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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5: 풍납토성2

새샘 2022. 3. 4. 21:52

1990년대 발굴된 풍납토성 유적 위치

 

 

 

1999년 6월 7일부터 10월 7일까지 풍납지구 긴급발굴조사단의 한 곳인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풍납토성風納土城 동벽東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기존의 발굴조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앞서 실시된 발굴이 아파트 건축을 위한 구제발굴이었다면, 이번 조사는 순수한 학술발굴이었다.

 

앞서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에 이어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풍납토성 유적에 대한 근본적인 보존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문화재청과 서울시에서는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풍납토성 동벽 일부 구간을 정밀 발굴조사하여 학술 및 복원·정비의 기초자료를 얻어서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발굴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풍납토성 동벽 발굴조사 당시 현장설명회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조사는 발굴 당시 남아있던 풍납토성 가운데 이미 복원된 북동벽의 남쪽 끝에서 아직 토지 매입이 이루어지지 못한 동남벽의 북쪽 끝까지 총 길이 700미터에 달하는 풍납토성 동벽에 대하여 실시되었다.

 

이번 발굴조사는 풍납토성 성벽에 대한 최초의 조사로, 우리나라 고대 축성기법의 효시가 될만한 다양한 축조기법들이 발견되었다.

 

풍납토성 동벽 내벽 토루土壘(흙을 다져 쌓은 시설물)의 목재 및 부엽층 세부상태(사진 출처-출처자료1)

 

더구나 성벽 규모는 폭 43미터, 높이 11미터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없어져 버린 서쪽 벽까지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3.5킬로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돼 현재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성임은 물론 출토유물과 절대연대 측정 결과로 미루어 늦어도 서기 3세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어 시기적으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고 발굴단은 보았다.

 

발굴단은 이번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의 실체를 새로이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성벽의 총 둘레가 3.5킬로미터라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런 대규모 성벽을 축조했던 세력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당시 인구 규모,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고려할 때 풍납토성이야말로 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으며, 고대국가로서의 백제 형성 시기를 한걸음 앞당길 수 있는 획기적인 유적이라 평가하였다.

 

이처럼 이번 발굴조사는 발굴단의 표현처럼 풍납토성 성벽에 대한 최초의 조사라는 의미도 매우 크지만, 한편으로 순수한 학술발굴이라는 또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1990년대 중반 이후 풍납토성의 발굴조사가 재건축 사업을 위한, 새로운 아파트 건설을 위한 구제발굴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조사는 그런 목적이 없는, 풍납토성의 학술적 연구성과를 위한 발굴이었다는 점에서 국가와 국민들의 문화유적에 대한 시각 전환을 보여주는 발굴조사였다 평가할 수 있다.

 

이후 1999년에는 풍납토성 안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받는 경당지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한신대박물관이 아파트 건설과 관련하여 실시한 구제발굴로, 보고서에 보이는 '경당慶堂'은 이곳에 있었던 연립주택 이름이다.

그래서 보고서에서는 경당지구라 했는데, 정확히는 경당연립 재건축지구 발굴조사다.

 

발굴지역은 약 1천 여평으로 전체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 반을 A 구역, 남쪽 반을 B 구역이라 했다.

경당지구 9호 유구는 A 구역의 북쪽이다.

발굴 초기에 확인되었으며, 큰 규모에 출토유물 또한 많아 마지막까지 발굴조사가 계속되었다.

2000년 5월 경당지구 9호 유구에 대한 조사가 끝난 다음 B 지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려는 순간 유적 훼손 행위가 일어나 조사가 중지됨으로써 미완으로 끝났다.

 

발굴된 주요 유구로는 주거지가 대략 20여 기, 폐기장, 저장고, 도랑(구溝) 3기가 확인되었다.

제사 관련 유구도 확인되었고, 경당지구 44호 유구는 '특수건물지'라 이름 붙였다.

치밀한 설계와 많은 공력이 들어간 대형 구조물이란 점에서 특수 공공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제사 의식 즉 제의祭儀와 관련된 시설로 추측하였다.

 

제사 관련 구덩이 즉 제사갱祭祀坑도 확인되었고, 9호 유구는 긴축이 13.5미터, 짧은 축이 5.2미터, 최대 길이 2.4미터의 긴 타원형 땅 구덩이(수혈竪穴)로서 지금까지 풍납토성 안에서 조사된 단일 유구로는 44호 유구와 함께 최대 규모이다.

9호 유구는 제사 의례 진행 도중이나 끝난 다음 제물 및 제수품과 제기를 버렸던 곳으로 보인다.

