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3: 상고기 그리스(서기전 800~480년)의 폴리스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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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3: 상고기 그리스(서기전 800~480년)의 폴리스2

새샘 2022. 6. 9. 21:29

이오니아, 리디아, 페르시아 제국

 

 

○밀레토스와 이오니아 사상혁명

 

그리스 Greece 본토에서 에게해 Aegean Sea를 가로지르면 아나톨리아 Anatolia(터키 반도)의 그리스 도시들이 있었다.

상고기上古期 그리스 Archaic Greece의 밀레토스 Miletus는 이오니아 Ionia(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중부의 좁고 긴 땅) 최고의 상업·문화·군사의 중심지였다.

밀레토스는 오랫동안 그리스 세계의 한 부분이었지만 근동 또한 밀레토스 문화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오니아는 그리스 서사시의 탄생지였다.
근동 문학이 호메로스 Homeros(영어 Homer) 서사시에 얼마만큼이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밀레토스가 이룩한 그 밖의 창조적 결과물에서도 근동의 영향이 보인다.

근동 장식예술의 오랜 주제인 환상의 동물들은 서기전 7세기와 6세기의 밀레토스 도자기에 빈번히 등장했다.

밀레토스 지식인은 근동의 문학적·학문적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떤 작가는 페르시아 왕실 칙령의 과장된 서두인 "다리우스 대왕은 이렇게 말하노라."를 자기 방식으로 받아들여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이렇게 말하노라. 그리스인은 말이 많고 어리석도다."와 같은 표현처럼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곤 했다.

 

해안의 이오니아인 Ionian과 내륙의 리디아 왕국 Kingdom of Lydia 사이의 긴밀하고도 까다로운 관계는 대단히 폭넓은 문화 교류를 가져왔다.

리디아인 Lydian이 발명한 주화가 그리스 세계에 도입된 것은 이오니아인을 통해서였다.

한편 이오니아인은 소아시아 Asia Monor(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을 그리스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리디아의 압박그들은 아나톨리아 해안에 좋은 항구를 확보하고자 했다—을 받은 이오니아 주요 도시들은 마침내 이오니아 동맹을 결성했고, 독립적인 폴리스들의 정치·종교 동맹으로서 유사시 상호 원조를 서약했다.

이것은 그리스 세계에서 맺어친 최초의 동맹이었다.

 

밀레토스인은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특히 흑해 Black Sea 주변에 많았다.

그들은 이집트에서도 적극적이었는데 이집트에 있는 그리스인의 주요 무역 거점들은 밀레토스인이 조성한 것이었다.

밀레토스인의 식민지 건설 노력은, 소아시아 다른 지역과의 교역에서 그들이 누린 유리한 지위와 결합해 커다란 부를 안겨주었다.

서기전 6세기에 밀레토스의 세력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참주였던 트라시불로스 Thrasyboulos는 리디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밀레토스의 해운 이익을 보화기 위해 함대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지속적인 리디아의 압력과 사모스섬 Samos Island과의 경쟁으로 인해 밀레토스는 서기전 6세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밀레토스는 그리스의 추상적 사고와 철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서기전 6세기부터 소크라테스 Socrates 이전 철학자들 pre-Socratics(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전에 등장했으므로 이렇게 불린다)은 자연 kosmos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설명은 신적인 힘을 무시하거나 숫제 배제하곤 했기 때문에 보통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봤다.

이른바 밀레토스학파는 세 명의 사상가—탈레스 Thales(서기전 624~548/545), 아낙시만드로스 Anaximandros(서기전 610~548/545), 아낙시메네스 Anaximenes(서기전 545년경 활동)—로 이루어진다.

세 사람은 모두 근동 학문의 옛 전통을 바탕으로 삼았지만, 전형적인 그리스인답게 그것을 제각기 자기 식으로 소화했다.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고 관찰하면서 밀레토스학파 사상가들은 천체가 곧 신들이란 기존 통념을 거부하고, 자신이 관찰한 것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신들의 의지가 아닌 인간의 관찰을 사고의 시발점으로 삼아 밀레토스학파는 물리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합리적 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시를 감돌고 있는 세계주의적 분위기에 자극받은 밀레토스 철학자들은, 인간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이오니아 사상혁명'을 출발시켰다.

그리스인 최초로 세계지도를 그린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 Hekataios는 드넓은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질적인 문화와 그 신들에 대해 연구한 뒤 그리스인의 어리석음에 관한 글을 썼다.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 Xenophanes of Colophon는 트라키아인 Thracian(그리스 북쪽 지방의 야만족)이 푸른 눈과 붉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신을 믿었던 반면, 에티오피아인 Ethiopian은 그들의 신을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그린다고 지적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인간이 그들의 형상대로 신을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만일 소가 말을 할 줄 알고 물건을 만들 줄 안다면 소와 닮은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기도할 것이라 결론지었다.

이런 상대주의는 당대에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그 후 그리스 철학에서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종교적 믿음과 철학적 사고 사이의 균열 확대는 서양철학사의 획기적 발전이었다.

그러나 그 균열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철학은 소수를 위한 지적 유희였지 평균적인 그리스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이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심을 돌리자 폴리스 polis의 가장 진보적인 시민들마저도 기겁을 했다.

평균적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신들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어서 종교의 철학화 같은 경건치 못한 시도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와 철학 사이의 투쟁은 크레소파네스의 선언 이후 1세기가 지난 뒤 밀레토스가 아닌 아테네 Athenai(영어 Athens)에서 일어났다.

이오니아의 사상혁명은 서기전 546년 이후 잦아들었다.

이 무렵 페르시아 Persia는 리디아를 정복했고 더불어 밀레토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리디아의 종주권까지 손에 넣었다.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밀레토스의 저항은 그리스 세계에 일찍이 알려진 적이 알려진 적이 없었던 어마어마한 충돌—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 Greco-Persian Wars 또는 페르시아 전쟁 Persian Wars—로 나아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6.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