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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응 "청죽화사" 본문

글과 그림

남태응 "청죽화사"

새샘 2021. 5. 22. 21:53

김형섭 논문 표지(사진 출처-https://www.google.com/search?q=%EB%82%A8%ED%83%9C%EC%9D%91+%EC%B2%AD%EC%A3%BD%ED%99%94%EC%82%AC&tbm=isch&hl=ko&chips=q:%EB%82%A8+%ED%83%9C%EC%9D%91+%EC%B2%AD%EC%A3%BD+%ED%99%94%EC%82%AC,online_chips:%E5%8D%97%E6%B3%B0:FxKGnSqWlHs%3D&rlz=1C1WPZB_enKR736KR742&sa=X&ved=2ahUKEwi36tu7od3wAhWOxIsBHQrQAX8Q4lYoA3oECAEQHw&biw=910&bih=836#imgrc=e5SWKp2GEhdjLM)

 

조선 중기 화가의 그림을 살펴보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남태응南泰膺(1687-1740)이 그시대에 활동했던 화가와 그림을 평한 책인 ≪청죽화사聽竹畵史≫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1928년 펴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 자주 인용되고 있고,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역사책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그 전문을 얻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유홍준 교수가 통문관 이겸로 씨가 가지고 있는 ≪청죽만록聽竹漫錄≫이란 책을 빌려서 그 속에 있는 화사畵史를 발표하면서 그 전문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별책으로 구성된 ≪청죽별지聽竹別識≫에는 「청죽납피잡지聽竹衲被雜識」, 「논동방문장論東方文章」, 「화사畵史」, 「삼화가유평三畵家踰評」, 「화사보록(·하)畵史補錄(上·下)」 등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화사」, 「삼화가유평」, 「화사보록(·하)」의 네 글을 일괄해서 ≪청죽화사聽竹畵史≫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글에는 그시대 사람들, 예를 들어 윤두서, 이징, 김명국 같은 화가들에 대한 귀중한 평이 들어 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사람들이 어떻게 주위 화가들과 그들의 그림 양식을 분류하고 평가했느냐 하는 것도 포괄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재위 1351-1374)이 동방東方의 화성畵聖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그림 그리는 성인 즉 으뜸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들고 있지 않다.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동방의 화성이라고까지 했다면 충분한 근거가 있을 텐데, 그 근거는 얘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남태응이 나중에 베껴놓은 것 중에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그 속에 공민왕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공민왕이 그린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그림이 궁중에 수장되어 있다는 내용과 흥덕사興德寺의 <석가출산도釋迦出山圖>가 아주 좋은 그림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과연 성현이 이 그림들을 실제 보았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굉장히 높게 평가한 것은 분명하다.

 

그 다음으로는 김시金禔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최립崔岦의 문장, 한호韓濩의 글씨, 김시의 그림이 삼절이다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가끔 착오도 보인다.

이상좌李上佐를 이정李楨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분명한 착오다.

 

그런데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김명국金明國, 이징李澄, 윤두서尹斗緖에 대한 비교평론이다.

여기에 남태응의 독특한 화품畵品이 나온다.

그는 그림에는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있어서, 신품은 김명국이고, 법품은 이징이며, 묘품은 윤두서라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들어보면 요컨대 김명국은 그림이 천기에서 우러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독창적이고 개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이징은 규격법도에 머물러서 잘은 그리고 솜씨는 얌전하지만 독창적인 그림은 아니라고 하였고, 윤두서는 아주 묘하게 그려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을 한 것이다.

 

이는 결국 김명국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만큼 높은 평가를 한 것을 볼 때, 김명국이 만약 대표작을 가지고 있었다면 굉장할텐데 지금 남아 있는 대표작이 그리 많지 않다.

윤두서도 마찬가지다.

자화상을 제외하면 조그만 것 외에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말 그림의 경우이 그렇게 유명한데 말 그림으로는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말 그림의 경우 배경의 수목 표현들은 대개 화보풍이어서 아마도 나무는 실사구시적으로 사생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윤두서를 당시에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당시 사람들이 김시 그림 여러 장 갖는 것보다 윤두서 그림 한 장 구하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인품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윤두서의 그림을 보면 앞에서 논한 것처럼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지금 가끔 장안에 돌아다니는 화보풍 그림에 효언孝彦이란 도장이 찍혀 있는 것들이 있다.

낙관 있는 그림은 아주 적은데, 낙관한 그림 중에 오히려 사실풍이 아닌 그림들이 꽤 있다.

이들은 대체로 윤두서가 서울에 있을 적에 친구들에게 그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윤두서의 그림 한 점은 수묵으로 그린 산수로 비교적 담담한 것인데 낙관이 있다.

윤두서의 낙관이 있는 그림은 자기가 마음먹은 그림이라는 것인데 괜찮은 그림들이다.

 

남태응의 ≪청죽화사聽竹畵史≫를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당대의 화인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또 그 이전 중기 그림을 어떻게 정리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1. 5.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