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3: 상고기 그리스(서기전 800~480년)의 폴리스1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3: 상고기 그리스(서기전 800~480년)의 폴리스1
새샘 2022. 5. 30. 20:51
상고기 그리스의 변화 | |
그리스 폴리스들의 범그리스적 식민지 팽창 | 서기전 800~400년 |
중장비보병 전술이 그리스 전투의 표준이 되다 | 서기전 725~650년 |
참주 정치의 등장 | 서기전 700~600년 |
스파르타의 군국화 | 서기전 600년 |
솔론의 개혁 | 서기전 594년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 서기전 508년 |
서기전 800년 무렵부터 서기전 480년까지 약 300년 동안의 상고기上古期 그리스 Archaic Greece의 폴리스 polis들은 서로 아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런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이 잘 남아 있는 3개의 폴리스, 즉 아테네 Athenai(영어 Athens), 스파르타 Sparta, 밀레토스 Miletus를 살펴보자.
하지만 이 세 폴리스는 물론 그 어느 폴리스도 폴리스 전체 역사 발전의 전형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에는 약 1,000개의 폴리스가 있었다.
우리는 그들 대부분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폴리스의 모습을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테네
아테네인 Athenian은 그들의 도시가 청동기시대 이래 존속해왔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그리스 세계에서 그들이 가졌던 정체성과 자긍심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티카 Attica가 암흑시대 그리스에서 가장 인구 많고 번영을 누린 지역이었다고는 해도, 아테네 자체는 암흑시대에 별로 비중이 크지 않았고 그런 상황은 상고기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암흑시대의 그리스는 코린토스 Korinthos(영어 Corinth)가 그리스의 대표적인 상업 도시였고, 스파르타 Sparta는 단연 군사 국가였으며, 에게해 Aegean Sea의 섬들은 아나톨리아 Anatolia 중부 해안 지역과 더불어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아테네는 농업 위주의 경제활동을 하면서 암흑시대에 등장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상업 활동으로 이익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토지에 재투자했다.
상고기 초기의 아테네 엘리트들은 상업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물론 궁극적으로 아테네가 지닌 에게해 지향성은 아티카 해안의 뛰어난 항구들과 더불어 아테네를 상업적이고 해양적인 폴리스로 만들었다.
그러나 서기전 6세기전까지만 해도 아테네의 귀족계급은 확고히 토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당시 귀족계급은 선출직 행정관(귀족이 독점)과 국가평의회(전직 행정관으로 구성)로서 아테네를 지배했다.
서기전 7세기 초 아르콘(집정관執政官) archon이라 불리는 귀족 관리들이 아테네의 행정권을 좌우했다.
9명의 아르콘은 폴리스의 시민적·군사적·종교적 기능을 주관했다.
아르콘의 임기는 1년이었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당시 아테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치 기구인 아레오파고스 Areopagos 회의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아레오파고스가 아르콘을 선출했으므로 누가 장차 아레오파고스 의원이 될 것인지도 아레오파고스가 결정한 셈이었다.
아레오파고스는 또한 고등법원 역할도 함으로써 아테네의 사법 절차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기전 7세기를 거치는 동안 아테네 사회는 인구 상당수가 채무노예[인신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관행이 있었고 채무를 갚지 못하면 채권자의 노예가 되었다]로 전락하면서 경제적·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귀족 파벌 사이의 대립 또한 폴리스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서기전 632년 저명한 아테네의 킬론 Kylon(영어 Cylon)은 참주정 僭主政 tyranny[혈통이나 체제에 상관없이 비정상적인 방식(쿠데타 등)으로 신분을 뛰어 넘어 찬탈한 군주를 말하는 참주에 의한 정치를 말하며, 그리스 정치에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정치 형태] 수립을 시도했지만 결국 신변안전을 약속받고 포기했다.
그러나 킬론의 정적들은 안전을 보장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킬론을 추방하면서 킬론의 지지자들을 살해했다.
킬론의 쿠데타 실패에 뒤이은 끝없는 보복 살해와 악순환은 아테네에서 최초의 성문법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기전 621년 귀족 드라콘 Dracon이 법안 작성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각별히 살인죄를 가혹한('매우 엄격한, 가혹한"이란 뜻의 영어 단어 'draconian'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 형벌로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아테네를 안정시키려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폴리스는 내란 직전의 상황에 몰렸다.
파국을 피하고자 서기전 594년 귀족과 중장비 보병은 솔론 Solon을 1년 임기의 단독 아르콘에 임명하고 아테네 정부 개편의 전권을 부여했다.
솔론은 상인으로서 명성과 재산을 얻은 귀족이었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아테네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서 신뢰를 받았다.
그는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솔론의 정치·경제 개혁은 훗날 아테네 민주정치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채무노예 관행을 금지했고 외국에 팔려간 아테네인 채무노예를 되사오는 데 필요한 기금을 조성했다.
