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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4: 몽촌토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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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4: 몽촌토성

새샘 2021. 10. 1. 22:14

<198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몽촌토성夢村土城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백제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몇몇 연구자들이 간단한 지표조사를 하긴 했지만 실제론 방치에 가까웠다.

1970년대 잠실지역 개발 때에는 매립용 흙이 부족하자 몽촌토성을 굴착하여 사용하고자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문화 인식 수준에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실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방치 수준의 몽촌토성이 문화유적으로 대접받게 된 계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 체육시설의 건립 지역이 몽촌토성이 중심이 된 지역으로 확정되면서부터 몽촌토성 보존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올림픽시설 부지 안에 위치한 이 몽촌토성 유적을 유적공원으로 정화·보존하기로 결론지었다.

 

몽촌토성 발굴조사는 1983년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발굴은 토성의 외곽 바닥(기저부基底部)과 해자垓字(垓子)[적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둘러판 도랑]를 확인함으로써 토성 보존구역 설정을 위한 예비자료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발굴도 대규모가 아닌 기초자료 수집의 성격을 띤 부분적 탐사조사였다.

 

이에 주로 외곽 조사에 중점을 두고 성의 축조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먼저 토성 크기는 남북 최장 730미터, 평균 540미터이고, 동서 최장 540미터, 평균 400미터로서 대체로 마름모꼴 형태이다.

성벽 길이는 정상부 기준으로 북서쪽 벽 617미터, 북동쪽 벽 650미터, 남서쪽 벽 418미터, 남동쪽 벽 600미터로소 총 길이 2,285미터이고, 이를 기준으로 한 넓이는 약 216,000평방미터(6만 7천 평)이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뻗어나간 외성外城 길이는 270미터이다.

성벽 높이는 지점에 따라서 모두 다르고 예전 지표 위에 토사가 많이 퇴적되어 있어 현재 높이와 당시 높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축조 방법은 기본적으로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부분적으로만 보강하여 쌓았다.

 

토성 내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는 발굴 당시 9개소이나 5개소는 후대에 만들었거나 낮은 성벽을 이용한 것이어서 축성 당시와는 관련이 없고, 또 다른 1개소도 지형 자체가 쉽게 통로로 이용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성문 시설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추측하였다.

성문이 있었던 곳은 3개소 정도로 추정했다.

 

토성 외부 시설로는 해자가 있는데, 성벽 정상부에서 약 30~50미터 떨어진 곳의 발굴 당시 지표 아래 3~4미터 지점에서부터 시작되고있으나 그 깊이와 폭은 발굴을 할 수 없는 실정이라 밝히지 못했다.

 

발굴단은 몽촌토성의 전면적인 정비와 복원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3가지 안을 제시했다.

첫째, 축성 당시 원형 그대로 노출시키고 토성 내외부에 당시 망루·목책木柵[나무 말뚝을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해자시설을 그대로 복원하는 방법, 둘째, 이후 정밀발굴로 중요 건물지 등이 나왔을 때 이 중 일부를 노출시켜 관람하게 하는 방법, 셋째, 토성 내부의 민가만을 철거하고 현 상태로 정화하되, 성벽 일부 단면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따로 전시관을 세워 당시의 원래 상태를 보여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 중 발굴단은 1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2안과 3안이 현실적인 방안이라 하였다.

 

 

 

<1984년 서울대 발굴단의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1983년의 기초자료 수집 성격의 발굴조사 이후 서울시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조사를 위해 서울대박물관에 조사를 의뢰하였고, 이에 서울대·숭전대·한양대·단국대 4개 대학 연합의 몽촌토성발굴조사단이 구성되어 1984년에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구역은 제1구역인 서북지역은 서울대, 제2구역인 동북지역은 숭전대, 제3구역인 동남지역은 한양대, 제4구역인 서남지역은 단국대가 각각 담당하였다.

발굴 기간은 1984년 7월 1일부터 8월 14일까지였다.

 

먼저 1구역인 서북지역을 발굴한 서울대 발굴단의 발굴 내용을 살펴보자.

발굴 지역은 임의로 A, B, C 세 지역으로 나누어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대부분 조선시대 건물 터와 기와들이 확인되었다.