경당지구 9호 유구 위층인 31호 유구와 가운데 층인 101호 유구도 같은 성격으로 보았다.

더불어 저수시설도 확인되었는데, 남북 12미터, 동서 10미터 이상, 깊이 3미터 정도의 유구로서 경당지구 206호로 이름 지었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하지 못했다.

그밖에 독무덤(옹관묘甕棺墓)과 토기 제작 관련 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경당지구와 관련된 발굴보고서가 7권이나 발간되었다는 사실은 경당지구가 풍납토성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방대한 조사 내용과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각 보고서들은 각각의 유구와 유물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9호 유구(사진 출처-출처자료1)

 

경당지구 발굴조사 내용을 보고서 발간 순서대로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9호 유구.

비록 1기에 불과하지만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규명하는 데에 필요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판단하여 출토유물 전량에 대한 설명을 보고서에 담았다.

토기만 해도 무려 2천 여점에 달한다.

 

경당지구 9호 유구의 출토유물로는 많은 종류의 동물뼈, 작은 고급 제사토기, 때려 부순 흔적이 있는 굽다리접시(고배高杯: 높은 굽을 붙인 접시]와 세발그릇(삼족기三足器: 발이 세 개 달린 그릇), 말 모양 토우[마형토우馬形土偶: 흙으로 만든 말 상]를 비롯한 토제품土製品, 운모 광물과 매실 씨, 생선뼈 등이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大夫'란 글자가 새겨진 곧은입항아리(위)와 '井'이 새겨진 곧은입항아리(아래)(사진 출처-출처자료1)

 

특히 '대부大夫'와 '정井'(또는 부호 '#')이란 글자가 새겨진 곧은입항아리(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의 존재는 이 유구의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라 하였다(이 밖에도 '도道', 'X', 'D', '11' 등 판단하기 어려운 부호 등 23종류 글자나 부호가 새겨진 토기들이 발굴되었으며, 이 가운데 'X' 부호가 새겨진 토기가 16개로 대부분을 차지).

 

대부분 말뼈로 보이는 10마리 분의 동물 머리뼈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말을 잡아 상에 올리는 제의가 진행된 것으로 발굴자는 보았다.

한편 인위적으로 때려 부순 흔적이 있는 제기(굽다리접시나 세발그릇 등)는 백제는 물론 신라와 가야 고분 부장품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동물뼈처럼 제의祭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발굴보고서에서는 경당지구 9호 유구와 출토유물이 모두 제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9호 유구는 경당지구 최상층에 위치하여 한성백제 마지막 시기에 해당되며, 그 성격은 종교적 제의와 간련된 제사 구덩이(제사갱)인 폐기장이라는 것이다.

 

경당지구 발굴보고서에는 다른 보고서와는 달리 보고서 앞부분에 '경당지구 발굴조사와 보존을 둘러싼 논란의 전말'이란 목차가 있다.

이는 이 발굴조사가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예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유물 출현, 조사 중에 불붙은 백제 초기 왕성王城 논쟁, 시공사의 부도와 조사 지연으로 인한 재건축조합원의 집단민원 발생, 유적 훼손행위와 대통령의 관심 표명 등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발굴기관인 한신대박물관은 보고서에 일정별로, 시간대별로 그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2000년 5월 13일 토요일, 발굴 현장을 굴삭기로 파헤친 전대미문의 사건이 경당지구에 일어났다.

언론사의 대대적인 보도로 이 사건은 일파만파 커져갔고, 당시 대통령이 직접 대책 마련을 지시할 정도로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국민들의 관심 속에 묻혀 있던 풍납토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풍납토성 안에서 고층 아파트 건축과 이로 인한 유적 훼손 행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또한 2003년부터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체가 되어 장기 발굴조사계획이 수립되어 2016년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발굴이 추진중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면 재개발조합원의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가 결과적으로 풍납토성을 국민들의 관심 유적으로 살려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전화위복이란 말은 이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물론 풍납토성은 한국사에서 고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가치 있는 유적으로 그 사건이 아니라도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유적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발굴, 보존되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근사한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있던 풍납동 주민들의 소박한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풍납토성의 성벽만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성 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국가의 무책임이 2000년에 그대로 풍납동 주민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파괴되느냐, 보존하느냐, 그리고 개발하느냐....

유적도 사람처럼 타고난 운명이 있나보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101호 유구(사진 출처-출처자료1)

 

풍납토성 경당지구 101호 유구에서 출토된 오수전과 여러 종류의 동물뼈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다음은 경당지구 101호 유구이다.

