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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 발굴을 위한 발굴과 그 특징

새샘 2022. 5. 6. 13:44

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 양상

 

2000년부터는 풍납토성의 훼손 등과 관련하여 발굴조사에 대한 내용이 더욱 엄격해졌으며, 2010년 이후에는 서울시의 '4대문 안 문화유적 보존방안' 지침이 마련되어 종로구와 중구 등 서울의 4대문 안에서는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전보다 발굴조사가 왕성해졌다.

이런 여건의 변화 때문에 작은 규모의 발굴이 전체적으로 많아졌다.

 

먼저, 주요 발굴 내용을 보면 2001년부터 한양도성에 대한 발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정하게 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초기의 복원을 위한 발굴에서 최근에는 학술 성격이 강한 조사 방향으로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서울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조선 왕릉에 대한 발굴도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하여 200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 궁궐에 대한 발굴은 2000년 이후에도 추진되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창덕궁과 경복궁뿐만 아니라 덕수궁에 대한 발굴도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경복궁과 덕수궁에 대한 발굴은 지금도 추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복원을 위한 발굴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발굴이 이루어진 이후 30년만에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도 시작되었고,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 역시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두 유적 모두 학술발굴로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의 대표적인 고대 유적임을 생각한다면 이후에도 조사는 계속될 것이다.

이밖에 서울에서 유일한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 일대 보루에 대한 조사도 1990년대 이후 계속되고 있고, 아차산성도 복원과 종합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가 2000년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도심 구역에서는 청계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2005년 복원 후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경관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서울시의 사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발굴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음은 각 자치구별 발굴 내용이다.

종로구와 중구 지역은 '4대문 안 문화유적 보존방안' 지침에 따라 그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전반적으로 조선시대 유적들이 확인되며, 예전 시장인 육의전 터나 서울시청 자리의 군기시 터가 대표적이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인식은 아마도 조선시대하면 궁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도심 지역 발굴로 조선시대 시장, 다리, 관청 건물 등 생활유적이 확인되면서 시민들의 조선시대 인식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은 발굴 없이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들은 2000년 이후 주로 주택재개발구역 부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적극적인 발굴은 적은 편이다.

발굴조사 내용 가운데 강남구 세곡동 일대에서 고려시대 건물 터, 서초구 원지동에서 원院 터, 잠원동에서 고려시대 밭 유구가 확인된 것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서울 지역 고려시대 역사를 채우는 좋은 자료이다.

 

강동구 지역에서는 암사동에서 1960년대 명일동 주거지가 확인된 후 발굴되어 보고된 적이 없는 청동기시대 집터가 확인되었고, 강북구 수유동과 우이동에서는 조선시대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강서구 지역에서는 외발산동에서 구석기 유물층과 신석기시대 유구가 확인되었고, 가양동 궁산에 위치한 양천고성에 대한 학술발굴이 있었다.

특히 양천고성은 이전부터 백제 산성으로 알려진 곳이라 발굴결과가 기대되었다.

그러나 백제 유적지는 확인하지 못했고, 시기적으로 고대에 해당된다는 것만 확인하였다.

앞으로 보다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도봉구 지역에서는 도봉서원 터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여 전부는 아니지만 도봉서원 건물들의 구조 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서원 터 아래층에서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절터가 확인되어 조사지역의 성격이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앞으로 조사지역이 어떤 식을 정비 될 지 흥미롭다.

 

성동구 지역에서는 살곶이다리와 행당동 구역 도시개발 부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특히 행당동에서 일제강점기의 쓰레기 매립층이 확인되었는데, 이른바 '쓰레기 고고학'이 적용된 유적인 것이다.

 

송파구 지역에서는 장지동의 대규모 택지개발사업 부지와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장지동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석촌동 고분군은 30년만에 다시 발굴이 실시되어 새로운 발굴 성과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석촌동 고분군뿐만 아니라 방이동 고분에 대한 발굴도 2017년에 추진될 예정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은평구 지역에서는 은평뉴타운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와 삼천사 터와 진관사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은평뉴타운은 대규모 조선시대 분묘군이 확인되었고, 두 절터의 조사는 고려시대 절터의 발굴조사라는 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밖에 관악구 지역에서는 사당동 요지에 대한 발굴, 광진구 지역에서는 광장동에서 고려시대 건물터 확인, 구로구 지역에서는 궁동, 천왕동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노원구 지역에서는 상계동의 내관(내시) 묘로 유명한 초안산 분묘군 정비를 위한 발굴 등이, 서대문구 지역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2000년 이후 발굴건수의 증가로 하나하나 발굴조사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는 실질적으로 어렵다.

