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9: 히브리 유일신교의 발전, 2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9: 히브리 유일신교의 발전, 2장 결론
새샘 2022. 4. 30. 17:03
철기시대 근동에서 발생한 모든 문화 발전 가운데 유일신교―창조주이자 만유의 지배자인 하나의 신에 대한 믿음―만큼 서양문명에서 큰 비중을 갖는 것은 없다.
그 공로는 전통적으로 히브리인 Hebrew에게 돌려졌고 그것은 정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히브리인들이 항상 유일신교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야휘스트 Yahwist로 불리는 야훼(여호와) Yahweh에 대한 배타적 숭배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시끄럽고 독단적이기는 했지만 히브리 사회의 소수파였다.
히브리인이 궁극적으로 야훼를 우주의 유일한 신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배타적 종교관을 가진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은 히브리 사회가 형성되기까지의 거칠고 혼란스러웠던 환경을 염두에 둘 때에만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
○일신 숭배에서 유일신교로
히브리 유일신교의 등장은 다신교 풍토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배타적인 야훼 숭배를 옹호한 후대 사람들에게 초기 히브리 역사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서기전 12세기에서 10세기까지 히브리인은 야훼 이외의 신들, 특히 이웃 가나안인 Canaanite의 신들을 숭배했다.
야훼 스스로도 자기 백성에게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암암리에 그의 백성이 숭배하던 다른 신들이 실재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판관기」에서 야훼는 모압인 Moabite의 신 케모시 Chemosh[구약성서에 그모스로 표기]와 대등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자젤 Azazel[유대인 전설에 등장하는 마귀나 악령] 같은 히브리 자연신이나 통속적인 가나안 신 엘 El[셈어로 '신'이란 뜻이며, 고대 서부 셈족의 주요 신]에서는 더욱 오래된 다신교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솔로몬 Solomon은 예루살렘 성전에 바알 Baal[고대 서부 셈족의 최고신]의 상징물과 아세라 Asherah[바알의 아내인 고대 서부 셈족의 여신]를 위한 제단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배타적 야훼 숭배를 옹호한 종교적 순수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후대 히브리 왕들은 비非야휘스트적 종교 관행을 지속했다.
다신교 관행이 그 뒤로도 지속되기는 했지만, 서기전 10세기 즉 1천년기가 시작할 무렵 히브리 종교는 민족적 일신 숭배―하나의 신에 대한 배타적 숭배를 하되 다른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인하는 것은 아님―의 새로운 단계로 확실히 옮겨갔다.
이런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모세 Moses는 종종 야훼 숭배의 우월성을 처음 강조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본격적인 야훼 숭배는 훗날 레위인 Levite―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독특한 주장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종교 엘리트가 된 지파―의 후원 덕분이었다.
야훼 숭배의 제의祭儀[제사의 의식]적 요소와 예언자적 요소를 모두 옹호한 레위인은 히브리 사회와 가나안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숭배하되던 다른 신들보다 야훼를 우위에 놓고 찬양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과 위신을 드높이려 하였다.
레위인은 다른 히브리인에 비해 높은 수준의 문자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 사회의 전통과 의식을 형성하는 수단으로서 문자의 힘은 대단한 것이며,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한층 두드러졌다.
고대 세계에서 문자는 일종의 마술적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텍스트의 권위는 문자 그대로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의 종교적·정치적 주권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이 가해지던 시절에 레위인의 문자 해독능력은 야훼 숭배의 유지 및 장려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다윗 David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야훼 숭배를 장려하고 이를 예루살렘에 집중시킴으로써 히브리인의 정치적·종교적 정체성을 우주 최고신(유일신은 아니지만) 인 야훼 숭배와 연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는 이어졌다.
가나안의 다산 숭배는 서기전 8세기와 7세기에 인기가 높아졌는데, 그것은 야휘스트들이 요구한 엄격한 도덕성에 대한 반동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 Jeremiah 시대(서기전 650년경~570년경)에 이르기까지 히브리 종교가들은 계속해서 이방 종교를 매도하고 야훼의 백성이 야훼의 믿음을 지키지 않을 경우 나타나게 될 파멸적 결과를 경고했다.
그러나 다른 신들보다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전 8세기와 7세기의 야훼는 야휘스트들이 보기에도 얼마가 제약이 있는 신으로 비쳐졌다.
야훼는 육체를 입고 있으며 때로 변덕스럽고 성을 잘 내는 존재로 여겨졌다.
야훼는 전능하지도 않았다.
그의 권능은 히브리인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에 국한되었다.
