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2: 인도-유럽어족의 이주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2: 인도-유럽어족의 이주
새샘 2022. 3. 1. 16:02
고대 근동의 변화 | |
셈어 Semitic 사용 민족의 수메르 Sumer 침입 | 서기전 2000년 |
인도-유럽어족의 근동 도래 | 서기전 2000년 |
아시리아인 Assyrian에 의한 교역 네트워크 조직 | 서기전 1900년 |
구바빌로니아 제국 Old Babylonian Empire의 흥기 | 서기전 1800년 |
히타이트 제국 Hittite Empire·카시테 왕조 Kassite Dynasty·미탄니 왕국 Mitanni Kingodm 의 성립 | 서기전 1800~1400년 |
1. 인도-유럽어족의 이주가 고대 근동의 삶에 미친 영향
1786년 인도에서 근무하던 영국인 판사 윌리엄 존스 William Jones는 선사시대에 대한 지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동시에 역사언어학 연구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게 될 대단한 발견을 했다.
여가 시간을 산스크리트어 Sanskrit(범어梵語, 천축어天竺語)—인도의 주요 언어들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 연구에 할애한 존스는 산스크리트어가 단순한 우연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리만큼 라틴어 Latin 및 고대 그리스어 Greek와 문법과 어휘 면에서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흥미를 느낀 그는 계속해서 초기 게르만어 Germanic, 유럽의 고대 켈트어 Celtic, 고대 페르시아어 Persian등을 연구한 끝에 이 언어들 역시 산스크리트어와 현저히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모든 언어들이 지금은 없어져 버린 공통의 언어 근원에서 파생된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 존스가 그 존재를 확인한 고대 언어 및 그로부터 파생된 후기 언어들은 (인도에서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고려해서) 인도-유럽어 Indo-European(인구어印歐語)로, 그리고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인도-유럽어족(인구어족) Indo-European family로 불리게 되었다.
존스 이후 학자들은 인도-유럽어 및 그 언어의 사용자들에 대한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 언어의 원래 형태인 원시 인도-유럽어 Proto-Indo-European(PIE)을 특정 시기에 단일 인구집단이 사용했는가?
인도-유럽어는 어떻게 확산되었는가?
정복에 의해?
단순한 이주와 완만한 침투에 의해?
아니면 '물결 전진 모델(wave-of-advance model)—원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농경민이 경작할 새로운 땅을 찾아 새로운 정주지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그들의 언어가 서서히 전파되었다는 가설—을 따라서?
이 언어의 확산 과정을 특정한 도기 형태나 매장 관습을 기준으로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유물은 언어의 변천과는 무관한가?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인도-유럽어라는 언어 형태가 서기전 2000년 직후 근동과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초기 형태의 페르시아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란고원으로 밀려들어갔고, 히타이트인 Hittites은 오늘날 터키 반도인 아나톨리아 Anatolia 중부에 있는 그들의 역사적 고향에 도달했다.
같은 시기에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다른 집단이 에게해 Aegean Sea 연안으로 이동했고 토착 언어 집단과 결합해 초기 형태의 그리스어 Greek를 만들어냈다.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또 다른 집단은 동쪽으로 향했고, 일부는 중국 서부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유럽어족이 이 시기에 근동으로 이동한 유일한 새로운 집단은 아니었다.
셈어 Semitic 사용 집단 또한 그 지역으로 진입했다.
맨 먼저 아카드인 Akkadian이, 계속해서 아모리인 Amorite, 아시리아인 Assyrian, 페니키아인 Phoenician, 가나안인 Canaanite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의 이주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서기전 2천년기 이후 서양문명은 셈어 또는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문화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격변을 초래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 지역의 이전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 종말론적인 파괴자였던 것은 아니다.
처음 옛 문명과 맞닥뜨렸을 때는 거칠게 굴었을지 모르나, 그들은 신속히 적응하면서 기존의 도시생활과 조직을 확대·발전시켰다.
2. 아나톨리아의 흥기
1장에서 본 것처럼, 도시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중부, 즉 수메르 Sumer와 아카드 Akkad 지역에서 처음 형성되었다.
그러나 북쪽의 아시리아 Assyria 역시 도시 모델을 채택했고 그것을 인근 아나톨리아 지역에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나톨리아의 산악 지대는 놀라우리만큼 자연자원이 풍부했지만 수메르인 Sumerian 과 아카드인 Akkadian은 그것을 거의 개발하지 않았다.
그 지역 경제를 개발하고 아나톨리아—특히 카파도키아 Cappadocia로 알려진 지역—에서 도시생활의 확산을 가속화시킨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시리아는 아나톨리아가 나중에 주요 제국 세력으로 흥기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서기전 1900년에 이르러 아시리아 대상隊商(카라반 caravane: 사막이나 초원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지방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먼 곳으로 다니면서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 집단)들은 아나톨리아 지역에,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사이 지역에 광범한 교역 망(네트워크 network)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인은 그 지역에서 군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카파도키아의 지방 지배자들—이들은 후기 신석기의 대규모 촌락과 흡사한 요새를 지배했다—과 우호관계를 구축했다.
아시리아 상인들은 지방 유력자들이 거느린 군대의 보호를 받아 교역을 조직화했고, 그것은 카파도키아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시리아의 유력 가문들은 각기 다양한 분야의 교역을 맡아 가격을 결정하고 교역로를 지정했으며 자기들끼리 이익을 나누었다.
아나톨리아의 교역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거주하면서도 아시리아인은 카파도키아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인은 왕의 고문과 관료로서 봉사했고, 도시의 유력 가문과 혼사를 맺었다.
그 과정에서 아시리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그 부산물을 아나톨리아 및 북부 시리아로 가져다 주었다.
