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2: 문화적·지적 반응 본문
서기전 4세기 그리스의 폴리스 polis 사회 붕괴는 철학, 예술, 정치사상 등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때로 학자들은 서기전 4세기 문화를 서기전 5세기에 이룩했던 위대한 예술적·지적 성취의 쇠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기전 4세기 문화에 대한 일방적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서기전 5세기에서 4세기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문학
조각가들은 이미 인물상에서 고도의 리얼리즘 realism(사실주의寫實主義: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재현하려는 창작 태도)을 성취했다.
리얼리즘은 고전기 예술의 현저한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기전 4세기에 접어들어 예술가들은 대상을 이상화된 근엄한 형태로 묘사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서기전 4세기의 예술가들은 또한 활력과 동작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런 추세는 앞으로 헬레니즘 시대 Hellenistic period(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서기전 323년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여 지중해의 주도권을 잡게 된 서기전 31년까지 약 300년 동안 그리스 문화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대를 말하며, 그리스어 헬레니즘 Hellenism이란 말은 '그리스인 자신'을 지칭하는 그리스어 '헬렌 Héllēn'에서 유래)의 숨 막힐 듯한 아름다운 작품들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연극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서기전 4세기의 작가들 가운데 아테네 황금시대의 위대한 비극작가들에 견줄 수 있는 작가는 없었다.
관객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소포클레스 Sophocles, 아이스킬로스 Aeschylus, 에우리피데스 Euripides의 비극을 더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4세기에는 천재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의 뒤를 이을 만한 작가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아리스토파네스 생전에 그의 신랄하고 풍자적 스타일은 좀 더 온건하고 덜 자극적인 드라마—오늘날 텔레비전 코미디 비슷한—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서기전 4세기와 3세기에 등장한 신희극 New comedy의 토대가 된 바로 이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서기전 4세기의 연극에 나타난 가장 놀라운 발전은 사회적·정치적 의미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관객은 연극을 오락과 도피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사회나 저명인사에 대한 통렬한 고발—아리스토파네스가 그 선구자—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희극의 유머는 이제 사람 잘못 알아보기, 복잡한 가족 관계, 희극적인 오해, 예절 파괴 등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이 추세는 서기전 4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문학 장르인 소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소설에서도 연인들은 엄청난 장애물에 직면하지만, 위험한 모험과 긴 이별 뒤에 재결합하면서 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희극 작가는 메난드로스 Menandros(서기전 342-292)였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현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희극을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고 평한다.
그러나 메난드로스의 동시대인과 로마인(그들의 희극 전통은 메난드로스 및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에게는 일상생활을 다룬 공허하고 낙천적인 희극이 오히려 커다란 호소력을 가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철학과 정치사상
소크라테스 Socrates(서기전 469~399)에 의해 시작된 지적 변화는 그의 수제자인 플라톤 Platon(영어 Plato, 서기전 429?~349)에 의해 훌륭하게 실행되었다.
서기전 429년 경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플라톤은 청년 시절 소크라테스 서클에 가입했지만 곧 스승의 사형 선고를 목격했다.
이 경험은 플라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플라톤은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피하는 대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철학 체계를 구축해 소크라테스를 옹호했다.
플라톤은 아테네에서 아카데미아 Academeia(영어 Academy)라고 불리는 비공식 교육기관(건물, 수업료, 정해진 커리큘럼이 없었다)을 통해,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주요 화자話者(이야기하는 사람)로 등장하는 대화편 Plato's dialogues(연극 형태로 표현된 논고論考)을 저술하면서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는 ≪파이돈 Phaidon(영어 Phaedo)≫, ≪향연 Symposion(영어 Symposium)≫, ≪국가 Dikaion(영어 Republic)≫가 가장 중요한데, 이 저작들은 현존하는 최고의 철학 전집인 동시에 불멸의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그가 살던 두 세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청년 시절 그는 스승이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절대 진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채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게 되었다.
플라톤은 회의주의를 물리치고 소피스트를 반박하기 위해서 윤리의 확고한 기초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데아 Idea 이론을 통해 이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상대성과 변화야말로 인간이 감각으로 인식하는 세계의 특징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겉모습이 철학의 적합한 기초라고 여기지 않았다.
더 높고 영적인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은 오직 정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원한 형태 또는 이데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불변의 이데아는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물질을 갖고 있다.
개개의 이데아는 지상 물체들의 원형, 또는 그 물체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의자, 나무, 외형, 색깔, 비례, 아름다움, 정의 등의 이데아가 존재한다.
최고의 이데아는 선善의 이데아 Idea of the Good로서, 그것은 우주의 대의이자 지도 원리였다.
인간이 감각으로 인식하는 사물은 최고의 실재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이며 사물의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다.
선을 이해하고 명상함으로써 인간은 미덕을 통한 완성이라는 궁극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혼란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유덕有德한(덕망德望이 있는)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한 플라톤은 그의 가장 유명한 대화편인 ≪국가≫에서 정치학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로 서술된 체계적 정치철학 논고이다.
자유와 평등보다는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추구했기에 플라톤은 인민 대부분—농민, 직공, 상인—이 지적으로 우월한 '보호자' 집단에 의해 통치되는 엘리트 국가를 옹호했다.
보호자는 지성과 성품의 천부적인 우월함 때문에 선택된다.
모든 보호자는 처음에는 병사로 복무하면서 사유재산 없이 공동생활을 한다.
그들 중 가장 지혜로운 자로 판명된 사람은 더 많은 교육을 받고 궁극적으로 '철학자 왕'이 된다.
이 계몽된 지배자는 삶의 모든 국면이 선의 이데아에 종속되도록 하며, 가장 현명한 자를 후계자로 선택한다.