 

숭전대 담당의 제2구역 동북지역은 A~E구역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A구역에서는 북문 터로 추정되는 지점과 그 동서 양쪽의 파괴된 성벽에 대한 단면 조사를 하였으나, 성문으로 추정할만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B구역에서도 별다른 시설물은 확인하지 못했고, C구역에서는 조사지역 일부의 검은 재층에서 강돌과 깬돌으로 이루어진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이런 돌무지 구조는 좀 더 확대 조사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하면서도 확대 조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D구역에서는 성벽을 동서로 횡단하여 단면을 조사하였고, 성벽 능선 위에 일부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돌무지 유구를 확인하였다.

이 중 보고서의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석회석의 사용은 매우 흥미롭다.

E구역에서는 토성 북동쪽 외곽에 위치한 외성으로 추정되는 구릉지대의 축조 방식과 규모를 알기 위해 외성 외곽 쪽 단면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목책 흔적으로 보이는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발굴단은 목책 흔적이라 보기에는 불충분하고, 확인을 위해서는 확대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한양대 발굴의 제3구역 동남지역은 A~D의 네 지구로 나누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A지구에서는 돌무더기 2기와 토건土建 구조물이 확인되었고,  B지구는 지형상 동문 터로 추정했던 지역이지만 조사 결과 성문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C지구에소도 건물 터 흔적은 찾지 못했고,  D지구는 마을 어린이들이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있던 언덕[구릉丘陵]이었지만 운동장이 되면서부터 깎여나간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토기 파편들과 돌도끼, 흙 어망추, 흙 가락바퀴[가락고동, 방추차紡錘車: 물레 구조물의 하나], 구슬 제품, 철 파편, 청자 파편, 기와 파편, 주물鑄物[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든 물건] 용기 등이었다.

 

단국대 담당의 제4구역 서남지역은 발굴 범위가 넓어 편의상 N, O, S의 세 지구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유구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제시대 유구는 발굴 당시의 상황에서는 노풍시키기 어려웠다.

발굴단은 본격 발굴이 이루어지면 백제시대 유구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출토유물로는 백제토기 파편, 신라토기 파편, 고려시대 기와 파편, 고려청자 파편, 조선시대 백자 파편, 쇠화살촉, 쇠칼 등이다.

 

몽촌토성 발굴보고서 내용을 보면 몽촌토성이 백제 관련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백제시대보다는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 중심의 발굴 결과가 기술되어 있다.

 

1984년 발굴조사 이후 토성 외곽과 성벽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일부가 복원되었고, 나머지 부분도 계속 복원·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985년 4호 저장 구덩이에서 출토된 쇠뼈(소뼈)로 만든 뼈비늘갑옷(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후 토성 내부에 있던 마을이 철거되면서 성 내부와 3개 성문 터, 그리고 외성에 대한 발굴조사와 산책로 같은 내부 시설물 공사에 필요한 자료조사를 위해 1985년에 다시 발굴이 실시되었다.

발굴 기관인 서울대박물관은 토성 내부의 발굴 지역을 크게 서북구역, 동북구역, 동남구역, 서남구역의 네 구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하였다.

 

보고서에는 토성 규모와 축조 방법에 대한 조사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앞서 1983년과 1984년의 보고서 내용과 크게 차이는 없다.

단 목책이 이번 조사에서 하나 더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목책은 이후 2014년 한성백제박물관이 실시한 서북지구 목책에 대한 조사에서 목책이 아니라 판축공법 때 판재를 지지하는나무기둥(영정주永定柱)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2000년 이후 발굴 내용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하여 서술할 것이다.

 

다음으로 토성 내부의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4개의 토단土壇[흙을 쌓아서 만든 단]은 1984년 조사 때 확인된 것인데, 토성의 서북쪽, 동북쪽, 동남쪽, 서남쪽에서 모두 4개가 확인되었다.

총 4기가 확인된 독무덤(옹관묘甕棺墓) 중 2기는 1983년 조사 때 동벽 구역에서, 그리고 나머지 2기가 이번 조사에서 추가된 것이다.

돌무덤(석총石塚)은 4기가 확인되었으며, 이 중 3기는 1983년 조사 때 확인된 것이었다.

