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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0: 경복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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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0: 경복궁

새샘 2021. 12. 31. 14:20

198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경복궁慶福宮조선왕조의 법궁法宮[궁궐에서 가장 으뜸인 궁궐로서 왕이 임하는 제1궁궐, 정궁正宮이라고도 한다]이다.

태조 4년인 1395년에 창건하였고, 조일전쟁(임진왜란) 때의 큰 화재로 270여 년 동안 그 기능을 잃었다.

이후 고종 때 대대적인 중건이 이루어져 1888년에는 그 규모가 7,725칸이나 되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근대에 이르러 일제강점기 때 파괴·훼손·변형되었다.

이렇게 망가진 경복궁의 복원·정비를 위한 발굴조사는 창경궁과 경희궁에 이어 1990년이 되어서야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45년이 지난 후다.

 

문화재관리국은 경복궁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1차로 침전寢殿[임금이 자는 방인 침방이 있는 전각]인 내조內朝[연조燕朝라고도 부름: 궁궐 영역 중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왕이 보통 때 안식을 취하는 영역] 지역을 정비하기로 결정하였다.

 

 

경복궁 침전 지역 발굴조사 개토제 모습

조사범위는 경회루 동쪽 사정전思政殿에서 아미산峨嵋山까지의 약 4천 평에 이른다.

조사대상 건물 터는 강녕전康寧殿 구역 내 5개 동과 교태전交泰殿 일곽一廓[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친 지역] 및 함원전含元殿, 흠경각欽敬閣 등 총 8개 동이며, 이 두 개의 구역을 ㅁ자로 둘러싸고 있는 행각行閣[궁궐의 정당正堂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및 함원전과 흠경각 사이에 있는 서편 행각도 조사대상 건물들이다.

 

발굴 기간은 앞뒤가 다른 건물의 유구들이 층위를 달리하여 중복 노출되어 있어 계획과는 달리 전체를 조사하는 데 약 3년이 걸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1차 조사는 1990년 5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실시되었다.

발굴 범위는 강녕전 구역인 강녕전,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연길당延吉堂, 응지당膺祉堂, 어정御井(우물 터)을 먼저 조사하고, 이어서 교태전 구역인 교태전 일곽과 흠경각, 함원전을 조사하였다.

 

제2차 조사는 1991년 4월 22일부터 12월 중순까지 이루어졌다.

발굴 내용은 이미 1차 조사가 끝난 건물 터 8개 동에 대한 선대先代 유구 조사, 행각 터의 복원계획 유구 조사 등으로서, 복원공사를 먼저 진행할 강녕전 터의 선대 유구의 잔존 유무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제3차 조사는 1991년 12월 중순부터 1992년 12월 30일까지 이루어졌는데, 발굴 내용은 함원전과 흠경각의 선대 유구에 대한 조사와 복원 계획이 있는 서쪽 행각 터 조사, 그리고 복원 공사장 안의 작업 때문에 미처 조사하지 못했던 배수로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된 각 건물에 대한 보고서 내용이 너무 많아 일일이 정리하기에도, 독자들이 읽기도 힘들 정도이다.

대신 발굴단이 보고서 끝에 발굴 결과에 따라 유구에 대해 정리한 의견을 살펴보자.

이는 각 건물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전체 조사 내용에 대한 총괄적 의견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복원 계획이 있는 유구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조사 지역인 침전 일대의 건물들에 사용된 석재는 모두 화강암으로, 고종 때에 중건된 시기(1868년)의 적심[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초석礎石)의 밑을 판 다음에 자갈 등을 채워 건물 침하를 막는 시설]은 화강암 장댓돌[장대 또는 장대석長臺石: 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을 재활용해 축조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고종 중건 시기의 건물 기초 터파기는 선대 유구 조사를 겸하여 연생전 조사 때에 확인되었는데, ㅁ자형의 줄터파기[통줄파기 trench exacavation: 기초 터파기 공사에서 좁은 폭으로 길게 파는 방법]로 하였다.

이 방법은 건물 대청이 되는 중앙부는 그 대청의 크기만큼 ㅁ자 형태로 그대로 두고, 그 바깥의 기단부를 포함한 전체를 ㅁ자로 폭넓게 줄파기한 것이다.

 

또한 발굴단은 함실아궁이[솥을 건 아궁이 뒤 방고래가 시작되는 어귀에 조금 높게 쌓아 불길이 아궁이로부터 골고루 넘어가게 만든 언덕인 부넘기 없이 불길이 곧장 방고래로 들어가게 만든 아궁이], 개자리[아궁이의 불기운이 굴뚝으로 바로 바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열기를 머물게 하는 구덩이] 또는 연도煙道[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의 기초유구로 각 단위건물의 대청, 퇴退[물림간間: 본채의 앞뒤나 좌우에 딸린 반 칸 너비의 칸살], 온돌방의 배치를 추측하였다.

개자리 유구는 교태전의 동·서쪽 2개소가 가장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함원전과 경성전에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다.

 

연도는 건물의 규모에 따라 크기나 칸수에는 차이가 있으나 축조방법과 사용 재료는 거의 같다.

