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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5: 창경궁

새샘 2021. 10. 19. 18:03

<198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박물관이 들어서면서 창경궁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다.

광복 후에도 창경원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다가 1983년 동물원과 식물원이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비로소 옛 이름 창경궁昌慶宮을 되찾았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왕조 궁궐이었던 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으로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고, 이후 1483년(성종 14년) 지금의 창경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0년대에 창경궁을 발굴조사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창경궁의 훼손은 1907년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다.

순종은 즉위하면서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그해부터 창경궁 전각을 헐과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1909년 개원하였다.

 

그리고 1911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명하여 궁궐이 가지는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또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慈慶殿[대비전]이 있던 터에는 박물관을 세웠고,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길 율곡로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된 '창경원'은 광복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국민들의 유원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사실 시민들이 즐길 시설이 거의 없던 서울에서 1980년대까지 궁궐을 유원지로 이용 내지 방치했다고 해서 당시 문화 수준을 비판하는 것은 가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가장 많이 망가진 창경궁에 대해서 조금 더 일찍 복원 내지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무척 아쉽다.

 

 

<창경원 당시 놀이시설과 맹수시설(사진 출처-출처자료1)>&nbsp;

창경궁에 대한 복원 계획은 1984년 서울대공원이 조성되면서 시작된다.

서울대공원에 동물원이 생기면서 창경원 동물원이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후 창경궁 내 70여 동의 동물원·식물원 시설과 놀이터 등 시멘트 시설을 철거하였고, 복원·정비를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보고서의 표현에 따르면 창경궁을 중건重建[건물을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하기 위한 조사였다.

발굴조사는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 발굴조사 기간은 1984년 8월 23일~9월 30일이었고, 발굴기관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제연구소였다.

제1차 조사의 목적은 복원지역의 예전 지표를 찾아 복원 지반을 결정하는 자료로 이용하고, 복원지역에 건물 터가 남아 있는 지의 여부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발굴 이전 창경궁 안에는 명정전明政殿[왕이 나와 조회를 하던 창경궁의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하는 궁궐 부속건물과 장서각, 표본각 등 옛 건물이 23동, 동물을 수용하는 동물사 35동, 식물온실 5동, 그리고 놀이시설과 매점을 포함한 업체건물 10동, 기타 건물 24동 등 총 99동의 건물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1983년 철거공사를 시작하여 표본관을 제외한 고건물 22동만 보존하고 나머지 건물 및 시설물들은 전부 철거한 상태였다.

 

 

<창경궁 통명전 2017년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조사 지역은 주로 통명전通明殿[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 보물 제818호]의 전후와 그 주변, 양화당養和堂[왕비 생활 공간] 주변과 뒤쪽 축대, 옛 장서각藏書閣[1911년 일제가 자경전을 헐고 그 자리에 일본식 건물로 지은 조선왕실 유물 보관 박물관이며, 이후 왕실 보유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92년 철거] 앞, 경춘전景春殿[왕비와 대비 등 왕실 여성들의 침전] 앞뒤 기단과 정자인 함인정涵仁亭 주변과 숭문당崇文堂[임금이 평상시에 신하들과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비공식 편전便殿] 사이, 숭문당 주변과 명정전 사이, 명정전 주위와 그 월랑月廊[궁궐의 정당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으로서 행각行閣 또는 상방箱房이라고도 부름]의 동서쪽 연결 부분, 홍화문弘化門[창경궁 정문] 서남쪽 기단 앞과 남과 북의 십자각十字閣[성문과 연결되어 궁을 지키는 망루 역할을 하는 누각]의 행각 연결 부분, 옥천교玉川橋[창경궁 정문 홍화문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외부와의 경계를 삼기 위해 궁궐 정문 앞에 만든 개천으로서,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인 옥류천玉流川 다리] 주변, 북쪽 십자각 북쪽 담장 기단, 영춘헌迎春軒[후궁들의 처소] 앞 등이며, 약 100여 개소를 시굴조사하였다.

 

 

<1980년대 창경궁 명정전 북쪽 월랑 터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제1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시굴조사 지역 예전 지반의 전반적 추세는 서쪽에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낮아지고 있으며, 명정전 뒤쪽에서 홍화문 남쪽 기단 앞까지는 약 6.7미터의 고저 차이를 보인다.

또 경춘전과 환경전 사이를 지나는 남북선을 따라가보면 양화당 쪽과 표본관 터 쪽이 높아지고 있어 그 차이는 북으로 약 2.8미터, 남으로 약 1.2미터 차이를 보이며, 경춘전 남동 부분이 가장 낮았다.

 

그리고 명정전 북쪽 월랑의 북쪽은 저지대로, 이곳을 통하여 물이 빠져나가 옥류천으로 흘렀을 것이고, 예전 장서각이었던 언덕과 생물표본관이었던 언덕이 낙선재와 창덕궁을 통하여 하나의 맥을 이루어 명정전의 일곽을 감싸는 듯 둘러져 있었다.

 

제2차 발굴조사 기간은 1984년 11월 3일부터 1985년 4월 22일까지였고, 역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가 발굴을 담당하였다.

