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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서울에서 유적 발굴을 시작하다 2 - 암사동 유적, 가락동 1‧2호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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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서울에서 유적 발굴을 시작하다 2 - 암사동 유적, 가락동 1‧2호분

새샘 2021. 6. 11. 23:52

<1960년대 발굴된 서울의 유적지(사진 출처-출처자료1)>

 

<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암사동 유적

 

<암사동 유적 기념관에 전시된 빗살무늬토기들(자료 출처-출처자료2)>
<1967년 암사동 유적 시굴조사 모습 - 경희대 발굴단(사진 출처-출처자료1)>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서기전 4,000~3,000년 전[방사성탄소연대측정] 신석기시대 유적지 서울 암사동岩寺洞 유적(사적 제267호, 1979년 지정)은 우리나라 빗살무늬(즐문櫛文)토기시대의 대표 유적으로서, 이미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홍수 때에 유적 일부가 훼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광복 이후 암사동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암사동 유적에 대한 최초의 공식 발굴은 1967년 7월 15일부터 7월 21일까지 경희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1964년 암사동 유적 발굴 모습 - 고려대 김정학 교수팀과 경희대 김기웅 교수팀의 합동발굴(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러나 암사동 유적은 1967년 정식 발굴 조사 이전 이미 김정학과 임병태에 의해 간략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내용이 학술지에 실려 있다.

김정학은 명일동 주거지와 가락동 주거지 발굴처럼 고려대 인류·고고회 학생들과 함께 한강 유역 선사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암사동 유적도 이와 같은 조사의 일환이었다.

 

김정학은 1960년 12월 16일과 23일, 1961년 4월 8일과 10월 23일에 당시 광주 암사리의 강가 유적을 조사하여 많은 유물을 수집하였다.

또한 1964년 11월 1일과 8일에는 경희대 사학과 김기웅과 함께 약 300미터 떨어진 지역을 시굴하여 토기 파편 약 1,9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이 지역이 '기하학문토기문화의 유적'이라 하였다.

김정학은 이른바 빗살무늬토기를 기하학문토기라 칭하였다.

 

임병태는 1964년 10월 같이 공부했던 김순경에게서 암사동 유적에서 다량의 빗살무늬토기와 이형異形 석기가 출토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뒤, 당시 채집·보관 중이던 석기 7점과 토기 파편 약 50점을 1966년 발간된 학술지 ≪고문화≫에 소개하였다.

유물을 채집한 장소는 광장교의 천호동 쪽 끝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암사동 한강변 밭 가운데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암사동 유적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 듯하다.

 

이후 경희대박물관에 의해 암사동 유적에 대한 공식 발굴이 이루어진다.

1960년부터 이미 암사동 유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조사를 진행 중이던 김기웅이 이끄는 경희대 사학과 팀은 1967년 6월 27일 암사동 지역을 조사하던 중 불도저에 의해 땅이 정지整地[땅고르기]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지층 단면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주거지와 화덕자리와 같은 돌무지가 눈에 들어왔고, 돌무지 주변에 대한 간단한 시굴 결과 빗살무늬토기 파편과 사질점토가 혼합된 목탄덩어리를 발견하였다.

그 다음날인 1967년 6월 28일 김정학과 함께 조사하여 주거지의 일부인 화덕자리인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후 경희대 발굴 팀은 장충중고등학교에서 야구장 공사를 하고, 주변에는 주택이 들어서고, 때마친 장마철이라 유적이 유실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7월 7일 긴급조사를 요청하였다.

이때 제출한 조사허가서의 내용을 보면 조사 장소의 위치가 확인되는데, 성동구 암사동 156번지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현장조사 등을 거쳐 1967년 7월 13일 발굴조사를 허가하였다.

 

발굴조사는 김기웅·김정학·정영호가 조사책임을 맡고 경희대 사학과 학생 45명이 참가하였다.

