 금이 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일부 언론이 이를 과장해 신라시대 나무배가 두 동강 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현장을 지휘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지만, 나무배가 거의 완형을 유지한 채 수습되었기 때문에 반려되었다.
발굴팀은 나무배를 약품에 담가 7년 동안 보존처리를 진행했다
열악한 환경이었던 70년대에는 목재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도 쉽지 않았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조종수 한양대 교수의 조언에 따라 발굴단은 나무배를 꺼낸 직후 페놀을 묻힌 탈지면을 배 위에 덮었다. 예상치 못한 유물 출토에 계획에 없던 보존처리 시설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발굴단은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철판으로 보존처리 약품인 PEG가 담긴 탱크를 만들어 나무배를 통째로 여기에 담가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액체를 머금은 나무배의 부피가 팽창하면서 철판이 부풀어 오르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윤근일은 급한 대로 탱크 주위에 나무판을 대고 철사로 단단히 묶어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발굴단은 발굴 틈틈이 PEG 약품을 한 달에 한 번씩 교체하는 작업까지 벌였다.
이후 나무배는 서울로 운송되어 일본에게 목재 보존처리를 배운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병호 박사의 손에 맡겨졌다.
나무배 이외 1, 3, 5호 건물 터 앞에서는 금동판불金銅板佛[금으로 도금한 조그마한 구리판에 새긴 불상]과 토제 화덕, 각종 생활도구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판불은 1호 건물 터 앞에서 1점이, 인공섬인 대도 부근에서 9점이 나왔다.
판불이 발견된 양상을 볼 때 월지 주변에 불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5호 건물 터 앞에는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석축이 발견되어 나무배를 타고 내리는 선착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외에 월지 서안 건물터 주변에서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 58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월지 출토 유물 가운데는 무엇보다 신라시대 나무 주사위인 주령구酒令具를 빼놓을 수 없다.
벌주 등 술자리에서 벌칙들이 적혀 있어 주령구라고 불린다.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에는 지금의 '원샷'과 비슷한 '음진대소飮盡大㗛[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기]' 등 재미있는 문구들이 각 면에 새겨져 있다.
신라인들의 술 마시는 풍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다.
이와 관련해 2008년 동궁 내 우물 터 발굴 조사에서 상아로 만든 정육면체 모양의 주사위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30여 년 만에 또 하나의 신라시대 주사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주령구는 14면체로 각 면에 글자가 적혀 있지만, 이것은 현대의 주사위처럼 1~6개의 구멍이 나 있다.
몇 십 년간 이어지고 있는 발굴
동궁과 월지 발굴은 1973년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에서 비롯되었다.
일종의 국책사업으로 추진된 경주 고총古冢[오래된 무덤] 발굴에서 파생된 성격이 짙었다.
실제로 황남대총 발굴을 주도한 경주고적발굴 조사단에서 윤근일 등이 차출되어 월지 발굴 현장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발굴단장은 김정기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한국 발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고경희 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도 동궁과 월지 발굴에 참여했다.
유적지 규모가 워낙 방대해 현장 인부만 80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970년 첫 삽을 뜬 동궁과 월지 발굴은 현재진행형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지 동편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를 2007년부터 이어오고 있다.
이 지역은 온통 논인데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수많은 신라시대 주춧돌이 나왔다.
2014년에는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깊이 약 7미터 우물이 발견되었다.
이 깊은 우물은 폭이 1.2~1.4미터로 비좁아 몸집이 가냘픈 여성 조사원 한 명이 로프에 의지한 채 조사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당시 우물을 조사한 장은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캄캄한 우물 안으로 혼자 들어가 작업하나보니 힘들었다"고 말했다.
동궁 영역에서는 여러 개의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2015년 발굴 조사한 3호 우물에서는 토기, 기와와 더불어 노루, 쥐, 어류 등 다양한 동물의 뼈가 발견되어 동·식물·고고학자들이 현장 조사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초 월지 동편지구는 별도의 왕경 유적으로 추정되었지만, 막상 땅을 파보니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터와 우물은 월지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했다.
신라시대 동궁 영역이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발굴단은 황룡사지와 연접한 임해로와 더불어 월성 동문 터 쪽으로도 유적이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윤근일은 "동궁과 인근 월성 발굴은 시간을 갖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며 1970년대 발굴에서 확인하지 못한 월지 동편과 북편 경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경주시는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동궁과 월지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월지 주변에는 몇 십 개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3개(1, 3, 5호 건물 터)만 복원되어 있는 상태다.
시는 신라 왕실 문화의 화려했던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학계 인사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는 월지에서 출토된 첨차檐遮[건물 꾸밈새의 하나]와 서까래, 수막새, 암막새, 난간 장식 등 옛 건축 부재들을 정밀 고증하면 나머지 전각들도 어느 정도 복원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월지 입수入水부와 출수出水부에서 발견된 나무관도 복원 대상으로 꼽힌다.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진행 중인 동궁 일대 발굴 조사는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다.
그것은 신라 왕실이 월성과 동궁, 월지 등 왕궁 시설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치했느냐는 것이다.
조선 왕조는 전각과 회랑, 담장 등의 배치도를 그린 문헌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신라는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
왕궁 시설의 배치나 축조 방식은 고대 국가의 정치사상과 철학을 집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신라는 삼국통일 전후로 약 250년에 걸쳐 왕궁 시설을 신축,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동궁과 월성을 잇는 출입 시설을 찾는 것도 과제다.
발굴단은 월지 남쪽과 월성 동문 터 사이에 이 시설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왕궁 시설에 대한 전모가 밝혀지면 주변의 황룡사 터, 분황사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왕경 도시계획의 실상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확대될 것이다.
백전노장에게 월지 발굴에서 후회로 남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윤근일은 출수부 조사가 미비했고 특히 경계구역에서 장대석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월성 동문 터 앞 해자를 조사할 때 목책이 나왔는데 동궁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도로 쪽을 조사하지 못한 것도 아쉽다고 했다.
그는 "월지 서쪽 일부는 층위 발굴을 했는데 바닥에 대한 조사를 하지는 못했다"며 "어떤 공법으로 연못 바닥을 다졌는지 확인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지 발굴이 남긴 해프닝
월지 발굴 조사에서는 발굴부터 유물 보존처리까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전해 내려온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양수기로 월지의 물을 빼낼 때 붕어가 잡힌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발굴단장 김정기는 유독 회를 즐겼다.
이를 잘 아는 윤근일이 눈치껏 붕어를 회로 쳐서 소주와 함께 상을 차렸다.
이들은 함께 붕어회를 먹은 뒤 민물고기에 즐겨 서식하는 간흡충[간디스토마]에 감염되어 한동안 고생했다고 한다.
월지 서북쪽 호안 석축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서울로 가져가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대형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보존과학실 담당자가 건조기에 주사위를 말리려다 그만 태워버리고 만 것.
지방지 주재 기자가 이를 보도해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결국 발굴단은 출토 직후 촬영한 유물 사진과 연필로 뜬 탁본을 바탕으로 복제품을 만들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월지 출토 주사위가 바로 이것이다.
※출처
1.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 새샘블로그 '2013. 7/4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http://blog.daum.net/micropsjj/17038899
2021. 1. 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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