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7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4: 사당동 요지와 화양지구(구의동) 유적 본문
서울 사당동 요지
1973년 초에 발견된 사당동舍堂洞 도요지陶窯址[도기를 굽던 가마 터]는 신라 변경지역인 한강유역에서 밝혀진 최초의 생활유적지로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사당동 요지의 잔구殘構[남아 있는 시설물 자취] 유무를 밝히려고 서울대에 발굴을 요청했다.
1970년대에 진행된 잠실지구 개발에 따른 유적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한 구제발굴과 비교되는 순수한 학술발굴이었다.
발굴 기간은 1976년 3월 26일부터 4월 16일까지로 구역 전체를 전면 발굴하기로 하였다.
사당동 요지는 발굴 당시 행정구역은 관악구 사당동 461번지 8필지로 사당초등학교 남쪽이었다.
위치상 한강 중류 남안, 즉 관악산에서 한강을 향하여 뻗은 지맥의 동남 경사면에 위치했다.
발굴 결과 발굴지역의 상당 부분이 이미 어느 정도 훼손되어 원래 가마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출토유물은 완전한 형태의 토기 4점을 포함하여 각종 파편破片을 합하면 수천 점 이상이 될 것으로 추측된다.
토기 모양에 따라서 나누어 보면 대체로 뚜껑(개蓋)·작은사발(완盌)·잔(배杯)·항아리(호壺)·병甁·쟁반錚盤(또는 반盤)·시루(증甑) 및 기와 등이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이 뚜껑·작은사발·작은병이다.
관심이 가는 유물은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들이다.
먼저 목달항아리(유경대호有頸大壺) 파편에는 '□□縣器村 何支爲□□(□□현기촌 하지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발굴자는 토기에 보이는 '현縣'을 금천현衿川縣이나 광주 과천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고, 이 지역 일대가 당시 대규모 토기 생산지였음을 말해주며, '하지何支'는 사람 이름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발굴단은 결론 부분에서 토기 특징이나 형태 등을 통해 8세기 무렵에 속하는 지방의 가마로 보았다.
서울 지역 안에 통일신라시대 유적이 발굴된 경우도 드물기도 하지만 당시 자료인 글자 자료가 그대로 나와 통일 이후 서울 지역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임은 틀림없다.
특히 '기촌器村'(계속)이란 명칭은 지방제도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마을 이름이다.
화양지구(구의동) 유적
잠실지구 일대의 구획정리사업은 1974년에 시작하여 1977년 화양지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 지구의 조사는 대상 면적이 고분 1기를 포함하는 3천 여평으로 행정주소로는 구의동 131번지 일대다.
방이동과 가락동 지구 조사에 비해 면적이 좁아 발굴조사단은 고분 발굴에 주력하였다.
이 유적은 행정구역으로 성동구 구의동에 속하며 신흥주택지구의 뒷산에 해당한다.
유적 북쪽에는 구의초등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자양초등학교가 길 건너에 자리하며, 자양초교 북쪽에는 건국대학교가 있다.
유적은 한강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낮은 구릉에 위치하는데, 구릉은 해발고도가 53미터로 높지 않지만 주변지역이 낮아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다.
보고서에서 얘기하는 위치와 지도로 보아선 지금의 청담대교와 잠실대교 사이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담대교에 근접한 뚝섬한강공원 위쪽 자양우성아파트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역이 아닐까 추정된다.
1977년 발굴조사 내용은 이후 20년이 지난 1997년에 종합보고서가 발간되면서 그 결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에 1977년의 발굴 결과를 간단히 살펴보자.
당시 발굴단은 이 유적을 고분으로 인식하면서 구조가 복잡하고 처음 보는 것이라 하면서 여러 의문점을 제시하였고, 유 성격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의 유적을 그 위치, 외형 등과 함께 고분일 것으로 '일단' 본다고 하였다.
당시 군사시설물로 보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발굴단은 고분으로 추측하였다.