조사는 제Ⅰ지구와 제Ⅱ지구로 나누어 발굴했는데, 지구에서는 수혈유구竪穴遺構[땅에 구덩이를 만든 자리]가 3군데에서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3미터 간격의 화덕자리 3기가 발견되었다.

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가 1,323점 출토되었고, 회색토기 1점이 발견되었다.

 

 

<1968년 암사동 유적 연합발굴 모습 - 숭실대 발굴단(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후 1968년 6월에는 고려대·숭실대·경희대·전남대·영남대·서울대 등  대학 연합발굴단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이 발굴은 발굴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행히도 이현태가 2011년 학술지 ≪고문화≫에 대학연합발굴단의 발굴 관련 내용을 수록하였다.

 

경희대에 의해 긴급발굴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장충고 야구장 건설을 계속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런 경우 이 지역의 많은 유적과 유물은 어쩔 수 없이 파괴될 상황이었다.

이에 한국고고학협회에서는 1968년 3월 29일에 각 대학박물관에 공문을 보내 암사동 유적의 대학연합발굴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자는 김원룡이었다고 한다.

중요한 유적이 안타깝게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 고고학자의 깊은 뜻이 반영된 고육지책이었다.

 

이에 8개 대학이 참가하는 연합발굴단이 꾸려져 1968년 5월 13일 발굴 승인원을 제출하였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1968년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발굴조사를 허가하였다.

신청서에 따르면 발굴 위치는 성동구 암사동 156번지앞서 경희대가 발굴하였던 위치 같다.

발굴자는 한국고고학협회 회장인 김상기를 비롯하여 부회장 이홍직·김양선·김정학, 그리고 김원룡·진홍섭·정영호·김기웅·김용기·김병규·노석경·황용훈·임병태·윤세영이 참가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거나 고고학계 원로들이지만 당시 쟁쟁한 고고학자들이 총망라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참여 대학은 경희대 사학과, 고려대 사학과, 부산대 사학과,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숭실대 사학과, 영남대 사학과, 우석대 사학과, 전남대 사학과 등 8개 대학이었다.

한국고고학상 처음으로 연합발굴단이 만들어진 것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 간행을 물론 결과보고 등도 확인되지 않아 발굴 내용과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

실제 참여대학도 4개 대학에서 6개 대학까지 전해진 기록에 따라 다른데, 부산대와 우석대는 실제 참여하지 않은 듯하다.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각 대학별로 구역을 나누어 발굴을 진행하였으며, 조사 지역은 암사동 156번이지만 서쪽으로 120미터 떨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약 50여 기의 화덕자리를 조사하였고, 완형에 가까운 주거지도 발굴하였다.

발견된 유물들은 대형 빗살무늬토기, 돌화살촉, 갈돌, 탄화된 도토리 등이었다.

 

 

<1968년 암사동 유적 집터 발굴 모습 - 서울대 발굴단(사진 출처-출처자료1)>

 

암사동 유적은 얼마 안 있어 1968년 8월부터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에 의해 발굴이 다시 이루어졌다.

서울대 역사과의 발굴 장소는 장충고 야구장의 서남 모서리에 접한 자연제방의 일부였다.

당시 이 지역의 흙을 파기 위해 날마다 깊이 70~120센터미터 가량 파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 흙에 포함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에 8월 22일에 도착하여 23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하였다.

 

유적이 발굴된 한강변의 장충고 야구장은 한강 흐름과 평행으로 위치하고 있었는데, 발굴지역의 위치는 야구장과 접하여 강쪽의 약 130평방미터였다.

즉 발굴지를 중심으로 북서 방향은 한강이고, 남동 방향은 야구장, 북동 방향은 한강 상류쪽, 남서 방향은 한강 하류 쪽인 광장교이다.

야구장과 접하고 있어 발굴지역이 확장됨에 따라 일부가 포함되었다.

 

발굴 유구는 원형의 주거지로서,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A지역과 B지역에서 각각 1기씩 총 2개의 집터가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와 관련된 것은 확실하다.