2000년 이전과는 달리 중요한 몇몇 유적들을 제외하고는 발굴 결과 중심으로 주마간산走馬看山[말을 타고 달리며 산천을 구경한다는 뜻으로, 자세히 살피지 않고 대충대충 보고 지나감] 식으로 간략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사가 이루어진 발굴에 대해서는 문화재청과 서울시 관련자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내용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발굴보고서를 구하지 못했거나, 경우에 따라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먼저 주요 발굴 유적들을 살펴보고, 이어 각 자치구별로 지역을 나누어 실시된 발굴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켜켜이 쌓여있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엿보다

 

2000년부터 서울 지역의 발굴건수는 이전 시기보다 많이 증가한다.

발굴지역 범위도 많이 넓어졌고, 발굴결과에 대한 내용도 자세히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처럼 2000년부터는 그 목적이 구제발굴이든, 순수한 학술발굴이든 발굴건수와 내요이 증가하고 다양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2000년 이후는 '발굴의 홍수시대'라 할만하다.

 

이는 국가의 발굴조사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지침이 작용했을 것이고, 서울시와 시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 향상도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2017년 이후에도 서울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2000년 이후의 발굴 양상에서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조선시대 생활유적의 발견이다.

이는 2000년 이후 서울시의 4대문 안 문화유적 보존방안이라는 정책의 결과다.

종로구와 중구, 서대문구 등 4대문 안 중요 지역이거나 중요 유적 주변 지역의 경우 사업 시행이나 건축 행위시 의무적으로 매장문화재에 대한 시굴 및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소규모 발굴 행위는 상당히 증가하였다.

 

발굴이 많아지면서 당연히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었는데, 4대문 안의 조선시대 중심지역에 대한 발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선시대 관련 유구와 유물 등이 속속 확인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종로통 시장인 육의전의 상가 건물 터, 현재 서울시청 자리에서는 관청인 군기시 터, 그리고 일반 집터 등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이런 발굴 결과는 문헌에서만 확인되던 4대문 안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구조, 활동 구역, 그리고 일상생활의 생활용품 등에 대한 다양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했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들은 조선시대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궁궐이다.

즉 서울 지역에서 조선시대하면 궁궐이 대표적인 유적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서울을 대표하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 오면 가장 많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 생활유적 발굴 결과는 시민들의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유적에 대한 지식과 인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궁궐로 대표되는 왕실 유적만이 아니라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공간에 대한 발굴 자료를 통해 시민들의 관심분야가 보다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자양분이 되었으면 한다.

아직도 서울 도심지역에서는 계속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으로 한양도성에 대한 본격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는 점도 2000년 이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양도성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고의적인 훼손과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멸실되었다.

물론 1961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 이후 한양도성의 보수공사는 시작되었지만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양도성 관련 발굴조사는 1990년 러시아대사관 신축 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보존 및 정비 또는 체계적인 관리를 위한 목적이었다.

 

한양도성의 발굴 양상에 변화를 보인 것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준비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등재를 위해 단순한 보수와 관리가 아닌 체계적 발굴조사와 문헌을 통한 학술연구도 함께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가 오히려 더 풍부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복원도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지금은 많은 시민들이 찾는 대표적인 서울의 문화유적이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학술연구 등을 통해 전근대 도성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또 다른 2000년 이후의 발굴 특징으로는 각 자치구에서 고려시대 유구들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2천년의 서울 역사[시작은 한성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은 서기전 18년]에서 고려시대의 서울은 세 곳의 별경別京[평양인 서경西京, 경주인 동경東京, 서울인 남경南京] 중 하나인 남경이 되었지만, 그 자료가 빈약하여 서울의 역사에서 공백기로 인식된다.

아마도 서울 시민들은 서울과 고려시대를 연관짓는 단어를 쉽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부 지역에서 고려시대 관련 유구들이 간간히 확인되어 흥미롭다.

강남구 세곡동에서 고려시대 건물 터, 서초구 원지동에서 원院[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던 곳] 터, 잠원동에서 밭 유구, 종로구 신문로(도로명 새문안로)에서 기와가마 터, 강동구 암사동에서 건물 터와 집터, 도봉구 도봉동 도봉서원 터에서 고려시대 절터 등이 확인되었다.

유구나 유물의 양이 많다거나 체계적인 양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전까지 전혀 확인되지 않던 고려시대 유구 조사의 결과로 서울의 2천년 역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사 자료로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

 

2017년 현재도 서울 지역에서 많은 발굴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쪼록 사업만을 위한 발굴, 복원만을 위한 발굴이 아닌 문화유적의 보존을 위한 발굴이 착실하고 성실하게 진행되길 바란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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