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1: 그리스의 암흑시대(서기전 1150~800년)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1: 그리스의 암흑시대(서기전 1150~800년)
새샘 2022. 5. 10. 17:59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명 Classical civilizations of Greece and Rome은 서기전 6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다.
두 문명은 고대 근동의 전통과 업적에 크게 의존했지만, 제각기 이전 세계와는 다른 독특한 차별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다 같이 후대에 발달한 모든 서양문명의 못자리(묘판苗板: 볍씨를 뿌리어 모를 기르는 곳)가 되었다.
서기전 8세기에 시작한 그리스 문명은 에게해와 아드리아해 일대에서 성장한 서로 적대적이고 개성적이며 지극히 독립적인 도시국가 polis들이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세계와 근동 세계를 아우르는 공통의 문화로 성립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서기전 356~323)의 정복활동을 통해 그리스에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와 이집트에 이르는 하나의 제국이 창출된 서기전 4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중부 이탈리아 Italy에서는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서서히 확장하고 있었다.
서기전 2세기와 1세기에 로마는 지중해 세계 및 서유럽 전역으로 지배권을 확대했다.
서기 1세기 말에 이르러 로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했다.
조직과 규율, 그리고 비범한 문화 적응력 덕분에 로마 제국 Roman Empire은 그 후로도 400년 동안 유지되었다.
3장 그리스의 실험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고대 세계를 생각하면서 가장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테네 Athens의 아크로폴리스 Acropolis이다.
아련한 빛으로 물든 신전과 사당은 오랜 연륜과 쇠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스 문화의 상징물에 내면화된 합리성, 조화, 평정 등은 서양의 본질—아시리아 Assyria와 페르시아 Persia 같은 동양문화의 미신과 전제에 대한 이성과 자유의 승리—을 나타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비쳐졌다.
그와 같은 안이하고도 아전인수적 비교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근동 문화에 대해 말해준다기보다는 현대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그리스 문명은 미케네 시대 Mycenaean period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웃 근동 지역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아 왔다.
고전기 그리스 문명은 페니키아, 아시리아, 이집트가 없었다면 결코 등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기전 1천년기에 이루어진 그리스 문명의 개화는 서양문명 발달의 분수령이었다.
청동기시대가 붕괴된 뒤 역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한 철기시대의 그리스인은 이웃의 근동 문명과는 현저히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인은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자유, 참여 정부[일반인들도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평면적 계층 구조], 예술 혁신, 과학 탐구, 정치 실험, 인간정신의 창조 능력에 대한 신념 등과 같은 가치를 신봉했다.
물론 모든 인간사가 다 그렇듯 현실은 종종 그들의 이상에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민주주의, 평등, 정의, 자유 등에 대해 오늘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는 그리스인이 받아들였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지만 근대 서양은 집요하고 다투기 좋아하며 원기 왕성한 이 민족이 만들어낸 제도와 신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리스인의 소규모 사회는 문화 혁명을 출발시켰고 기존의 다른 어떤 문명과도 차별화된 득특한 문명을 창조해냈다.
근대 서양의 민주주의는 이런 그리스적 실험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아니, 그 실험이 없었더라면 근대 서양의 민주주의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암흑시대(서기전 1150~800년)
서기전 12세기 말이 되자 미케네 문명 Mycenaean civilization의 마지막 흔적은 사라졌고, 그리스는 기록이 없는 암흑시대 Greek Dark Age로 접어들었다.
그리스 본토는 서기전 1200년 이후 100년 남짓한 기간에 인구의 90퍼센트가 줄었다.
아테네 Athens를 제외한 거대한 성채들은 청동기시대 말기의 대화재로 파괴되었다.
아테네의 인구도 꾸준히 감소했다.
많은 주민들은 남부 그리스 산악지대로 또는 바다 건너 키프로스 섬 Cyprus island과 아나톨리아 Anatolia 해안으로 도망쳤다.
그리스의 역사 전승에 따르면, 주민들의 탈출은 북방 출신의 새로운 그리스인 집단인 도리아인 Dorian이 남하하면서 가속화되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전승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도리아 방언 사용자(스파르타인 Spartan과 코린토스인 Corinthian 등)와 기존의 이오니아 Ionia-아티카 Attica 방언 사용자(아테네인 Athenian, 에게해 Aegean Sea 섬 주민, 아나톨리아 해안 주민 등) 사이의 긴장관계는 그리스 역사의 고전기 Classical period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암흑시대 초기의 인구 감소는 그리스의 사회조직, 경제, 물질문화 등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주거지는 그 규모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적에 취약한 해안지역을 떠나 내륙 지방으로 옮겨졌다.