이런 다신교적 잔재에도 불구하고 서기전 8세기 중반 서양 종교사상에 대한 히브리인의 가장 중대한 공헌이 이루어졌다.
그 하나가 독특한 초월 신학이었다.
야훼는 자연의 일부가 아닌 전적으로 자연 밖의 존재였다.
그러므로 야훼는 순수한 지적 또는 추상적 견지에서, 그리고 그가 창조한 자연계의 운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존재로 이해될 수 있었다.
초월적 신의 원리를 보완하기 위해 야훼는 거룩한 명령에 의해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지명했다.
「창세기」의 유명한 구절에서 야훼는 아담과 이브에게 명령을 내린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이 구절은 "그렇게 하여 신들은 평안하게 될지니"라며 인간이 단지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한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끝으로, 완전히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히브리 종교사상은 보편적인 윤리 가치를 담고 있었다.
바빌로니아 홍수 설화에서 성미 까다로운 한 신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잠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결심했다.
그와 반대로「창세기」에서 야훼는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응답으로 홍수를 내리지만 '노아 Noah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했다.
일신 숭배 시기에 히브리인은 도덕적 가르침, 제의, 금기 등을 준수함으로써 야훼를 숭배했다.
엄밀한 형태의 십계명[서기전 7세기 이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 내용은「출애굽기」20장 3~17절에 기록]은 바빌론 포수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히브리인은 살인, 간음, 거짓 증언, 이웃 물건 탐하기 등을 금지한 계명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일곱 번째 날의 노동 금지와 새끼를 어미젖에 삶지 말 것 등의 종교 규범을 지켰다.
그러나 야훼가 히브리 공동체에 요구한 도덕 기준은 히브리인이 이방인을 상대할 경우에도 반드시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은 히브리인 사이에는 용납되지 않았으나 히브리인과 비히브리인 사이에는 허용되었다.
이런 구별은 전투에서의 민간인 살해와 같은 문제에도 적용되었다.
히브리인이 가나안 영토를 정복했을 때 "이 성들에서 탈취한 노략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차지했고, 사람들만 칼로 쳐서 모두 죽이고, 숨 쉬는 사람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수아기」)".
솔로몬이 죽은 뒤 히브리 왕국 분열과 더불어 야훼 숭배에 중대한 지역적 차이가 나타났다.
북왕국 지배자들은 주민의 예루살렘 종교 행사 참여를 제지했고, 이 때문에 성경 전통을 발달시킨 예루살렘 야휘스트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히브리인의 분열과 정체성 상실은 아시리아 Assyria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아시리아는 사르곤 2세 Sargon II 치세에 북왕국을 속주로 흡수하고 2만 8천 명에 달하는 히브리인―저 유명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지파'―을 아시리아 제국 영토 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남왕국 유다는 살아남았지만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아시리아와의 정치적 합병은 아시리아 신 아슈르 Ashur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시리아의 위협은 도리어 야휘스트 예언자들로 하여금 일신 숭배가 아닌 배타적 유일신교를 강력하게 요구하도록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예언자들은 종교적인 만큼이나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아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저항이 부질없는 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
히브리인이 한 민족으로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 차별화되는 야훼 숭배를 강화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서기전 8세기와 7세기에 예언자들이 했던 주장, 즉 야훼만이 숭배 받아야 하며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시리아의 적극적인 아슈르 신 옹호정책에 대한 공격적 반응이었다.
야휘스트의 철저하고 배타적인 유일신교 주장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히브리인은 오직 야훼 숭배에 의해서만 아시리아의 종교적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오늘날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이란 뜻인 '예언자'의 원래 의미는 '설교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신적인 영감에서 비롯된 절박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최초의 히브리 예언자는 아모스 Amos와 호세아 Hosea였다.
그들은 서기전 722년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하기 전 북왕국을 상대로 설교했다.
이사야 Isaiah와 예레미야 Jeremiah는 서기전 586년 유다가 멸망하기 전 남왕국에서 예언 활동을 했다.
에스겔 Ezekiel과 제2 이사야 Second Isaiah(「이사야서」는 두 명 또는 아마도 세 명의 저자에 의해 집필되었다)는 바빌론 포수 기간에 '바빌론 강가'에서 예언 활동을 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일부 강조점에 차이가 있지만 일관된 종교사상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좋은 정도로 매우 흡사하다.
다음 세 가지 신조가 예언자들의 핵심 가르침이다.
① 예언자들은 절대적 유일신교를 가르쳤다. 야훼는 우주의 지배자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히브리인 아닌 다른 민족을 이용하기도 한다. 다른 민족의 신은 거짓 신이다.
②야훼는 오직 정의의 신이다. 그는 오로지 선을 의도하며, 세상의 악은 그에게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온다.