이 유구에서는 경당지구에서 발굴조사된 220여 기의 유구 중 앞서 살펴본 9호 유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전체적인 유구 형태는 평면 마름모에 가깝지만 모양이 일정한 것은 아니다.

바닥면은 평탄하지 않고 요철 면을 이루는 구덩이다.

발굴단은 그 기능과 성격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폐기장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 종류가 압도적이며, 약간의 기와와 벽돌, 중국 도자기, 동전 오수전五銖錢[서기전 118년 고대 중국의 전한 때처음 만들어져 621년 당나라 때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기간에 걸쳐 유통된 화폐], 동물뼈 등이었다.

 

 

풍납토성 폐기장 127호 유구 모습(위)과 폐기장 31호 유구 모습(아래)(사진 출처-출처자료1)

 

다음은 위층 폐기장 유구를 살펴보자.

발굴보고서에서 발굴단이 이름 붙인 1~8호 유구, 10~16호 유구, 19~23호 유구, 31~34호 유구, 41·43·45·47·50·53·54·58·27호 유구 등 모두 33개의 폐기장 유구를 설명하고 있다.

유구별 구체적인 구조와 성격, 기능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폐기 행위가 이루어진 흔적이라는 점 때문에 하나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개별 유구에 대한 조사 결과 내용은 분량이 많아 일일이 살펴보기는 힘들므로 전체 성격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자.

 

이들 유구는 모두 옛 지표면을 파고 그 내부에 토기 등의 유물이 퇴적되어 있는 구덩이 유구(수혈유구)이다.

평면 형태도 원형, 타원형,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 부정형不定形[일정하지 않은 모양] 등으로 다양하며, 발굴단은 내부의 퇴적 상태나 출토유물을 기준으로 크게 A, B, C, D의 4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발굴단은 경당지구 위층 폐기장들은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C와 D형 유구들은 단순한 폐기 행위라기보다는 제의와 연관된 폐기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반면 A와 B형 유구들은 폐기가 아닌 제의용 및 저장고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밖에 보고서에는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리구슬 종류 11점과 돌구슬 6점의 성분을 분석하고 이들과 함께 출토된 구슬 제작용으로 보이는 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구슬이 수입된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구슬 제작 틀에 붙어 있던 청녹색 물질을 통해 이 시기 한반도 유적 중 처음으로 확인된 유리 제작의 증거이며, 한반도에서의 유리 원자재 제작의 가장 이른 증거라는 의견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와전瓦塼[기와와 벽돌] 종류에 대해서는 보고서로 정리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유구에서 출토된 것이 아닌 유물포함층에서 나온 와전에 대한 대한 내용으로서 총 511점을 소개하고 있다.

수키와가 154점(30.1%), 암키와 334점(65.3%), 와당 1점(0.2%), 벽돌 22점(4.3%)의 분포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기와들이 유구에서 분리된 채 토층에서 출토된 이유에 대해서 발굴단은 첫째, 강변에 입지하여 한강 범람으로 앞선 시기의 선행 유구가 노출되면서 내부 유물들이 이동하는 경우가 잦았을 것이고, 둘째, 사용 후 폐기된 기와 중 일부는 당시 옛 지표면에 노출되는 경우가 잦았을 것이며, 셋째, 한정된 공간에서 장기간에 걸쳐 토지의 점유와 사용이 이어지면서 당대인들에 의한 선행 유구의 파괴 행위, 선행 시기 유물의 재활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풍납토성 경당지구에 들어선 지금의 경당공원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마지막으로 경당지구 유물포함층 출토유물에 대한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겠다.

발굴기관인 한신대박물관은 유구에서 발견되지 않은 와전 종류에 대한 소개에 이어 이 보고서에서는 유구에서 발견되지 않은 다른 유물, 그중 토기를 중심으로 한 토土제품, 금속기, 석기石器에 대해 보고하였다.

 

발굴단은 와전 종류의 소개 이유처럼 유적의 중요성에 비추어 관련 정보를 학계에 공개할 필요성 때문이라 하고, 역설적이지만 유물포함층에서 출토된 유물이 이 유적의 전체적인 유물 양상을 보여주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여기 소개되는 유물은 총 1,239점으로 토기가 1,082점, 철기 50점, 석기 19점, 기타 88점이다.

 

이 유물 중 다수가 토기로서 열국시대(원삼국기)부터 한성 2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망라하고 있다.