3. 히타이트인과 카시테인
아시리아의 기여에 힘입은 도시화의 물결을 따라 아나톨리아, 북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새로운 왕국과 새로운 인구 집단이 출현했다.
히타이트인 Hittite은 서기전 2000천경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수많은 인도-유럽어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히타이트인과 그 언어는 그 지역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소수 지배계급 및 지배 언어가 되었다.
히타이트 지배자들은 중앙 아나톨리아의 번창한 도시들(특히 카파도키아)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뿔뿔이 흩어진 채 정치적 독립 상태에 머물러 있다가 서기전 1700년 무렵 이들 도시국가 중 한 도시의 지배자가 히타이트인을 하나의 히타이트 제국 Hittite Empire으로 통일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뒤 그 왕국의 후계자는 전사 귀족을 좀 더 효율적인 군대로 조직했다.
그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그 일대 전략적 요충지인 산악 요새 하투사스Hattusas(하투사 Hattusa, 하투샤 Hattsha)를 점령했다.
왕은 새로운 수도 이름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하투살리스 Hattusalis로 바꾸었다.
그가 히타이트 제국의 건국자다.
히타이트인은 격렬한 군사 문화를 표출하면서 청동기시대 최강의 군대를 전투에 배치했다.
히타이트 왕은 전쟁 치르는 일과 거칠과 야심만만한 전사 귀족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았다.
이런 군사적 전통과 나란히 히타이트인은 자신들의 언어를 법률 기록 등에 사용하기 위해 쐐기문자 cuneiform(설형楔形문자)를 채택하는 등 피정복자의 습속을 열정적으로 수용했다.
하투살리스 1세 치세에 히타이트인은 아나톨리아 고원 전역을 지배했다.
아시리아인과 마찬가지로 히타이트인은 이 풍요로운 지역의 교역로를 장악하려고 애썼다.
아시리아인과 달리 히타이트인은 군사적 정복도 서슴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이유(교역로 장악과 군사적 정복 활동) 때문에 히타이트인은 구리와 비소를 운송하는 육상 교역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비소는 구리와 섞어 당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기본 재료인 청동靑銅 bronze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금속이었다.
약탈과 교역을 병행하면서 하투살리스는 히타이트 왕국을 경제적·군사적 강국으로 변화시켰다.
하투살리스의 손자이자 계승자인 무르실리스 1세 Mur-silisⅠ(재위 서기전 1620경~1590)는 한층 더 역동적이고 야심만만했다.
그는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을 지배하고자 했으며 북부 시리아의 작지만 강력한 왕국들을 복속시키고자 했다.
눈부신 원정 끝에 그는 동남쪽의 메소포타미아로 향했다.
진군하면서 전리품과 공물을 징수했고 마침내 바빌론 Babylon의 전설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
바빌론은 아직 아모리 왕국의 중심지였고, 함무라비의 먼 후손이 지배하고 있었다.
무르실리스 1세는 서기전 1595년 바빌론을 약탈해 그곳에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재화를 탈취했다.
그런 다음 폐허가 된 도시를 방치한 채 물러났다.
그 뒤 근동 역사에 일종의 암흑기가 이어졌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관한 사료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바빌론 약탈 이후 수백 년 동안은 격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카시테인 Kassite으로 알려진 집단이 황폐한 도시 바빌론으로 이주해 구바빌로니아 왕국 Old Babylonian Empire을 장악하고 카시테 왕조 Kassite Dynasty를 세웠다.
카시테인의 기원과 언어와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침입자들과 마찬가지로 카시테인은 그곳에서 마주친 기존 문명에 신속히 적응했다.
카시테인은 그 뒤 500년 동안 바빌로니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 속에서 지배했다.
무르실리스 1세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에서 황급히 물러난 것은 히타이트 왕국의 불안정한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무르실리스의 권력이 커지자 전사 귀족들은 긴장했다.
그들은 중앙집권화된 왕권에 지위와 권력을 순순히 양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르실리스는 본국에서 발생한 소요 때문에 속히 바빌론을 포기해야만 했다.
수도 하투사스로 돌아온 그는 궁정 내부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가 암살당한 뒤 100여 년 동안 히타이트 제국의 세력은 쇠락을 거듭했다.
4. 미탄니 왕국
히타이트인과 마찬가지로 미탄니인 Mitanni도 인도-유럽어족의 소수민족이었다.
그들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원주민 사이에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다.
이들 전사 귀족계급은 서기전 1550년경 북부 시리아를 침입했다.
이미 무르실리스에 의해 황폐화된 지역을 장악한 그들은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과 북부 시리아를 통합해 미탄니 왕국 Kingdom of Mitanni을 만들었다.
미탄니인은 말이 끄는 가볍고도 바퀴에 살 달린 전차—궁수를 싣고 들판을 누비면서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다—를 비롯해 근동의 전쟁 방식에 다양한 혁신을 가져왔다.
이런 혁신을 통해 그들은 한동안 히타이트인을 서쪽에 꼼짝 못하도록 묶어두었고, 동쪽의 막강한 아시리아를 예속적인 위치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미탄니인의 적들이 전차로 무장하고 보병과 기병을 보호하기 위해 비늘 있는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하자 군사적 세력균형은 미탄니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서기전 14세기에 왕실 내부의 싸움으로 허약해진 미탄니 왕국은 재기한 히타이트의 침공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히타이트인은 몰락한 미탄니 왕국을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간의 완충 국가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북부 시리아에서 미탄니 왕국이 붕괴했다는 것은 바야흐로 이집트인과 히타이트인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임박했음을 의미했고, 그것은 두 제국에 다같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런 갈등 상황과 이집트 신왕국이 어떻게 제국 세력으로 성장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중왕국 말기의 이집트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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