③야훼는 의롭기 때문에 그의 민족 히브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윤리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는 의식과 희생보다는 정의를 추구하고,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고, 고아들을 보호하며, 과부들을 변론하는 것을 좋아한다.
서기전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는 '예언 혁명'을 대표했으며, 오늘날까지 반향이 울려 퍼지는 야훼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선포함으로써 인류 문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聖會[신성한 종교 집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燔祭物[구약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통째로 태워 바치던 동물. 또는 그런 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갖다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和睦祭[평화제: 구약 시대에, 하나님에게 동물 제물을 바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려고 행하던 제사]로 바치는 살진[살이 많고 튼실한]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公義[공평하고 의로운 도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서」, 5:21~24)."
○유대교의 형성
야휘스트들은 야훼 유일신교야말로 히브리인의 민족정체성의 토대라고 주장함으로써, 아시리아 지배 아래에서도 히브리인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서기전 7세기 말 아시리아의 위협이 사라지자 야휘스트는 종교적·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유다 Judah의 새로운 왕 요시아 Josiah(재위 서기전 621~609)는 확고한 유일신론자로서 예레미야 등 예언자들을 그의 궁정에 불러들였다.
아시리아 세력이 무너지자, 요시아는 자신이 종교적 관행을 정화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세 율법을 다시 쓰고 수정하는 일, 거룩한 예배 장소에서 부패 사제와 이방 풍속을 추방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신명기」가 발견되고 그것이 모세가 쓴 책으로 크게 환영받은 것은 바로 이시기였다.
「신명기」가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단호하게 유일신교를 천명한 책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것은 요시아가 추구한 종교·정치 계획에 모세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요시야 치세이거나 그 직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야휘스트들에게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요시아는 아시리아 잔류 세력에 대한 이집트 군대의 지원을 막기 위해 파라오에 맞서 싸움을 벌이던 중 메기도 전투 Battle of Megiddo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유일신론자들은 세력을 잃었다.
예레미야는 가택 연금되었고, 공개 발언권을 거부당하다가 마침내 이집트로 이송돼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시종일관 히브리인의 타락을 질타하면서 야훼에 대한 불복종 때문에 과거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했듯이 앞으로 칼데아인 Chaldean에게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요시아 왕이 죽고 한 세대가 지난 뒤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서기전 587~586년 아시리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 휘하의 칼데아인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파괴했으며 수천 명의 히브리인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이 바빌론 포수 Babylonian Captivity는 그곳에 끌려간 히브린이에게 수많은 도전을 안겨주었다.
가장 중대한 도전은 그들의 종교적·윤리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정체성 고수를 주도한 것은 애국적 야휘스트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페르시아 Persia의 키루스 대왕(키루스 2세) Cyrus the Great(Cyrus II)가 바빌론을 함락한 뒤, 고향 땅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바로 야휘스트들이다.
야휘스트들의 예언 전통은 이국땅에서도 지속되었다.
예언자 에스겔은 오직 종교적 순수성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종교적 순수성이란 모든 이방 신을 무시하고 오직 야훼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에스겔은 국가·제국·왕권은 종국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나훔 Nahum과 예레미야 같은 선배 예언자들의 암묵적 의견이었던 인간의 권력과 존재의 덧없음을 명시적으로 말했다.
유배당한 히브리인에게 중요한 것은 창조주 신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 그리고 창조주 신과 그의 선민選民[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택한 민족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를 이르는 말] 사이의 관계였다.
바빌론 포수 기간에 이루어진 종교적 관행과 정치적 정체성의 분리는 기존의 예언 전통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빌론 포수 시대는 보편 종교로서 유대교 Judaism가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사적 역할을 했다.
바빌론에서 유대교는 히브리 민족종교 이상의 것이 되었다.
야훼 숭배는 더 이상 어떤 특정 정치적 실체나 왕조와 결부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기전 586년 이후에는 히브리 국가도 히브리 왕조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훼 숭배는 특정 장소와도 결부되지 않았다.
성전 파괴와 히브리 민족 추방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바빌론과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았다.
고대 세계에서 이것은 유례가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고대 민족 가운데 중심 종교 성지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쫓겨나 있었으면서도 살아남은 경우는 히브리인 이외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의 히브리인에게 성지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고 허락한 서기전 538년 이후 예루살렘을 다시 한 번 히브리 종교의 중심 성지가 되었다.
물론 바빌론에서 돌아온 망명자들과 성지에 남아 포수 기간 변화된 유대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히브리인 사이에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포수 기간 유대교 내부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은 영구히 지속되었다.