공통점은 건물 내부에서 기단을 지나는 부분은 전부 기단 지대석址臺石[지댓址臺돌: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과 같은 높이의 장대석]으로 연도의 벽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단위건물의 아궁이 형태는 모두 함실아궁이이며 연길당과 응지당에 가장 잘 남아 있었다.

굴뚝 배치는 건조물 배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좁은 공간에 여러 전각들을 배치하다 보니 공간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모자란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른 행각의 벽체나 후원의 아미산 돌계단 위에 배치한 것이다.

 

어도御道[궁궐에서 왕이 다니는 길로서 한가운데 위치한 살짝 높게 만든 길]의 유구는 강녕전에서 사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향오문嚮五門 사이와 강녕전 뒤에서 교태전의 양의문兩儀門 사이에 남아 있었다.

이 유구들을 통해 어도를 살펴보면, 폭은 193센티미터이며, 가는 화강재 장대석으로 양 측면을 마감하고 그 내부에는 황색 점토로 다진 다음 윗면에 사각형의 화강재 판석 3장을 붙여 폭으로 놓았다.

 

 

경복궁 침전 지역에 노출되어 있던 중심 배수로

마지막으로 내전의 배수체계를 살펴보자.

내전 일곽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서로 다른 체계의 배수로가 암거暗渠[속도랑: 물을 대거나 빼기 위하여 땅속이나 구조물 밑으로 낸 도랑] 형태로 땅속에 묻혀 있었다.

동쪽 배수로는 아미산 동쪽에서 시작되어 동으로 15.5미터 정도 약간의 곡선을 이루면서 나오다가 남쪽으로 꺾여 47미터를 내려온다.

이곳에서 다시 직각으로 동으로 꺾여 사정전 북동쪽 외부의 동서 방향 배수로와 연결된다.

 

이제 고종 중건 이전 시기의 선대 유구에 대한 살펴보자.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각 건물 터의 선대 유구들은 하나같이 같은 층위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적심 유구들이 그 열과 방향이 다르게 또는 중복되게 노출되었다.

특히 강녕전 터의 경우 시기가 다른 적심들이 3가지 이상 중복 노출되었다.

 

발굴단은 이렇게 시기를 달리하는 다양한 유구들은 우선 선·후의 유구를 구분한 다음 시대별로 나뉜 유구들을 조합하여 동일 시기의 건물 평면 형태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3가지 형태의 강녕전 평면 형태를 구하였다.

 

 

교태전 발굴 당시 모습

교태전 역시 시기를 달리하는 원형 잡석 적심들이 동일층에서 열이 다르거나 중복되어 노출되었다.

두 시기의 적심 가운데 후대의 교태전을 복원한 결과, 동서가 긴축인 직사각형으로서 앞면 9칸, 옆면 3칸이지만 남아있는 적심으로는 앞면 9칸과 옆면 2칸뿐이었다.

 

이어 선대 교태전을 조사하여 복원한 결과, 고려시대의 건물 유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았다.

다만 이보다 남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교태전 터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북 축이 다른 건물 유구가 이번 조사에서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복원되는 함원전은 앞면 4칸에 옆면 4칸 크기다.

앞면 4칸의 기둥 칸 치수는 동에서 서로 각각 270, 300, 300, 270센티미터이며, 옆면은 남에서 북으로 195, 270, 270, 195센티미터이다.

선대 함원전의 북쪽 적심들과 고종 중건 때의 아미산 돌계단과는 불과 90센티미터 떨어져 있다.

따라서 발굴단은 선대 함원전이 존대하고 있을 당시 아미산은 북으로 더 물러나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였다.

 

 

경복궁에 출토된 청기와 막새

이번 3차에 걸친 발굴조사의 출토유물로는 청개와靑蓋瓦(청기와), 막새, 명문기와 조각, 벽돌, 분청사기, 청화백자靑華白瓷[흰 바탕에 푸른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자기], 백자, 질그릇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돌뚜껑, 옥구슬, 수정, 골각기骨角器[동물의 뼈ㆍ뿔ㆍ이빨 따위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철제 와정瓦釘[기와 잇는 쇠못], 꺾쇠(설자楔子), 철제 문고리, 돌쩌귀[문돌쩌귀: 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는 데 쓰는 두 개의 쇠붙이로서, 암짝은 문설주에 수짝은 문짝에 박는다], 말 편자, 철제 자물쇠, 열쇠, 인두, 동전(상평통보, 도광道光통보, 일본 동전 등) 등이 나왔다.

 

 

(위)연생전 발굴조사 후 묻은 표석, (아래)발굴 당시 자문위원 현장지도 모습

경복궁 발굴은 이번 3차에 걸친 발굴조사 이후에도 계속 추진된다.

그러나 이미 많이 파괴되고 변형된 조선의 얼굴인 경복궁은 장기적이고 치밀하며, 계획적인 복원을 위한 조사가 아닌 철저히 복원만을 위한 조사가 급하게 진행되었다.

 

보고서 곳곳에 보이는 발굴과 함께 이루어지는 복원공사 모습은 이 발굴의 목적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아쉬움만 남는다.

 

 

경복궁 교태전의 지금 모습(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un2014&logNo=220881166362)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12.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