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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4: 창덕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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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4: 창덕궁

새샘 2022. 6. 4. 18:55

사진 출처-출처자료1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 -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에서는 1995년 처음으로 인정전 행각行閣[월랑月廊: 궁궐의 중심 건물인 정당正堂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터에 대한 발굴이 있었다.

이후 2001년에는 연못인 반도지에 대한 발굴을 시작으로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 금천禁川 에 만들어진 돌다리 금천교, 궁중 물품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상방 터, 우물 터, 당상관들의 회의장인 빈청 터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창덕궁 반도지의 지금 모습-반도지에 있는 정자는 관람정(사진 출처-출처자료1)

 

창덕궁 반도지半島池(연못가의 관람정 정자 때문에 관람지라고도 부른다)는 후원에 있는 표주박 모양의 연못으로 우리나라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어 반도지라 불린다.

원래 창덕궁 후원의 정자 존덕정尊德亭[임금이 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정치를 하길 바라는 이름] 남쪽에 긴 네모 모양으로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되었다.

이에 반도지의 원형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려고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먼저 이루어진 시굴조사에서 경복궁 동쪽의 대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인 <동궐도>와 <동궐도형>에 표현된 장대석 석축은 확인되지 않았고, 발굴 당시 석축 뒤로 1미터 가량 안쪽에서 사괴석四塊石[벽이나 돌담을 쌓는 데 쓰는 육면체의 돌] 석축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교舟橋(배다리: 작은 배를 한 줄로 여러 척 띄워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의 기둥자리로 생각되는 5곳도 확인되었다.

 

뒤이어 이루어진 본격 발굴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와 1976년 축조된 호안 석축과 주교 터, 집수시설 등의 유구를 확인했다.

또한 남쪽 석축 열 아래 부분에서 뻘층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가로질러 깔아놓은 가로목(횡목橫木) 열도 확인되었다.

 

 

창덕궁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를 지나가는 금천교에 대한 명당수 즉 금천禁川 위에 설치된 다리 금천교錦川橋(보물 제1762호)에 대한 발굴도 2001년과 2002년에 이루어졌다.

역시 창덕궁 복원계획을 위한 순수 학술발굴조사였다.

발굴조사는 금천교 홍예 내부(동·서 홍예), 남반부(남단 및 동·서 확장부), 동반부, 서반부, 어구부御溝(금천교 남북으로 흘러들어오는 대궐 안 개천 부위)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발굴 결과 금천교 동반부에 노출된 석렬 유구를 동서로 연결해보면 동쪽으로는 진선문, 서쪽으로는 금천교 동쪽 확장부의 깐돌(부석敷石)을 지나 금천교 서반부의 남북 방향 석렬의 북쪽 끝부분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됨을 알 수 있었다.

발굴단은 지금의 금천교가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창덕궁이 창건되고 중수되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옮겨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 조사 결과에 따라 지금의 금천교를 진선문에 맞추어 다시 옮겨 놓는 것, 즉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확실한 고증이나 자료 없이 단지 한 번 이상 옮겨 설치되었다는 가능성만으로 복원을 시도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또 다른 변형이나 훼손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굴단은 보고서 끝에 금천교 복원 문제는 구조학적 및 보존과학적 조사를 실시한 후에야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을 실었다.

 

 

복원된 창덕궁 상의원(상방) 일대(사진 출처-출처자료1)


창덕궁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발굴조사는 계속되었다.

2002년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쓰이는 일용품을 공급하고 보물을 보관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관청)상방尙房(상의원尙衣院) 터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조사지역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남쪽 바깥 줄행랑인 외행각外行閣의 내병조內兵曹 남서쪽에 위치했던 상방 터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조사는 남동쪽의 '가'지역, 남서쪽의 '나'지역, 북동쪽의 '다'지역, 북서쪽의 '라'지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가'지역에서는 크게 동쪽의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는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주춧돌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들과 남쪽의 동서 방향으로 놓인 기초 관련 유구가 있었고, '나'지역의 남쪽에서 주춧돌과 적심이, 북서쪽에서는 주춧돌과 석렬石列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다'지역에서는 2동의 건물 터 관련 유구가 확인되었고, '라'지역에서는 우물 1기가 조사되었다.

현재 상방 터 일대에는 위 사진처럼 복원되었다.

 

 

2008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의 연못인 부용지芙蓉池 주변 관람로 정비 공사 중 우물 1기가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발굴 결과 추가로 우물 1기가 더 확인되었다.

두 우물은 모두 팔각형의 화강암으로 만는 돌 우물로서 발굴단은 축조방법이나 출토유물로 볼 때 사용 시기가 서로 다른 것으로 추정했으며, 부용지에 가까운 조선 전기 우물은 조선 중기 우물 동쪽 지표 1.4미터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이 두 곳의 우물을 통해 발굴단은 그동안 문헌으로만 확인되던 창덕궁 안 임금이 마시는 어정御井의 위치와 규모, 축조방법 등을 파악하였다.

 

 

카페로 사용되고 있는 창덕궁 빈청 터 건물(사진 출처-출처자료1)

 

창덕궁 빈청賓廳은 조선의 정3품 이상 당상관들이 회의를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빈청은 1907년 고종의 차량 전시용 차고로 개조되어 '어차고御車庫'로 불리었고, 2010년에는 카페 등 편의시설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이에 2010년 빈청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문헌관 <동궐도>에 나타나는 다양한 시설 등을 확인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창덕궁 복원정비사업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발굴단은 조사 결과 빈청으로 알려진 건물 아래에서 발굴 당시의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는 선대先代 건물 터의 기단이 확인됨으로써 이것이 바로 <동궐도>와 <동궐도형>에서 보이는 빈청의 기단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단이 많이 파괴되고 교란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빈청 건물의 전체 모습을 발굴단은 확인하지 못했다.

2017년 지금도 빈청 터에는 위 사진처럼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6. 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