도자기와 매장 유물은 이 무렵의 그리스가 근동 문명의 중심에서 동떨어진 정체되고 낙후된 세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접한 그리스인 공동체들 사이에도 경제 교류가 거의 없었다.
몇몇 촌락에는 족장이 있었지만, 족장의 주택과 재산은 일반 주민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자급자족적인 가족집단의 정치적·경제적 평등을 기본 유형으로 하는 암흑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그 후 고전기 그리스인의 정치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종교와 의식은 그리스 사회구조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신들을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신들을 필수불가결한 긍정적인 세력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신들은 변덕스러웠고 인간적인 모든 결점을 갖고 있었으며, 초인적인 힘을 휘둘렀고 인간사에 개입하기를 즐겼다.
그리스인이 보기에 신들은 달래고 비위를 맞춰야 할 대상이었으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신적인 개입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정신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성취를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휴브리스 hubris[지나친 자만]의 개념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휴브리스는 신들의 주목을 끌고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었기에, 신들은 그런 기미를 보인 인간을 징벌하기 일쑤였다.
○호메로스와 영웅 전승
서기전 1000년에 이르러 그리스의 고립은 끝이 났다.
그리스 사회는 점점 복잡해졌고, 그리스 본토의 물질적 발전과 번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도자기 또한 정교해졌다.
그리스 상인에게 도자기는 해외 사치품과 교환·거래할 수 있는 값진 상품이었다.
암흑시대 그리스 경제에서 상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부가 늘어나고 사회계층화가 뚜렷해졌다.
소규모 귀족집단이 등장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최고 인간'으로서의 우수한 자질의 반영이라며 정당화했다.
그들은 상업, 약탈, 해적질 등으로 부를 획득했다.
그러나 암흑시대 그리스에서 귀족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부 하나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위대한 인간이란 노래 부르는 자, 행동가, 전투의 승리자여야 했고, 무엇보다 신들의 총애를 받아야 했다.
간단히 말해 위대한 인간이란 영웅이 되는 것이었다.
암흑시대 말기 그리스의 영웅적 이상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서기전 8세기의 시인 호메로스 Homeros(영어 Homer)가 지은 서사시 ≪일리아스 Ilias(일리아드 Iliad)≫와 ≪오디세이아 Odysseia(오디세이 Odyssey)≫에서 비롯되었다.
이 놀라운 서사시—서양문학 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는 서기전 800년 이후에 기록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구전 정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역사가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사료들을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호메로스의 시는 청동기시대 말기 작품이긴 하지만, 몇 백 년에 걸쳐 반복 낭독을 거치면서 시에서 묘사된 정치사회적 맥락은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게끔 변화되었다.
그 결과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표현된 사건들은 청동기시대의 것이지만, 이 서사시가 보여주는 사회는 대체로 암흑시대 말기의 그리스 사회이다.
호메로스는 경쟁과 지위를 최고의 관심사로 여긴 전사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세계를 그리고 있다.
값비싼 선물과 환대를 나누면서 귀족들은 상호간에 우의를 다졌다.
어떤 면에서 귀족들은 그들이 지배한 지역 사회보다 귀족들 상호간에 더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유대감이 그들 사이의 대립과 경쟁을 완화시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 가문들끼리의 경쟁은 트로이 전쟁 Trojan War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종종 폭력으로 치닫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 형태의 영웅 숭배를 창출하기도 했다.
영웅 숭배는 어느 유력 가문이 인근의 장엄한 미케네 무덤을 자기네 무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무덤에 제물을 바치는 등의 의식을 헌신적으로 거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런 헌신은 휘하의 추종자와 하인들에게로 확대되었고, 때로는 공동체 전체가 스스로를 그 지방 영웅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 영웅적 이상은 그리스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호메로스 서사시는 고전기와 그 후에 이르기까지 영웅적 이상을 널리 전파했다.