이후 화양지구에서 발굴조사한 유적의 정식보고서는 20년 후 1997년 구의동 보고서 간행위원회에서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 — 구의동 유적 발굴조사 종합보고서≫로 발간하였다.
보고서 명칭도 화양지구에서 구의동으로 변경되었다.
이 보고서는 1993년 타계한 화양지구 발굴조사단장을 맡았던 김원룡 서울대박물관장의 3주기에 맞추어 간행한 것이다.
물론 해를 넘겨 간행되었지만 이런 제자들의 뜻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앞서 발간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를 내놓았다.
보고서 간행 머리말에는 김원룡 교수 제자분들의 고민과 미안함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한 반대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간행위원회는 판단하고 감히 이 연구 보고서를 집필하고 간행하게 된 것이다. 살아 생전이라면 과연 이 보고서가 가능했을는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을 하게 된 것이라 생각하면 고인에 대한 누가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다만 고고학이란 학문뿐 아니라 모든 학문은 다양한 견해와 주장이 많아야만 보다 실체에 접근할 수 있고 학문도 발전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비록 후학들이 잘못된 주장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아량으로 받아주시고 격려해 주실 것이라 믿고 삼가 영전에 이 보고서를 바친다."라는 조유전 간행위원장의 말은 스승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함께 발굴 결과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한 제자 고고학자들의 모습이 보여 흐뭇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 좀더 자세히 달라진 발굴 내용과 결과를 살펴보자.
종합발굴보고서의 간행이 미루어지고 있던 중 서울대박물관이 몽촌토성에서 발굴한 유물 가운데 고구려 토기인 나팔입항아리(광구장경사이옹廣口長頸四耳甕) 1점과 일련의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었는데, 구의동 출토 토기 종류도 이와 같은 고구려 계통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구의동 출토 유물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이루어졌고, 유적의 성격도 재조명하게 되었다.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토기로는 모두 19개 종류에 369점이, 철기는 1,300여 점의 쇠화살촉(철촉鐵鏃) 외에 15종 50여 점이 각각 출토되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와 양의 철기가 출토된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며, 출토 유물 중 무기류가 많은 점 등은 구의동 유적의 군사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발굴보고서에는 철기 무기류를 통해 구의동 유적을 고구려의 군사시설로 파악하였다.
이런 조사결과를 토대로 1997년 종합발굴보고서에서는 1977년과는 다른 결과를 제시하였다.
구의동 유적에 대해서 1977년 조사보고서에서는 백제의 분묘 유적으로 빈전장殯殿葬[왕이나 왕후가 승하하고 5개월 뒤 발인할 때까지 시신을 넣은 관(재궁梓宮)을 보관하는 전각인 빈전을 설치하는 장례절차]과 관련되었으며 동시에 군사적 성격도 함께 띠고 있는 유적일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1997년 보고서에서는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요새일 가능성이 크며, 이 유적과 연결선상에 있는 아차산 일대의 보루 유적도 지표조사를 통해 구의동 유적과 같은 성격의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고 하였다.
즉 구의동 유적은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두 유적을 같은 시기의 고구려 군사요새인 보루로 추정한 것이다.
구의동 유적에 대한 1997년 발굴보고서는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용감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20년이 지나 기존의 견해를 과감히 버리고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유물·유적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평가를 통해 결과를 수정하는 것은 사실 쉬운 결정만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보고서는 '훌륭한' 보고서다.
반면 개발우선주의에 의해 서울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유적이 파괴된 것은 아쉬을 뿐이다.
지금은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 보루가 잘 정비되어 서울의 훌륭한 보물이 되어 있는데, 한강변에 근접하여 존재했었던 또 다른 고구려 보루인 구의동 유적은 다른 어떤 보루보다도 삼국간의 치열했던 현장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사라져버린 아쉬운 유적, 보고 싶은 유적 가운데 하나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8. 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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