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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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유적 발굴

새샘 2021. 5. 11. 10:38

<경주 노서리 고분군(현 대릉원으로 통합) 전경(사진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7630&ccbaKdcd=13&ccbaAsno=00390000&ccbaCtcd=37)>

 

광복 이후 최초로 발굴된 유적은 어디일까?

정답은 경주 호우총壺杅塚이다.

 

경주 노서동 일원에 위치한 호우총은 경주 노서리 고분군 慶州 路西里 古墳群이란 이름으로 1963년 사적 제39호로 지정되었다가, 이후 일대에서 많은 고분군들이 추가로 발굴되면서 2011년 지정을 해제하고 일대 5곳의 고분군(경주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황남리 고분군, 황오리 고분군, 인왕리 고분군)들을 통합하여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 慶州 大陵園 一圓으로 재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연표를 보면 1946년 5월 3일부터 5월 16일까지 경부 경주시 노서동의 호우총을 국립박물관이 발굴하였다.

당시 국립박물관은 이 고분 발굴을 위해 일본인 학자 아리미츠 쿄유이치[유광교일有光敎一]의 자문을 받았다.

 

<경주 노서리 고분군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사전 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21118780000)>

 

경주 노서리 고분군 제140호분인 호우총은 출토유물 중 고구려 유물인 청동호우 1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호우壺杅란 용어가 조금 어려운데, 학계에서는 '뚜껑 있는 그릇'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병 호壺' 자에 '사발 우杅' 자가 결합된 단어인 호우에는 뚜껑이란 말이 없으므로 이런 해석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찮다.

 

대표적인 반론은 '우'란 물을 담거나 국을 끊이는 그릇이란 뜻이므로, '모양이 호인 물(국)그릇'이라는 것이다.

모양을 나타내는 '호'와 기능을 나타내는 '우'의 합성어가 '호우'라는 해석이다.

문제는 학계에서는 이런 모양의 그릇을 '호'가 아닌 '합盒'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릇을 만든 고구려나 받은 신라에서는 호라 불렀다는 점이다[아래 두 번째 X-선 사진 출처 자료].

 

<청동호우 밑바닥에 새겨진 글자(사진 출처-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50426/70916865/1)>

 

<청동호우 밑바닥 글자의 X-선 촬영 사진(사진 출처-https://historylibrary.net/entry/%EB%8F%85%EC%84%A4%EA%B3%A0%EA%B3%A0%ED%95%99-8-%EC%A1%B1%EB%B3%B4%EC%97%86%EB%8A%94-%EB%B6%84%EB%A5%98-%EB%AA%85%EB%AA%85%EC%9D%98-%EC%B0%B8%EC%82%AC-%ED%98%B8%EC%9A%B0%E5%A3%BA%E6%9D%85)>

 

이 청동 그릇의 바닥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란 1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광개토대왕이란 이름이 새겨진[명銘] 호우란 뜻으로 정식 명칭이 보물 제1878호「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가 되었다.

16자의 뜻은 '을묘년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위한 그릇 10개(또는 10번째 그릇)'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광개토왕의 정식 이름이며, 그릇에 새겨진 서체 또한 광개토왕비와 똑같은 예서체다.

따라서 이 그릇은 고구려에서 제작한 것이다.

 

호우총 발굴과 관련하여 고고학자인 조유전의 글을 보면 광복 이후 최초의 발굴 유적으로 호우총이 결정된 것은 당시 발굴의 고문격인 아리미츠 쿄유이치와 관계가 깊다.

광복 이후 발굴을 한다고 결정은 했지만 어느 지역을, 그리고 무엇을 발굴해야 할지 우리나라에서는 발굴 전문가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경주 봉황대가 거론되었지만 경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이에 이미 대부분 파괴된 노서동 140호분을 발굴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고고학적인 조사를 진행해온 아리미츠 쿄유이치는 이미 140호분 주변에서 순금 귀걸이 등이 발견되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 고분 발굴에 욕심을 두고 있었다.

아리미츠 쿄유이치의 140호분에 대한 발굴 희망은 역설적이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광복이 된지 1년도 채 안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발굴 역사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호우총 발굴에는 당시 국립박물관장인 김재원, 아리미츠 쿄우이치, 임천, 이건중, 이갑록이 참여하였는데, 그밖에 이병도, 조윤제, 이숭녕, 송석하, 홍종인 등 당시 진단학회 회원들도 발굴 상황을 보기 위해 발굴 현장에 모이기도 했다고 한다.

 

호우총에서는 청동호우 이외에 금동관, 금귀걸이, 유리구슬 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은반지, 은제과대銙帶[허리띠]와 요패腰佩[허리띠 장식품], 금동으로 장식한 환두대도環頭大刀[칼의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고리가 있는 고리자루칼] 등이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마구류와 칠기, 토기 등도 나왔다.

특히 묻힌 사람의 발치 쪽에서 나무에 흑칠을 하고 그 위에 도깨지 얼굴이 있는 목심칠면木心漆面이 나와 당시 발굴보고서에는 고대 샤머니즘의 방상씨方相氏[가면을 쓰고 역귀를 쫓는 사람 또는 관명] 탈로 보아 화제가 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화살통으로 밝혀졌다.

 

호우총 발굴 이후 1940년대에는 경주 은령총銀鈴塚(경주시 노서동), 개성 법당방法堂坊 고려고분군(파주시 율서면), 경우 황오리皇吾里 폐고분(경주시 황오동) 발굴이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 들어서도 경주를 중심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

경주 금척리金尺里 고분(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경주 황오리 17호분(경주시 황오동), 경주 쌍상총雙床塚(경주시 노서동), 경주 노서동 138호분(경주시 노서동), 경주 마총馬塚(경주시 노서동), 경주 황오리 32-1호분(경주시 황오동),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등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또한 울릉도 남서동南西洞 고분군(울릉군 서면 남서리), 울릉도 남양동南陽洞 고분군(울릉군 서면 남양리), 울릉도 현포동玄圃洞 고분군(울릉군 서면 현포리) 등 울릉도 소재 고분과 제주 오라동吾羅洞 고인돌[지석묘支石墓](제주시 오라동), 제주 용담동龍潭洞 고인돌(제주시 용담동) 등 제주도 고인돌에 대한 발굴이 일찍이 이루어져 이채롭다.

 

그밖에 창원 성문리城門里 고인돌(창원시 진동면 성문리), 인천 시도矢島 패총貝塚[조개무지 또는 조개무덤](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시도리), 김해 예안리禮安里 패총(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진해 자마산子馬山 고분(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창원 웅천熊川 패총(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칠곡 약목若木 고분(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영암 내동리內洞里 독무덤[옹관묘甕棺墓](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의성 탑리塔里 고분(의성군 금성면 탑리) 등 고인돌, 패총, 고분, 독무덤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국립박물관이 대부분의 발굴 조사를 주도하였으나, 몇몇 발굴에는 서울대, 고려대 등 대학 박물관도 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 서울 지역에 대한 발굴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021. 5. 1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