그는 아테네인에게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경작을 장려하면서, 아테네를 상업 강국으로 만드는 데 필수불가결한 환금작물 경작과 도시공원(도자기, 기름 생산, 선박 건조 등) 진흥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참정권을 확대해 폭넓은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법정을 설치했고, 아레오파고스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아테네인 누구라도 이 법정에 항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재산 자격을 갖춘 자가 정무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도 재산 축적을 통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는 아테네 민회—에클레시아 ekklesia(영어 ecclesia)—에 아르콘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것은 중대한 발걸음이었다.
18세 이상의 모든 아테네 자유민 남성은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귀족계급은 그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했고 민중은 철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뒤이은 혼란 가운데 서기전 546년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 Peisistratos가 마침내 참주로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의도했던 대로 정부기관이 작동되도록 조치를 취했고 대규모 공공 토목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겉으론 온건하게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론 외국 용병을 이용해 조용하고도 지속적인 협박을 가했으며 체제 비판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솔론 개혁을 실현함으로써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민중의 힘을 강화시키면서 자치정부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는 죽는 날까지 인기 있는 지배자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인기가 없었다.
귀족 사이의 다툼으로 한 아들이 살해당한 직후, 다른 아들은 스파르타의 무력 지원을 받은 귀족들에 의해 추방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지배가 막을 내린 후, 서기전 510년에는 스파르타의 후원을 받은 귀족들의 반혁명 체제가 일시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두 세대에 걸쳐 권력에 접근한 경험이 있는 아테네 민중은 엘리트 과두정의 복귀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테네 민중은 클레이스테네스 Cleisthenes를 중심으로 뭉쳤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이었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 체제를 유능하게 보필했고, 참주정 몰락 뒤에는 민중의 대의를 옹호했다.
서기전 508년 아르콘으로 선출된 클레이스테네스는 재빨리 귀족 권력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아테네 인구를 10개의 선거 '부족'으로 재조직함으로써 그는 아티카 내부의 지역주의 표출을 억제했다.
지역주의야말로 귀족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 민회를 더욱 강화하고 아티카 전 지역으로 민주적 정부 조직을 확대했다.
그는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陶片追放) ostrakismos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로써 아테네인은 해마다 추방하고 싶은 인물을 결정할 수 있었다.
오스트라키스모스에 의한 추방 기간은 10년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런 권력을 행사하는 민중이라면 내전 상황이 오더라도 참주의 복귀를 막아내고 파벌 싸움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서기전 500년에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에서 올리브유·포도주·도자기의 주요 수출국이 되었다.
서기전 6세기의 정치 투쟁을 겪으면서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들보다 한층 민주적 기풍인 갖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중앙정부 조직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서기전 5세기에 맡게 될 임무와 역할—그리스 문화의 전형이자 독자적 방식의 참여 민주정 실현—에 대한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 Peloponnese[그리스 남부의 가장 큰 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아네테는 문화가 발달하고 세련되었으며 세계시민적이었다.
스파르타는 소박하고 조야粗野[천하고 상스러움]하며 전통적이었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양쪽에 사용된 형용사는 칭찬일 수도 있도 비판일 수도 있다.
스파르타는 4개(궁극적으로는 5개)의 촌락이 합쳐 폴리스를 형성했다.
이런 통일 과정의 흔적 때문인지 스파르타는 전 역사를 통해 두 왕실과 두 왕위 계승 혈통을 갖춘 이원 왕정二元 王政을 유지했다.
나이는 능력으로 두 왕 가운데 누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지를 결정했지만, 어느 쪽도 다른 쪽보다 우위에 놓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스파르타 내부에는 정치적 음모가 성행했다.
스파르타 체제는 스파르타 서부의 농업생산력이 높은 메시니아 Messinia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서기전 720년 무렵 스파르타는 메시니아를 정복하고 주민을 노예로 삼았다.
헤일로타이 heilotai[노예가 된 메시니아인을 이렇게 불렀다]는 그 지역에 남아 스파르타 시민 몫으로 배분된 땅에서 농사를 지어주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서기전 650년 무렵 헤일로타이가 인접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짧은 기간이나마 스파르타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마침내 스파르타가 승리하기 했지만 그 반란의 충격은 스파르타 사회에 영속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의 반란을 용납하지 않기로 작정한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군국주의적 폴리스가 되었다.
서기전 600년 스파르타는 모든 재원을 중장비 보병 유지에 투입했다.
군대가 어찌나 막강했던지 스파르타인은 자신만만하게 도시를 요새화하지 않은 채 내버려둘 정도였다.
스파르타 체제는 스파르티아타이 Spartiatai—동등자 또는 동료 Homoioi라고도 한다—라고 불리는 스파르타 시민 전원을 중장비 보병의 직업 전사로 만들었다.
아테네 사회가 민주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을 무렵, 스파르타의 시민은 '귀족화'했고 모든 시민은 중장비 보병 팔랑크스 phalanx[8열 종대로 어깨를 서로 맞댄 중장비 보병의 밀집대형 전술]의 일급 전사가 되었다.