○ 외국과의 접촉 및 폴리스의 흥기
암흑시대에서 탈출한 그리스 | |
페니키아 알파벳의 채택과 개량 | 서기전 900~800년 |
에게해 전역에서 상선 활동 증가 | 서기전 900~800년 |
그리스 인구의 급격한 증가 | 서기전 900~700년 |
주요 정치 단위로서의 폴리스의 흥기 | 서기전 800년 |
서기전 9세기에 에게해 전역에 걸쳐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리스인 Greek과 페니키아인 Phoenician의 접촉이 강화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이 페니키아 알파벳을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불필요한 자음을 모듬으로 전환하는 등 페니키아 알파벳을 개량했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소용돌이치는 멜로디와 힘은 이제 귀로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도 할 수 있고 읽을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페니키아인은 그리스에 근동의 많은 예술과 문학 전통을 소개했다.
그리스인은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게 혼합하고 수정했다.
페니키아인은 그리스인에게 항해라고 하는 새로운 활동영역을 열어주기도 했다.
서기전 10세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그리스 상인들은 본토에서 페니키아인이 와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그리스인은 페니키아의 설계를 본뜬 상선을 건조해 직접 모험 상인이 되는가 하면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상업 활동이 증가하면서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본토·섬·아나톨리아 사이를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서기전 8세기와 7세기 에게해에서 분출하게 될 식민지 팽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경제와 문화의 발달은 그리스 인구의 극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아테네는 서기전 9세기와 8세기 초 인구가 네 배로 증가했다.
급속한 인구 증가는 농지가 부족한 산악 지형인 그리스의 재원을 고갈시켰다.
작은 촌락인 소읍小邑 town이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읍城邑 castle town으로 성장하면서 본시 대립적이었던 공동체들은 한층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 성읍 주민들 사이에는 일정 수준의 정치·경제·사회적 협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암흑시대 그리스 사회의 영웅적 가치관 때문에 이런 협력은 쉽지 않았다.
각 지방 공동체는 독자적인 전통적 자율성과 독립을 소중히 여겼고, 고유의 종교 의식을 거행했으며, 귀족 지도층을 존경했다.
그렇다면 이들 공동체를 어떤 기반 위에서 통합할 수 있었을까?
이 도전에 대한 그리스인의 해법은 다름아닌 '폴리스(도시국가) polis'였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공식적 및 비공식적 조직의 독특한 혼합체였다.
폴리스에서 정치적 political이란 단어가 파생되기는 했지만 많은 그리스인은 폴리스를 국가라기보다는 사회적 집합체로 생각했다.
고대 역사 자료들에는 아테네인 Athenians, 스파르타인 Spartans, 테베인 Thebans이란 말이 폴리스보다 훨씬 자주 사용되었다.
폴리스 자체를 거론할 때도 그리스인은 폴리스의 모든 주민을 확대된 가족—그것은 다시 부족 tribe, 씨족 clan, 세대 generation 같은 좀 더 작은 규모의 혈연 기반 집단으로 나뉜다—의 구성원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폴리스는 크기와 조직이 서로 크게 달랐다.
그러나 구조상 대부분의 폴리스는 아스티 asty라는 정치사회적 중심지 인근에 조직되었다.
아스티에서는 시장과 중요한 집회가 열렸고, 그곳 노천에서 기본적인 정치 업무가 행해졌다.
도시화된 아스티 주변에는 코라 khora 즉 '땅'이 있었다.
대형 폴리스의 코라는 아스티 말고도 수많은 다른 성읍과 촌락을 부양했다.
위 지도에서 보이는 아티카 반도 Attica Peninsula 전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은 아테네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으며, 그들을 폴리스의 문제에 참여하기 위해 아스티로 가곤 했지만 도시 중심지에 거주하지는 않았다.
초기 폴리스 형성은 인접 공동체들의 시노이키스모스(함께 모여살기) synoikismos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노이키스모스는 정복이나 흡수를 통해 또는 인접 공동체 간의 상호 협력을 통해 등장했다.
무엇이 시노이키스모스의 출현을 가속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 폴리스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방어 가능한 언덕 주변에 형성되었다.
그리스인은 신전 부근에 도심지를 건설하는 근동(특히 페니키아)의 관행을 본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폴리스의 중앙 신전 부지가 항상 도시 성벽 안에 위치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르고스 Argos에서 헤라 Hera 여신에게 봉헌된 거대한 신전은 주거지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이 많은 그리스 도시에서 신전 건축은 폴리스 형성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지배 엘리트들이 폴리스를 찬양하고 자신의 영광을 빛내려고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그리스인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다 그랬지만, 초기 그리스 폴리스의 형성 과정에는 표준 유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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