 

널무덤(토광묘土壙墓)은 2기, 움집터(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는 3기가 각각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다양한 토기 파편들이며, 일부에서는 철제 말재갈, 중국 도자기 파편, 쇠뼈(소뼈, 우골牛骨)를 얇은 패로 만든 다음 구멍을 뚫어 연결한 일종의 갑옷인 뼈비늘갑옷(골제찰갑骨製札甲)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중국 서진시대의 동전무늬가 새겨진 도자기인 서진동전무늬도기(서진전문도기西晉錢文陶器) 파편과 육조시대 청자기 파편은 축조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성문 터 3곳 중 북문 터는 1984년 숭실대 발굴단이 북문 터로 추정하여 조사한 구역에 확인한 돌무지 시설물을 북문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다시 조사하였지만 성문 등 건축물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동문 터는 발굴 당시 남북 성벽 사이에 18~20미터 폭으로 뚫려 있는 부분으로, 판축면板築面은 확인되었지만 성문 관련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남문 터는 양쪽 성벽 사이에 약 35미터 폭으로 뚫려 있으며, 역시 백제 토기와 함께 일부 돌무지가 나타나 확대 조사하였지만 불규칙한 깬돌 몇 개만 더 나왔을 뿐 특별한 시설은 확인할 수 없었다.

 

발굴단은 조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몽촌토성의 축조연대와 사용 기간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했다.

가장 확실히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출토된 중국 서진시대(266~316)의 동전무늬(전문錢文)를 넣고 잿물(회유釉)을 발라 만든 회유전문도기灰釉錢文陶器 파편이다.

그 연대는 3세기 후반이고 도자기라는 성격상 그 유통연대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토성 축조 연대를 3세기 후반경까지 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상 올릴만한 고고학적 유물자료는 없다.

그리고 발굴단은 토성 축조와 관련하여 단기간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추측하였다.

 

축조 연대의 하한은 널무덤에서 나온 굽다리접시(고배高杯)와 목항아리(장경호長頸壺) 파편, 세발토기(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의 유물을 통해 5세기에서 5세기 후반경까지로 보았다.

몽촌토성은 대체로 3세기경부터 5세기말경까지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축조 연대는 ≪삼국사기≫ 기록을 대체로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발굴단은 보았다.

 

마지막으로 발굴단은 몽촌토성의 발굴 성과 및 의의와 함께 토성 복원과 보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보고서를 마무리하였다.

먼저 발굴단은 3차에 걸친 발굴 성과와 의의를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발굴을 통해 토성 축조 방법뿐만 아니라 축조 연대와 폐기 시기 등을 파악할 수 있었고, 백제 초기 저장 구덩이(저장공貯藏孔), 널무덤 등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조사할 수 있었다.

둘째, 많은 양의 백제 토기 파편들은 앞으로 백제 초기 토기 연구의 필수적인 자료가 될 것이며, 뼈비늘갑옷 등 지금까지 없던 귀중한 백제문화자료들이 나왔다.

셋째, 출토된 원통형 토기들은 찰흙으로 만든 일본 원통형 토용土俑인 식륜埴輪(일본어 하니와)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고, 서진 및 육조시대 자기 종류들은 백제 초기에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알려주는 것이어서 몽촌토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이런 의견을 통해 발굴단은 몽촌토성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

토성의 위치와 규모, 유물과 유구 등으로 보아 한성백제시대의 군사적·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주지인 거성居城이자 군사적 용도인 수성守城으로 규정하면서, 목책이나 해자 같은 방어시설물과 수많은 저장 구덩이의 존재는 군사적인 성격이 보다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 토성이 당시 으뜸되는 성인 수성首城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일단 위급 상황에서는 정부의 최후 거점이 되는 백제 왕가의 보루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측하였다.

 

이와 같은 발굴단의 몽촌토성에 대한 성격 규명은 흥미롭다.

즉 1985년까지는 몽촌토성을 왕성으로까지 인식하지 않았다.

당시까지의 출토 유적과 유물 상태로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수비성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7년 1호 집터의 기둥 구멍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동안 3회에 걸친 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몽촌토성 외곽은 현상 유지 수준에서 정비되었다.

이후 1987년부터 그 역사적 성격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3개년 계획으로 토성 내부에 대한 전면적 발굴조사를 실시하기로 하고, 1차년인 1987년에는 몽촌토성의 동북구역에 대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위)1987년 발굴한 독무덤과 (아래)1987년 쓰레기장에서 출토된 흙으로 구워 만든 도제 벼루(사진 출처-출처자료1)>

집터는 5기, 저장 구덩이는 총 9기가 확인되었다.