스파르타의 사회는 전쟁을 위해 조직되었다.
스파르타 관리는 갓 태어난 아기가 계속 양육해도 될 정도로 건강한지 여부를 심사했다.
심사에서 탈락한 아기는 산 속에 버려졌다.
키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어린이는 7세가 되면 국가가 운영하는 공교육기관인 아고게 agoge에 들어갔다.
소년소녀는 12세가 될 때까지 함께 군사훈련, 체육 등의 신체단련과 경기에 참가했다.
그런 다음 소년들은 병영에서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소녀들은 18세 무렵 결혼할 때까지 계속해서 글 읽기와 글쓰기 교육을 받았다.
병영훈련은 매우 엄격했다.
훈련의 목적은 스파르타의 젊은 남성을 신체적 어려움에 익숙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18세가 된 청년은 피디티온 phidition(복수형은 피디티아 phiditia)—공동식사 클럽이자 전투 형제단—이란 집단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여기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그 청년이 온전한 스파르티아타이가 될 수 없으며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한다는 의미였다.
피디티온에 받아들여진 남성은 30세가 될 때까지 병영에 남았다.
20세에서 30세 사이에 결혼했지만 병영에서 거주하는 전사들은 아내를 남몰래 은밀히 만나야만 했다.
이것은 스파르티아타이 부부의 출산율이 현저하게 낮았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30세가 지난 뒤에야 스파르타 남성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60세가 될 때까지 현역으로 군복무를 했다.
물론 45세가 넘은 뒤에는 팔랑크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30세 이상의 모든 스파르타 남성 시민은 민회인 아펠라 apella의 구성원이 된다.
아펠라는 28명의 장로와 두 명의 왕으로 구성된 위원회인 게루시아(원로원) gerousia가 상정한 안건에 대해 토론 없이 가부만을 투표했다.
게루시아는 폴리스의 주요 정책결정기구였으며 가장 중요한 법정이었다.
구성원은 60세 이상으로 아펠라에서 종신직으로 선출되었다.
스파르타의 최고행정관인 에포로스 ephoros는 해마다 아펠라에서 선출되었으며, 교육제도를 감독하고 스파르타 전통의 수호자로서 활동했다.
에포로스는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출정 중인 왕이 잘못했을 경우 그를 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할 수도 있었다.
에포로스는 스파르타의 비밀경찰인 크립테이아 krypteia를 감독했으며, 가장 유망한 젊은 스파르티아타이 가운데서 요원을 선발했다.
크립테이아 요원은 시민을 감시하기도 했지만, 주요 임무는 헤일로타이 속으로 침투해 잠재적 반란자를 색출하고 살해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의 정책은 헤일로타이와 스파르티아타이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티아타이보다 인구가 10배나 많았고 메시니아에는 늘 반란의 기운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헤일로타이는 출정 시 방패와 창을 운반하거나 수하물 담당자로서 스파르타 시민을 보좌했다.
특이하게도 출정 중에 헤일로타이가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헤일로타이는 국내에서는 늘 감시대상이었다.
스파르티아타이는 해마다 정례적으로 헤일로타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자유를 얻기 위한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스파르티아타이는 잠자리에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스파르타인은 외국에 군대 파병하기를 극도로 꺼렸다.
장기간 자리를 비울 경우 본국에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있을까 두려한 것이 부분적이 이유였다.
헤일로타이 노예제는 스파르타 체제의 존립을 가능하게 했지만, 적대적 노예 주민에 대한 의존은 스파르타의 활력에 심각한 제약이 되었다.
스파르티아타이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부는 군사적 미덕을 추구하는 데서 멀어지게 만들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티아타이는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도 안 되었다.
스파르타 국가의 경제활동은 헤일로타이 또는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에 거주하는 자유민—페리오이코이 perioikoi, 즉 '주변 거주자'—에게 맡겨졌다.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 사회 안에서 일정한 권리를 보장받고 보호받았으며 일부는 관련 사업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파르타 국가 안에서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했고, 스파르타는 그들을 외국인으로 대하는 정책을 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한 스파르티아타이는 페리오이코이가 되었다.
스파르타인은 의도적으로 혁신이나 변화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리스의 '전통적 체제'—낡은 귀족 체제—의 보호자로 자처했다.
이런 역할을 자임하면서 스파르타는 인접 국가에 참주정이 수립되는 것을 방해했고 일단 수립되면 그것을 전복하려 했다.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의 엄격한 전통 옹호를 찬양했지만, 스파르타 사람처럼 살고자 하는 그리스인은 거의 없었다.
스파르타 체제의 결정적 약점은 인구 문제였다.
범죄 행위, 비겁한 행동 등 스파르티아타이의 지위에서 탈락하는 경로는 다양했지만, 스파르티아타이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스파르타에서 태어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스파르티아타이는 낮은 출산율 때문에 적정 수준의 인구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스파르티아타이의 인구는 상고기에는 1만 명에 달했으나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1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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