이런 갈등과 대립이 나타났다는 것은 바빌론에서 유대교가 얼마나 크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점차 유대교의 종교적 가르침은 윤리적 관점에서도 제시되었다.
거주 지역이나 정치적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류가 창조주에게 져야 할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반면 제의적 요구와 종교적 금기는 유대인만의 배타적 의무로 남았다.
그런 요구와 금기는 야훼와 그의 백성을 묶는 특별한 계약을 상징했는데, 이는 서기전 5세기 말 느헤미야 Nehemiah에 의해 엄격히 강화되었다.
그러나 시간·자연·장소·왕권을 초월해 편재하는 창조주 신에 대한 관념은 제2성전기[예루살렘에 제2성전이 존재했던 기원전 516년에서 서기 70년까지의 시기] 유대교에서 종전보다 한층 더 강력해졌고, 그 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채택되었다.
야훼가 질투하는 신이며 추종자들이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히브리인의 주장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고대 세계의 맥락에서 이 두 가지 요소는 매우 독특한 이념으로서 그 후로도 1,000년 동안 온전히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독특성에서 불구하고 히브리인이 발전시킨 초월적 유일신교는 서양문명의 종교관에서 하나의 근본적 성격이 되었다.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 결론
서기전 1700년부터 서기전 500년까지의 고대 근동은 제국의 시대였다.
서기전 2000년기의 두 강대 세력은 신왕국 이집트 New Kingdom of Egypt와 아나톨리아 Anatolia의 히타이트 Hittite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미노아 크레타 Minoan Crete, 미케네 그리스 Mycenaean Greece, 미탄니 왕국 Mitanni Kingdom, 중왕조 아시리아 Middle Assyrian Empire 등과 같은 보다 작은 규모의 제국도 등장했다.
이 모든 제국은 국제 교역 및 외교의 정교한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되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그들 모두를 결속시킨 국제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모든 제국의 핵심에는 매우 오래된 사회조직 모형인 수메르 Sumer에서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도시국가가 가로놓여 있었다.
신왕국 이집트를 제외하면 어떤 제국도 통일된 영토 국가에 근접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제국은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적인 승인을 주장한 왕들이 통치하는 도시들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서기전 1200년에서 1000년 사이 바다 민족 Sea Peoples이 초래한 참화는 이 국제 체계를 끝장내고 말았다.
이집트 세력의 쇠퇴와 시기적으로 겹친 이 침략을 틈타 근동과 중동에서 페니키아인 Phoenician, 팔레스타인인 Palestinian, 히브리인 Hebrew, 리디아인 Lydian 등 많은 소수 민족이 새롭게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알파벳, 주화, 배타적 유일신교, 상업적 식민지화 등 초기 철기시대의 중요한 문화 및 경제 발전은 상당 부분 이들 군소 국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 지중해 세계의 지배적인 국가들은 여전히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제국들이었으니, 처음에는 아시리아 Assyria, 다음에는 칼데아 Chaldea, 마지막에는 페르시아 Persia였다.
서기전 2천년기 중반 이후로는 극적인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리적 연속성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 철기시대의 제국들은 1,000년 전 근동을 지배했던 반독립적 도시국가들의 집단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 새로운 제국은 초기 제국들에 비해 한층 높은 수준의 통합을 달성했다.
이들은 수도, 중앙 관리 커뮤니케이션 체계, 정밀한 행정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공격적 제국주의를 전능한 신이 부여한 종교적 의무라고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관념 형태觀念形態) ideology[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대미문의 대군을 거느렸고, 청동기시대의 제국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철저한 복종을 신민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능했던 것은 아니다.
아시리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작은 국가들의 연합은 때로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제국들은 크고 강했으며 기존의 어떤 제국보다도 철저한 정치적·종교적 복종을 요구했다.
거대한 제국들이 신들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선택된 도구라고 자처했던 바로 그 시기에 초기 철기시대의 인격적인 유일신교 전통이 등장했다.
모든 고대 종교가 그랬듯이 숭배와 희생은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에서 모두 중요한 종교적 의무였다.
각별히 조로아스터교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었고 페르시아 제국의 정신적 추동력이 되었다.
반면 유대교는 아시리아와 칼데아 왕조 Chaldean Dynasty(신바빌로니아 왕조 Neo-Babylonian Dynasty)의 종교적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투쟁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는 모두 개인의 윤리적 행동을 종교의 근본 요소로서 새롭게 강조했다.
두 종교는 종교적 가르침의 근거가 될 권위 있고 성문화된 경전을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런 발전은 서양 종교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그것을 각자의 제국적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모형으로 삼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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