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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자화상" "마상처사도" "유하백마도" "심득경 초상" "노승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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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자화상" "마상처사도" "유하백마도" "심득경 초상" "노승도"

새샘 2021. 5. 13. 22:00

윤두서, 자화상, 종이에 담채, 38.5×20.5㎝, 윤영선

 

중기 끄트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화가는 윤두서尹斗緖(1668~1715)로서,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가 공재恭齋다.

이 사람은 48세 나이에 일찍 죽었다.

그러나 윤공재의 그림은 해남 윤씨 집안에 전해져 오고 있어서 현재 볼 수가 있다.

공재는 국문학에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손자다.

남인 집안으로 옥동玉洞 이서李溆에게서 서도를 배우고 성호星湖 이익李瀷 집안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실학實學정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25세에 진사가 되었지만 그 후에는 당쟁에 걸려 벼슬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지금 윤공재는 인물에 아주 능하고 말 그림에도 능하지만 산수는 소관이 아니었던 인물로 되어 있다.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나오는데 초기에는 화보를 보고 배운 것 같다.

남태응의 ≪청죽화사聽竹畵史≫를 보면 그가 당시화보唐詩畵譜≫나 ≪고씨화보顧氏畵譜≫와 같은 중국의 화보를 가지고 연습해서 그대로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는 실물을 가만히 관찰해서 그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이익 같은 사람에게서 실학의 영향을 받아서 실사구시적 정신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의 말 그림이나 사람 그림은 실물을 오래 관찰하고 움직이는 것을 연구한 뒤에 비로소 그렸다고 한다.

또한 그는 상당히 까다로워서 여간해서는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림이 마음에 들어야 남에게 주고 또 주는 것도 아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주지 마음대로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이 적게 남아 있는데, 오히려 그 집안에 전하는 조그만 그림은 그 당시 사람의 그림치고는 꽤 남아 있다.

 

그의 그림에는 두 가지 있다.

먼저 해남 집안에 있는 것과 화보풍의 그림이 꽤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초기 그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자화상같이 후기 그림으로 보이는 매우 실사구시적인 사실풍에 가까운 그림도 있다.

윤두서의 그림 중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국보 제240호 <자화상自畵像>이다.

아마도 거울을 갖다놓고 보면서 그대로 그린 모양인데, 아주 생동감 있고 출중하고 세밀하면서도 개성이 있어서 우리나라 초상 그림 중에서도 특별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윤두서는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일호불사一毫不似 편시타인便時他人]'라는 취지의 정통 초상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면의 윤곽선과 수염의 필선에 화력畵力[그림의 힘]을 집중시켰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고, 그 뒤에는 선비다운 기개가 충만되어 있다.

고개지顧愷之가 인체 가운데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 눈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자화상> 사진 카메라의 눈만 가지고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심정과 내재적인 정신을 외모와 함께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화면 구도는 매우 간소하다.

보통의 초상화가 전신全身을 그리거나 상반신을 그리고 있는 데 반해, 여기서는 얼굴만 강조하여 그렸다.

어깨나 목, 또는 웃옷의 묘사 같은 것은 물론 없으며, 배경은 그냥 여백인 채로 남겨져 있다.

[사실은 얼굴만 그린 것이 아니라 상반신을 그린 것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버드나무를 태워 만든 숯인 유탄柳炭으로 그린 미완성 상태의 상반신 윤곽선이 지워져 버렸기 때문으로 확인되었다.(새샘 블로그 2009년 12월 10일 글 '공재 윤두서 자화상' 참조)]

 

초상화에서는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 얼굴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얼굴을 가지고 정신을 묘사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한 인물을 놓고 불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외형이다.

이 외형에 내포된 신기神氣를 발견하여 그것을 그림으로써 전하는 것을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한다.

<자화상> 전신사조의 묘처妙處[묘한 곳]를 터득한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전傳 윤두서, 마상처사도, 비단에 채색, 98.2&times;57.7㎝, 국립광주박물관

 

윤두서, 유하백마도, 비단에 담채, 34.3&times;44.3㎝, 윤영선

 

윤두서는 말을 잘 그렇게 잘 그렸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말 그림 중에는 아주 잘 된 그림이 많지 않다.

그가 그린 그림으로 짐작되는 <마상처사도馬上處士圖>는 중국풍이며, 나무 그림은 화보풍이다.

이하곤李夏坤에게 <만마도萬馬圖>를 그려주었다는 기록을 보면 말을 많이 그렸던 모양이지만, 윤공재의 말이로구나 할 수 있는 그림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말 그림 가운데는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가 그가 그린 그림으로 생각된다.

 

 

윤두서, 심득경 초상, 1710년, 비단에 담채, 159&times;88㎝, 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 노승도, 종이에 수묵, 57.5&times;37.0㎝, 국립중앙박물관

 

용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는데 지금 전하는 것은 한 점도 없다.

초상으로는 친구 <심득경 초상 沈得經 肖像> <노승도老僧圖>가 있다.

 

윤두서는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다.

그가 그린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새샘 블로그 2020년 6월 8일 글 '공재 윤두서 동국여지지도' 참조)<일본여도日本輿圖>를 보면 그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지도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관한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그렸다.

이런 지도 그림을 보면 윤두서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대단했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당시에도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허균 지음, '나는 오늘 옛 그림을 보았다'(북폴리오, 2004)

 

2021. 5.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