1기가 확인된 독무덤은 3호 집터 동남쪽에서 1미터 가량 떨어진 비탈에서 발굴되었다.

대형 항아리 1개를 묻은 단일 독(단옹식單甕式)으로서, 동북-서남이 긴축으로 긴 지름 180센티미터, 짧은 지름 120센티미터, 깊이 60센티미터의 타원형 널을 파고 높이 1미터 정도 크기의 항아리를 널 동북쪽에 치우쳐 입구 부분이 서남쪽으로 가도록 수평으로 안치한 것이었다.

 

널돌무지무덤(토광적석묘土壙積石墓)은 1기가 확인되었으며, 강돌(천석川石)은 남북 2.2미터, 동서 1.5미터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분포되어 있으나, 지대가 낮은 남쪽이 많이 훼손되어 일부 강돌들이 옆으로 퍼져 있었다.

 

그밖에 1호 집터에서 15미터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일대의 비탈에서 토기 파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발굴단은 일종의 유물 폐기장이 아닌가 추측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벼루인 도제陶製 벼루 파편기와의 마구리인 와당瓦當과 같은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은 확인된 와당이 기와집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증이며, 도제 벼루는 벼루의 사용계층, 즉 상류층이나 공공기관의 존재를 시사한다면서 앞으로의 발굴은 약가 높은 언덕땅(구릉지丘陵地)보다 저지대에 대한 전면 발굴이 필요하다 보았다.

 

이번 조사에서 몽촌토성의 역사고고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새로운 의견 없이 1985년 발굴보고서의 결론과 대동소이했다.

아직 조사된 유구와 유물의 성격상 새로운 의견 제시를 할 수 있는 조사 결과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1988년 3호 및 4호 집터(사진 출처-출처자료1)>

1987년부터 시작된 3개년 전면 발굴조사의 2차년도인 1988년 조사 지역은 토성 동남지구였다.

발굴 지역은 동문 터와 남문 터를 연결하는 폭 7미터 가량의 산책로 남쪽이며 전체 면적은 약 3만 평방미터이나 실제 발굴조사 면적은 5천 평방미터였다.

이미 1985년에 조사한 지역과 그 주변 일대를 정밀조사하는 방법을 택했다.

 

집터 4기가 확인되었으며, 3호와 4호 집터는 1984년과 1985년 조사 때 이미 일부분이 확인되었다.

발굴단은 이 집터를 수성守城과 관련된 일종의 군사적 성격을 띤 건물로 판단했다.

집터 각 층위에서는 토기 파편들과 가위를 비롯한 철기, 그리고 숫돌과 어망추, 가락바퀴 등이 나왔다.

 

 

 

<1988년 6호 저장 구덩이에서 출토된 유물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저장 구덩이는 모두 7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6호 저장 구덩이에서는 다양한 동물뼈와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발굴단은 와당의 제작 시기를 불교가 들어온 무렵인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로 추정하였다.

청자는 중국 청자인 듯하나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가 없었다.

 

네모 유구(방형유구方形遺構)는 고지대의 평탄면에 땅을 판 움집터(수혈竪穴)로서, 형태는 3.8×3.2미터의 정사각형에 가깝고 깊이는 1.2미터였다.

움 바닥에 기둥구멍이나 화덕 같은 시설은 전혀 없었다.

발굴단은 이 움집터가 일상생활과 관련된 집터가 아니라 몽촌토성 시기의 집터라면 일종의 군사시설이 아닐까 추측했다.

 

 

 

<1988년 네모 유구에서 출토된 나팔입항아리(사진 출처-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32_0040_0020_0010_0030_0010&whereStr=)>

이 네모 유구가 있던 지대의 각 층위에서는 여러 종류의 토기 파편과 철기 종류, 기타 흙제품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한강 유역의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실한 고구려 토기인 나팔처럼 벌어지는 긴 목과 4개의 띠고리 손잡이(대상파수帶狀把手)가 달린 나팔입항아리(광구장경사이옹廣口長頸四耳甕) 출토는 주목을 받았다.

이 토기는 고구려 중기 이후에 보이는 특징적인 토기 종류의 하나로서, 4세기 초~5세기 말에 걸쳐 계속 나타나고 있다.