 

출토된 토기 유물은 빗살무늬토기와 풍납리계통 토기로 나눌 수 있다.

풍납리계통 토기란 풍납동에서 출토된 토기 중 일부와 같다는 뜻에서 이름 붙인 것이다.

석기 종류로는 뗀석기(타제打製석기) 돌망치, 돌토끼모양 석기 3점, 그물추 4점, 간돌도끼(마제석부磨製石斧) 파편 2점, 간돌화살촉(마제석촉磨製石鏃) 2점 등 10여 점으로 이 지역에서 흔히 출토되며, 빗살무늬토기문화와 관계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밖에 쇳조각(철편鐵鞭), 쇠화살촉(철촉鐵鏃), 쇠낚시(철조鐵釣) 등 철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대롱옥(관옥管玉)[구멍을 뚫은 짧은 대롱 모양의 구슬]연주석連珠石[구슬을 줄줄이 늘어놓은 문양이 그려진 돌]도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이미 그 존재가 알려진 암사동 유적은 광복 이후에도 을축년 홍수로 유적들이 모두 파괴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편견으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단지 이 지역을 답사·조사하면서 유물 수습에만 치중하였다.

이런 편견은 1967년 우연치 않게 발견한 집터의 화덕자리로 모두 깨져버렸다.

야구장 건성 중이던 암사동에서 한 고고학자에 의해 유물이 아닌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이후 유적의 실상을 파악하고 보호하고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당시 고고학자들이 대학연합발굴단을 구성하여 2차 발굴을 실시한 것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자들의 진면목을 본 것 같아 마냥 고마울 뿐이다.

1971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3차에 걸쳐 집중 조사가 이루어지는 등 선사시대인들의 취락이었던 암사동 유적[5곳의 주거지 확인]이 적극 발굴됨으로써, 현재 서울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잘 남아 있는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가락동 1·2호분

 

<가락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가락동 지역의 백제 초기 고분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져 있으며, 보고서에 간략하게 그 내용이 남아 있다.

고려대박물관 발굴조사단은 1969년 8월 24일부터 9월 23일까지 성동구 가락동 494번지에 있는 백제 초기 고분을 발굴하였다.

발굴자인 윤세영에 따르면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이 백제 건국과 관련이 깊은 이 지역의 유적 조사 계획에 의한 사업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가락동可樂洞 고분古墳 발굴조사는 1960년대 진행되었던 이전의 발굴조사 경향과는 달랐다.

즉, 앞서 실시된 발굴조사가 학교별, 고고학자별 조사 과정에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후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반면, 가락동 고분 발굴은 발굴 전담 공공기관의 제안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나타나는 현상으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발굴하는 것이다.

순수발굴에서 목적이 있는 발굴로 그 성격이 변한 첫 번째 발굴이라 할 수 있다.

 

유적 위치는 당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서울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었던 곳에서 서남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석촌동 입구 평지의 논밭 가운데에 있는 백제 초기 고분이었다.

편의상 북쪽의 것을 제1호분, 남쪽에 있는 것을 제2호분이라 이름 붙였다.

이미 두 고분은 아랫부분(기저부基底部)이 많이 깎였고, 봉토封土[무덤 위에 쌓아올린 흙]가 많이 유실되어 외관상 원형으로 보였지만, 측량해 보니 비교적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올려 만든 무덤]이었다.

 

움무덤(널무덤 또는 토광묘壙墓)[땅속으로 구덩이를 파고 널(관棺)이나 덧널(곽槨) 없이 바로 유해를 안치하는 무덤]인 가락동 고분은 무덤을 덮고 있는 봉토는 많이 유실됐지만 바깥 봉토 아래에 깐 이음돌(즙석葺石)은 노출되지 않았다.

 

제1호분의 규모와 형태를 살펴보면 사각형 모양이나 극심하게 깎여 아랫부분의 각 변은 일정하지 않다.

발굴 당시 남아있는 긴 변은 약 14미터, 높이는 약 1.89미터.