이번 발굴은 1차 발굴 결과에 따른 보완 조사와 복원지역에 대한 집중 발굴조사였다.

 

이에 따라 이후 건물이 복원된 명정전 앞의 남쪽 행각 터와 북쪽 행각 터, 명정전 앞의 남북 월랑 터, 명정전 북쪽의 부속건물 터와 제1·2 월랑 터, 문정전 터와 그 전후 복도 터, 문정전 동쪽 월랑 터, 빈양문賓陽門[명정전 후문]터와 그 앞쪽 남북 방향 월랑 터, 숭문당 동쪽 문정전 사이, 숭문당 남쪽 화계석단花階石段[돌계단에 만든 화단] 터 등을 전면적으로 발굴조사하였다.

 

제2차 발굴조사 결과를 각 건물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명정전 남쪽 월랑 동쪽 끝에서 동쪽으로 남십자각 사이에 놓인 남행각南行閣 터와 북쪽 월랑 동쪽 끝에서 북십자각 사이에 놓인 북행각 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동쪽 부분과 수각水閣[물가나 물 위에 지은 정자] 주변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주춧돌(초석礎石)의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초석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 석렬石列이 노출되었고, 부분적으로 기단석이 노출되어 기단의 남북 폭을 측정할 수 있었다.

 

다음은 명정전 앞 남쪽의 월랑 터는 발굴 당시 남쪽 월랑 서쪽 끝에서 연결되어 서쪽으로 뻗어 명정전 앞 월대月臺[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 남쪽에 남쪽으로 뻗은 석축 앞에서 끊긴 것 같았는데, 유구가 많이 유실되어 확인은 불가능했다.

 

명정전 북쪽 월랑 터는 명정전 북쪽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발굴 당시 석축 뒤쪽에 원래의 석축이 2~3단 노출되었으며, 그 앞에 계단 터가 노출되어 있었다.

이 석축의 복원 높이는 석축 앞 예전 지표에서 1.0~1.2미터 정도였다.

 

동서로 뻗은 제2월랑 터는 동에서부터 서쪽으로 올라가며 지반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서쪽 끝은 동쪽 끝보다 약 70센터미터 높았다.

제2월랑 터 서쪽에서의 토층 조사 결과 예전 지반에서 약 1.5미터 지하에서 땅에 고정되어 있는 말뚝을 발견하였다.

 

다음으로 명정전 북쪽 부속건물 터는 북쪽 월랑 터의 서쪽 끝에 있는 방화벽에서 서쪽으로 1.3미터 떨어져 서변 기단석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며, 월랑 터를 지나 북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남쪽 끝 부분에는 제2월랑 터를 지나 명정전 쪽으로 더 연장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유구의 남북 길이는 약 29미터였지만 실제 길이는 이보다 더 길었을 것이다.

 

다음은 빈양문 터에 대한 조사결과다.

빈양문 앞 복도複道[건물과 건물 사이에 비나 눈이 맞지 않도록 지붕을 씌워 만든 통로]의 주춧돌 적심 석렬 밑은 발굴한 결과 이 주춧돌은 개축되면서 움직여진 것이 밝혀졌는데, 이것은 명정전 뒤쪽에 퇴랑退郞[뒷문과 연결된 복도]을 설치하면서 기둥 칸이 조정되면서 약간 옮겨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1980년대 창경궁 문정전 터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마지막으로 문정전 터는 명정전 남쪽 월대에 이어 남으로 향한 동변東邊 기단열이 노출되었고, 건물 터의 남변과 서변에서도 기단 석렬이 드러났다.

이 건물 터의 기단 크기는 남북 약 20미터 동서 약 20미터의 네모 형태이다.

 

또한 문정전 터 남쪽 기단에서 남으로 약 19미터 떨어져서 남북 방향의 복도 터로 보이는 유구가 나왔는데, 주춧돌 9개와 벽돌이 노출되었다.

이 복도의 기단 폭은 약 4.5미터, 복도의 기둥 칸 폭은 약 2.3미터이었다.

 

출토유물은 크게 철제 종류와 자기 종류 그리고 기와와 벽돌(와전瓦塼)로 나눌 수 있다.

철제 종류로는 철제 문고리, 철제창, 은제장식꽂이 등이 나왔고, 자기 종류로는 백자병, 백자대접, 청자병, 청자접시, 청자항아리, 흑유병黑釉甁[산화철 성분이 많은 유약을 두껍게 발라서 흑색 또는 흑갈색을 띠는 자기], 분청사기粉靑沙器[청자에 백토白土로 분을 발라 다시 구워 낸 회청색이나 회황색을 띠는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와 벽돌 종류로는 여러 문양의 와당瓦當[기와의 마구리]과 암막새, 숫막새 등이 나왔다.

 

이후 이런 발굴 결과를 토대로 창경궁에 대한 중건 공사는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이렇게라도 궁궐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전까지의 발굴 대상이 주로 선사시대와 고대사에 한정하여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처음으로 조선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음도 의미 있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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