 

 

 

<1989년 남문 터의 연못 터 윤곽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1989년은 2년 전부터 시작한 몽촌토성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의 마지막 해다.

조사지역은 토성의 서남지구로 남문 터에서 토성 내부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향해 걸어갈 때 왼쪽 성내 비탈지역으로 예전에 몽촌으로 불리던 자연마을이 있었던 지역이다.

지난 2년 동안 발굴하였던 동북지구와 동남지구는 대부분 성벽을 포함한 고지대인 반면 서남지구는 상대적으로 대지 형태의 지형과 저지대가 비교적 많아 지상 건물 터를 찾는 데 주력하였다.

 

먼저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주춧돌(초석礎石)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이 있는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서남지구 표고 35~40미터 사이의 고지대에 드러나 있었는데, 판축대지版築臺地[ 판으로 틀을 만들어 그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층층이 부어 다짐 방망이로 찧어서 단단하게 쌓아 올린 땅]와 마주보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구조가 정연한 지상 건물 터로 옆면 2칸, 앞면 4칸 이상이다.

 

10×10미터 규모의 정사각형 지상 건물 터도 있었는데, 여기서 적심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네모 형태의 판축토면版築面은 결국 통기초로 이루어진 건물 터로 추정되며, 이런 건물 터는 초기 백제시대는 물론 삼국시대 건물 터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초방식이다.

이 건물 터의 축조 연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출토 토기류를 통해 발굴단은 대략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였다.

 

온돌 구조가 확인된 건물 터도 드러났다.

표고 35미터 부근으로, 이미 상당 기간 동안 침식된 상태로 건물 터 윤곽은 추정하기 어려워 건물 규모나 구조는 알 수 없다.

발굴단은 만약 이 건물이 고구려가 조성한 것이라면 축조 연대는 475년 이후부터 신라가 한강을 회복한 시기인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고 보았다.

 

위 사진과 같은 모양의 연못 터는 몽촌토성에서는 처음 확인되었다.

모두 2곳에서 그 윤곽의 일부가 드러났으며, 엄청나게 쌓인 흙을 제한된 시간에 완전히 파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외곽 경계지점만을 확인하였다.

 

 

 

<1989년 출토된 다양한 동물 이빨(사진 출처-출처자료1)>

1989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로서, 백제 토기 1,896개, 고구려 토기 388개, 그리고 삼국시대 이전의 열국시대 토기 72개였다.

철기는 철도끼, 철화살촉, 쇠손칼[쇠주머니칼, 철도자鐵刀子:  길이 30센티미터 미만의 작고 매우 예리한 호신용 쇠칼] 파편, 철검, 꺽쇠[양쪽 끝을 꼬부려서 'ㄷ' 자 모양으로 만든 쇠토막]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기와 종류와 와당, 벽돌 그리고 중국 자기로는 앞서 1985년에도 출토되었던 서진시대에 만들어진 회유전문도기 파편과 육조시대 청자 등도 나왔다.

 

발굴단은 이번 보고서의 결론 마지막 부분에서 토기 모양의 변천을 통해 몽촌토성의 도성으로서의 성격을 제시하였다.

몽촌토성은 백제가 국가체제를 갖추는 무럽부터 공주로의 천도까지 한성백제 기간인 3세기 말부터 475년에 걸쳐 중요한 성곽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어 현재까지 한강 유역 일대에서 조사된 성곽 유적으로만 본다면 한성백제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발굴단의 몽촌토성 성격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번 1989년 발굴조사 때였다.

즉 이전의 발굴조사까지는 몽촌토성을 왕성으로까지 인식하지 않고 군사적 성격이 강한 수비성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1989년 보고서의 첫머리에서 1988년 몽촌토성 내의 고구려 토기 존재를 언급하면서 "몽촌토성이 도성都城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었다"라고 하여 처음으로 몽촌토성을 도성都城[임금이나 황제가 있던 도읍지 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그동안의 발굴보고서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도성'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수차례 이루어진 발굴 결과들과 1989년까지 확인된 유적과 출토 유물을 볼 때 과연 몽촌토성을 도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발굴단의 인식은 풍납토성을 백제 도성에서 배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2000년대 들어 활발히 이루어진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런 인식에 대전환을 가져왔다.

 

 

 

<2017년 현재 몽촌토성과 주변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10.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