그중에는 일반적인 한성백제 유물도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과 관련된 것, 또는 가야나 고구려와 관련된 유물도 상당수 있다.

따라서 발굴단은 이번에 소개되는 자료만으로도 한성시대 토기 변화 양상은 물론 당대 국제교류의 양상도 그려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2000년 당시 외환은행직원합숙소 부지 모습(위)과 지금의 서울창의마을 모습(아래)(사진 출처-출처자료1)

 

풍납동 281-1번지 일대는 외환은행 직원합숙소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1999년 외환은행 직장주택조합에서 회사측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여 아파트 재건축을 계획했던 곳이다.

그러나 당시 경당지구에서의 조사 결과 중요한 유구가 발견되면서 풍납동 내부에 대한 보존 여론이 강하게 대두되어 이 지역에 대한 발굴허가는 보류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재건축조합 인가가 완료되어 주민들이 강력하게 요구하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하여금 시굴조사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후 발굴 내용을 살펴볼 미래마을 재건축부지의 경우도 같은 사례였다.

이 두 건의 재건축부지에 대한 발굴허가 이후 풍납동 일대에서의 대규모 발굴허가는 없었다.

사실상 풍납동 지역에서의 마지막 대형 발굴조사라 할 수 있다.

 

이에 2000년 6월 29일부터 8월 5일까지 이 지역 16,733평방미터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방향도 지금까지와는 달라졌다.

풍납토성 내부 전체를 보존한다는 원칙 아래 최소한의 시굴조사를 통해 유물포함층이나 유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그 결과를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하여 보존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조사는 기존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건물과 건물 사이의 일부 공터와 테니스장 등의 공터에 한해 이루어졌다.

시굴조사의 특성상 백제시대의 생활면이나 유물포함층이 확인될 경우 더 이상 터파기를 하지 않고 일단 조사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다.

이처럼 유물포함층의 두께를 확인하기 위한 탐색 피트 pit(소규모 공간) 조사만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성격이 분명한 유구가 많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전에 발굴허가가 보류되었고, 이후 다시 발굴을 실시한 이번 조사 결과 이 지역에는 새로운 아파트가 건축되었을까?

아파트 신축은 불허되었다.

대신 이 자리에 2004년 서울시가 조성한 서울영어마을이 들어섰다가 2017년 서울창의마을로 이름을 변경하여 다양한 인성체험교육을 실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발이 제한되는 경우 발굴조사된 지역이나 장소는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쉬운 문제도 아니고, 정답이 있지도 않지만, 그 역 주민에게 어떤 식으로든 무형의 혜택을 주거나 공공 이익을 위한 공간 조성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서울시는 200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영어체험캠프 조성으로 풍납동 주민에게 혜택을 주고자 한듯하다.

 

 

미래마을 부지에 들어선 지금의 풍납백제문화공원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미래마을 부지도 방금 살펴본 외환은행 직장주택조합의 경우처럼 지역 주민들이 미래마을재건축조합을 결성하여 사업 추진 중 발굴허가가 보류되었다가 나중에 외환은행 직장주택조합과 함께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시굴조사가 실시된 경우다.

발굴 기간은 2000년 8월 10일부터 9월 18일까지였다.

 

발굴지역인 풍납동 197번지는 풍납토성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역이긴 하지만, 발굴 당시 토성이 유실되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서쪽 성벽 중앙부 바로 안쪽에 인접한 지역으로 추측된다.

동서로 긴축의 사다리꼴 형태를 띠고 있는 부지 면적은 20,955평방미터이며, 경당지구에서 남서쪽으로 약 8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대상지역에는 재건축 예정부지 외곽도로를 따라 고층 상가 건물 등과 그 안쪽에 단독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주택과 주택 사이 도로를 경계로 6개의 블록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블록은 주민 이주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건물과 주택이 그대로 있어 조사가 불가능했고, 나머지 구역도 조사 당시 약 70퍼센트 정도만이 철거가 완료된 상태였다.

 

이번 조사의 목적이 백제시대 유물포함층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제시대 생활면 또는 유물포함층이 확인될 경우 더 이상 터파기는 하지 않고 그 선에서 시굴조사를 일단 정리하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다.

조사 결과 각 트렌치에서는 백제시대 유물포함층이 대부분 확인되었고, 토기 파편과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 결과에 따라 미래마을 부지는 2001년 4월 28일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었고 부지는 매입되어 보존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2003년 이후 추진되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신희권, '풍납토성 출토 문자와 부호 탐론', 한국고대사탐구 제15권 한국고대사탐구학회 5-34쪽,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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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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