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겸재 정선 "통천문암" "청풍계" "인곡유거도" "박연폭" "금강전도" 본문
정선의 그림 가운데 <통천문암通川門巖>은 비교적 구도가 간단한 데도 시각적으로 성공한 예다.
겸재의 파도는 특색이 있다.
단 파도가 거의 한 방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곳에는 좀 걸맞지 않는 면도 있다.
그 전에 가지고 있던 부채(선면扇面)에 물 흐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렇게 큰 파도가 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양에 파도치듯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변화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금강내산전도>와 같은 경향의 조그만 그림의 예는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청풍계淸風溪>다.
역시 화면을 꽉 채우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정선의 또 다른 <청풍계淸風溪>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역시 화면을 꽉 채우고 있고, 묵면墨面[묵으로 칠한 부분]이라고 할 만한 것이 군데군데 있으며, 전체적으로 아주 무겁고 둔중한 감을 준다.
담채인 것을 보아 계절상 오뉴월 여름인 것 같다.
보다시피 좀 부드럽지만 중량감이 느껴진다.
앞에 언급한 고려대박물관 <청풍계>가 부드럽다면, 이 간송미술관 <청풍계>는 필세가 강하다.
이런 것들이 겸재의 그림으로 성공한 좋은 그림으로 평가할 만하다.
물론 겸재의 그림 중에는 이게 겸재의 그림인가 하고 놀랄만큼 부드러운 그림도 있다.
바로 위 그림 <인곡유거仁谷幽居>와 같은 아주 아름답고 부드러운 솜씨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역시 대가니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괴량감塊量感[표현하려는 물체를 덩어리지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 두드러진 겸재 그림에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박연폭朴淵瀑>이 있다.
묵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른쪽에 압축되어 있고, 가운데는 긴 박연폭포가 있다.
박연폭포는 실제는 이렇게 길지 않은데 올려봐서 그런지 길게 표현되어 있다.
아주 중량감이 있는 그림이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박연폭>은 계절이 다른 때에 그렸지만 마찬가지로 괴량감이 있다.
두 그림 모두 겸재 그림으로는 성공한 그림이다.
겸재 그림 중 성공한 것은 모두 괴량감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인곡유거> 같은 그림은 예외다.
그런데 실제 시중에 다니는 것은 진경산수가 아니고 정형산수식의 조그만 그림들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정선 그림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금강전도金剛全圖>다.
그전에 손재형 씨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이 그림 역시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회화적인 재미는 적지만 조밀한 구성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하늘에 푸른색을 집어 넣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은 나중 강희언의 <인왕산도>에도 나오지만 재미있는 착상이다.
이런 <금강전도>의 독특한 구도는 후일 여러 사람들이 모방하게 된다.
다음 <금강전도>에 대한 해설은 출처 자료 2의 허균이 지은 '나는 오늘 옛 그림을 보았다'(북폴리오, 2004)를 인용한 것이다.
이 <금강전도>는 관념 산수의 틀을 벗어 버리고,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기법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산수화의 신기원을 이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윗부분에는 비로봉이 우뚝 서 있고 거기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을 지나 아랫부분 끝에는 장안사 비홍교가 보인다.
그림 윗부분 왼쪽에 '금강전도 겸재 金剛全圖 謙齋'라는 관서와 백문방인白文方印[글자를 음각으로 새겨서 인장을 찍었을 때 글자 부분만 하얗게 되는 도장]이 찍혀있고, 오른쪽에는 반원형을 이룬 칠언시七言詩가 적여 있다.
더불어 칠언시 아래 한가운데 '갑인동제甲寅冬製'라고 갑인년인 1734년(영조 10년) 겨울에 그렸다고 제작 시기까지 밝혀놓았다.
금강산을 그리는 전통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형성되어 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그려졌지만, 대부분의 금강산 그림은 산의 전경이라기보다 이름난 명소를 중심으로 하여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겸재의 <금강전도>는 금강산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른다 해도 한 시점에서 금강산 전체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금강전도>는 겸재가 금강산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금강산은 경관이 빼어난 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와 차원을 달리하는 이상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본 사람은 본 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보지 못한 대로 외경畏敬[깊은 존경]과 동경憧憬[그리워하여 마음속에서 간절히 생각함]의 마음으로 보는 산이 바로 금강산이었던 것이다.
그림에 쓰여 있는 칠언시를 통해서 금강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이 그림의 화의畵意[그림을 그린 마음]를 알 수가 있다.