봉토 표면은 잔디로 덮여 있으며, 잔디 아래 약 10센티미터 정도의 흑갈색 부식점토가 깔려 있고, 그 아래 23×15센터미터 정도 크기로 깬돌(할석割石)[강돌이나 산돌과 같은 자연석을 적당한 크길로 깬 돌]과 머리크기 정도의 강돌이 섞인 이음돌이 봉토 전면을 덮고 있었다.

 

제2호분은 겉으로는 원형으로 보이나 측량을 해보니 네모 형태였다.

무덤 아랫부분의 각 변은 12×15미터, 높이는 약 2.2미터다.

분구墳丘[언덕 크기만한 거대한 흙무덤]의 구조를 정상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널 구덩이를 구축한 뒤 밝은 황색점토를 약 70센티미터 정도 덮고 그 위에 석회와 점토를 혼합한 회갈색점토층이 약 30센티미터, 또다시 그 위에 약 50센티미터 두깨의 갈색점토층이 나타났다.

이 층 위에는 지름 30센터미터, 두께 20센티미터의 깬돌과 강돌로 이루어진 이음돌을 봉토의 전면에 깔아 돌층을 이루었으며, 이 돌층을 다시 약 15센터미터 두께 정도의 흑갈색점토로 덮었다.

봉토 표면에는 잔디가 무성하였다.

특히 2호분은 독무덤(옹관묘甕棺墓)[큰 항아리에 유해를 넣은 만든 무덤] 1기와 움무덤 3기 등 4개의 고분을 거대한 하나의 큰 분구로 덮어 구조상 특이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2호분의 출토유물로는 독을 안치한 널의 동서쪽에서 흑색 토기(흑도항黑陶缸)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고, 나무널을 안치한 움무덤의 동북쪽에서는 2점의 회색경질토기와 6점의 꺾쇠가, 남쪽 2개의 긴 사각형 널무덤에서는 회색경질토기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발굴자인 윤세영은 가락동 1·2호분을 단순한 움무덤 봉토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2호분의 경우 독무덤을 중심으로 다른 3개의 묘 구덩이(묘광墓壙)를 하나의 봉토로 덮은 것은 특이하다고 보았다.

특히 나무널이 내부 주체인 움무덤은 독무덤보다 앞서 만들어졌으며, 독무덤이 한강유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독무덤의 전래 경로를 다각도로 재고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하였다.

독무덤은 세골장洗骨葬[유해를 바로 매장하지 않고 어느 기간 동안 보존한 후 남은 뼈만 씻어서 새로운 그릇에 담아 다시 장사지내는 법]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추측이 옳다면 백제 초기에 이미 장사를 두 번 지내는 이중장제二重葬制인 세골장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발굴자는 가락동 1·2호분을 청동기시대 묘제에서 열국시대 묘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묘제로 보고, 백제고분의 출현 시기는 물론 건국 시기까지도 추정하였다.

움무덤의 하한을 서기전 1~2세기 쯤으로, 풍납토성의 축조 시기인 서기 2세기까지를 상한으로 추정하였다.

이런 견해는 백제 건국을 중국 문헌에 의존하여 4세기 쯤으로 이해하는 당시 학계 분위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고분의 축조 연대는 2~3세기 초를 넘지 않고 백제 건국도 이 시기와 근접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문헌학자는 물론 고고학자들도 대부분 아직 중국 문헌에 의존하여 삼국의 건국 시기를 늦게 보는 당시의 경향을 고려할 때 이런 발굴자의 견해는 1960년대 후반이라는 시기임을 고려한다면 백제 건국 시기를 상당히 앞선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최근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적극적 발굴과 함께 한성백제 관련 유적 발굴 결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결과 등으로 예전보다 건국 시기를 많이 앞서 보고 있는 경향이 많다.

그런 면에서 1960년대 후반의 가락동 고분 발굴자인 윤세영은 시대를 앞선 의견을 제시하였다 할 수 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3. 구글 관련 자료

 

2021. 6. 1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