후대의 주석자들은 가장 현명한 자의 지배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플라톤에게 '누가 보호자를 보호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플라톤은 적절히 교육받은 지배자는 권력이나 부에 의해 타락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있지만, 그 명제는 아직까지 현실에서 입증되지 않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그러한 실용적 관심은 플라톤의 수제자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Aristotle, 서기전 384~322)에게서 더욱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친에게서 자연 현상에 대한 신중한 관찰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는 정신안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물이 있다고 하는 플라톤의 전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철학 체계는 인간 정신이 감각적 경험의 이성적 조직화를 통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객관적 실체를 믿었고, 물체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함께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이성적 탐구를 더함으로써 자연 질서와 그 안에서의 인간 위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시, 정치학 등에 관한 독립적이되 서로 연관되어 있는 논고들을 통해 대단히 폭넓은 주제를 탐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상 최초의 논리학자였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일 것이다.
그는 어떤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하나의 타당한 결론이 도출되는 사고 형식인 삼단논법을 확립했고, 실체·양量·관계·공간 등 모든 철학적·과학적 분석의 토대가 되는 정밀한 범주를 확립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 믿음은 우주의 모든 사물은 형상이 질료質料(형상의 재료)에 남긴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주의(물질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와 순수한 유물론(우주의 모든 형식은 물질과 물질의 우발적 충돌일 뿐이라고 본다) 사이의 타협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질료의 세계를 형성하는 중대한 힘이며, 따라서 휴머니티 humanity라고 하는 실재하는 형상은 배 속의 태아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인간 존재가 될 때까지 이끌어준다.
모든 사물은 목적 있는 형상을 갖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목적론적이었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이 그 나름의 독자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성질은 생길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지속적인 운동 상태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은 완성된 궁극적 형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가 운동하는 것은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 목적의 원인을 그리스어로 '텔로스 telos', 우리말로는 '목적인目的因'이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철학은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물론 이런 도덕철학은 ≪국가≫에도 포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선은 개개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조화로운 기능에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은 이성적 능력 덕분에 동물과 다르며, 이성理城 logos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행복을 찾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것은 실제 문제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행동은 유덕한 행동이며, 미덕이란 황금의 중용—무모함과 비겁함보다는 용기, 과도한 방종이나 금욕적 거부보다는 절제—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실천적 삶보다 나은 것은 명상적 삶이다.
그런 삶은 태생적으로 이성적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라 할지라도 방해받지 않고 명상에만 전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천적 인간이기도 했던 그는 철학자일지라도 명상적 삶에 현실 세계의 실천적 삶을 융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정치를 목적—초자연적인 선의 올바른 추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목적 그 자체—선한 삶의 집단적 실행—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야만인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노예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성을 폴리스의 삶에서 배제했고 완전한 인간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여성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최고도로 행사되는 국가 생활에 참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모든 남성 시민은 국가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남성)은 정치적 동물(폴리스의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정을 최상의 정부 형태로 보지 않았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치를 '저급한' 정부 형태로 보았다.
그가 선호한 것은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가 견제와 균형으로 융합된 정체였다.
그런 정부는 자유인이 자연의 신분질서 안에서 신과 동물의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이성적 잠재능력을 실현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창성이 뛰어나긴 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상상한 완전 사회는 농업에 종사하는 수천의 가구로 이루어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소규모 참여 사회였다.
물론 그리스 문명은 그와 같은 세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서기전 4세기의 정치 현실은 매우 달랐다.
어쨌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문제를 숙고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폴리스에 잘못된 점이 있음을 인식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제시한 답변은 현존 정치체제의 재구성이지 새로운 대안은 아니었다.
○크세노폰과 이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지적 전통을 이은 또 다른 인물은 플라톤과 동시대 사람인 크세노폰 Xenophon(서기전 430~354)이었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가 고용한 그리스 용병대에 들어가 싸웠고, 소아시아에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Agesilaos(영어 Agesilaus)를 위해서도 싸웠다.
동족인 아테네인이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저지른 행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스파르타 영토에서 안락한 망명객으로 살았다.
그곳에서 크세노폰은 역사책(페르시아의 용병으로 싸운 1만 명의 그리스인 이야기 등), 전기,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망록, 이상적 왕권에 대한 논고, 스파르타 헌정, 영지 관리(≪오이코노미코스 Oikonomikos≫라는 책은 영어 단어 'economics(경제)'의 어원이 되었다), 사냥개 훈련에 관한 책 등을 썼다.
대부분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크세노폰은 본보기와 모범을 통해 훌륭한 정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이 나쁜 쪽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시각은 자신이 그토록 찬양했던 스파르타를 에파미논다스 Epaminondas가 무력화시키는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크세노폰은 테베 지도자를 어찌나 경멸했던지 그의 저서—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사≫의 속편에 해당한다—에서 에파미논다스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테네 웅변가 이소크라테스 Isocrates(서기전 436~338)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해법 역시 그리스 폴리스의 전면 개편이나 좀 더 포괄적 형태의 정치조직 창출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를 통합시킬 수 있는 비전과 능력을 지닌 인물의 주도 아래 페르시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이소크라테스는 생애 대부분을 그런 인물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에게, 때로는 그리스의 다른 강력한 참주들에게 호의를 보이곤 했다.
생애 말년에 접어들어 그는 그 일에 적합한 인물로, 대부분의 아테네인이 그리스인으로 간주하지도 않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영어 Philip II)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소크라테스는 필리포스 2세에게 공개 서신을 보내 그리스 세계의 병폐를 낱낱이 고하고 끝없는 자멸의 악순환 속에서 허덕이는 그리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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