"일만 이천 봉의 개골산 만이천봉개골산萬二千峯皆骨山
누가 그 진면목을 그릴 수 있을까 하인용의사진안何人用意寫眞顔
산에서 나는 뭇 향기는 동해 밖에 떠오르고 중향부동부상외衆香浮動扶桑外
그 쌓인 기운은 온 누리에 서리었네 적기웅반세계간積氣雄蟠世界間
몇 떨기 연꽃은 해맑은 자태를 드러내고 기타부용양소채幾朶芙蓉揚素彩
송백 숲은 선사禪寺 문을 가리었네 반림송백은현관半林松栢隱玄關
비록 걸어서 이제 꼭 찾아간다고 해도 종금각답수금편從今脚踏須今遍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 쟁사침변간불간爭似枕邊看不慳"
이 칠언시에서는 산봉우리를 부용(연꽃)에 비유하고, 선사를 말하고 있는 것 등은 불교적 세계관과의 관련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금강산이라고 하는 산 이름 자체와, 일만 이천 봉으로 말하는 것도 모두 불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금강산이란 산 이름과 오늘날까지 민간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란 말에는 불교적 세계관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불교가 압도적으로 금강산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사상이 <금강전도>의 절대적인 배경이 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도교적 세계관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 또한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엄연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우선 여름 금강산을 일러 봉래산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도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도교의 신선설에는 삼신산三神山이란 것이 있다.
신선이 살고 있고 불로초가 자란다고 하는 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를 말한다.
이 가운데 봉래산은 발해 중에 떠 있는 영산靈山이며, 거기에는 여러 신선들과 불사약이 있는 곳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도교의 신선설과 관련하여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해 동쪽을 우리나라로 비정比定[어떤 대상을 비교하여 정함]하였으며, 그 가운데 있는 산, 즉 금강산을 봉래산에 비유했던 것이다.
이처럼 금강산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단순한 산이 아닌 신선이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고 불로초가 자라고 있는 도교적 이상 세계였으며, 또한 그것은 외경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금강산은 불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민간신앙 속에서도 깊이 자라하고 있었던 산이기도 하다.
옛 사람들은 금강산을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탐승하면 사후에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그것이 어려울 땐 그림을 구해 걸어 놓고 간절히 기원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민화 금강산도를 그렸던 화공들의 처지에서 금강산을 실제로 유람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보나 사회적 신부능로 보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지도 못한 금강산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렸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 금강산 그림을 집에 걸어 놓고 마치 금강산을 눈앞에 대하듯 대용代用의 쾌감을 맛보곤 했던 것이다.
이렇듯 금강산은 민간인들 사이에서 구복신앙의 성지처럼 인식되고 있었으며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찾아가 보고 싶어 하는 동경과 외경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희구하여 마지않았던 이상 세계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의 불국정토佛國淨土일 수도 있고, 도교의 신선경神仙景일 수도 있으며, 무교나 민간신앙의 성소聖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산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생활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거나, 취미삼아 화필을 농하는 차원이 아니라, 제약된 현실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신앙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금강산을 그리되 눈앞의 소경小景 묘사만으로는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심오한 상징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금강전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토산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전경을 화면 가득히 채워 그리되, 위쪽에 다소 여유 있는 공간을 두고 있고, 아래 양쪽 모퉁이는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 결과로 화면 전체는 원형 구도를 이루게 되어 보는 이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효과를 얻고 있으며, 따라서 화면의 금강산이 산수 절경이라는 느낌보다 하나의 독립된 소우주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화면의 금강산은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지리상 개념의 금강산을 초월한 신비화되고 상징화된 금강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금강산의 이러한 모습은 ≪팔십화엄경≫에서 말하는 '동해중 금강산 東海中 金剛山'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산해경≫ 등에서 말하는 '봉래산 재해중 蓬萊山 在海中'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으며, 불국정토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실화가 아니라,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나 신비감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그린 상징성 짙은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제에서 말했듯이 겸재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리고 또 그것을 감상하기를 즐겨 했던 것은 미술의식이라기보다도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민족적·종교적 상징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출처 자료 1의 저자 이용희는 정선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다.
겸재 그림을 실제로 보면 잘된 그림이 그렇게 많지 않다.
많이 그렸지만 대부분 조그만 그림[편화片畵]이 많은데, 편화들 중에는 좀 싱겁거나 거칠고 간단한 게 많다.
수작들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로 볼 때, 요새는 잘 모르겠지만 그전에는 과히 비싸지 않았다.
그러나 겸재의 좋은 그림은 비쌌다.
소위 겸현謙玄이라는 현재玄齋와 비교한다면 현재는 평균가격은 비싸고 실패작은 적은데 반해 겸재는 평균가는 싼데 걸작은 비쌌다.
그리고 성공한 예가 많지 않았다.
실패가 꽤 있었다.
이런 것이 겸재의 특색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허균 지음, '나는 오늘 옛 그림을 보았다'(북폴리오, 2004)
2021. 6. 1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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